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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아수라 생존형 비리형사 한도경(정우성)의 처절한 거리

 

아수라 생존형 비리형사 한도경(정우성)의 처절한 거리

 

 

일명 '사나이들의 영화'로 일컬어지는 정우성 주연, 김성수 감독의 영화 [아수라]는 가히 지옥을 연상케 하는 광기의 한마당이었다. 132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런닝타임 내내 단 1초인들 놓칠세라 불빛을 향해 무작정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처절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어리석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사나이들의 삶을 몰입해서 지켜보았다. 잔인하고 잔혹한 장면들도 꽤 많았지만 과장된 면은 없어서 공연한 오버액션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는 않았는데, 의외로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의 반응이 크게 달라서 좀 놀랐다. 

 

영화가 집중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이 끔찍하고 처절하긴 해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뭐 다를 게 있을까 싶었다. 예전에 조인성 주연,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를 보면서 느꼈던 것과 흡사한 느낌을 받았는데, 다만 [아수라]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비열한 거리>가 어떻게 <처절한 거리>로 변해가는지를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씁쓸하고 서글픈 것은, [비열한 거리]에서는 그래도 불법이 판치는 조폭의 세계를 다루었는데 [아수라]에서는 합법적인 세계에 몸담은 경찰, 검사, 시장들이 펼쳐 보여주는 비열함과 처절함의 극치여서 더 한탄스럽고, 더 치가 떨리다 못해 저들과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비애마저 느껴졌다.

 

아수라 생존형 비리형사 한도경(정우성)의 처절한 거리

 

영화 제목인 [아수라]는 본디 고대 인도신화에 나오는 선신(善神)이었으나 후에 하늘과 싸우면서 악신(惡神)이 된 아수라(阿修羅)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아수라는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 개인 흉측하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증오심이 넘쳐 싸우기를 좋아해서 전쟁의 신이라고도 불린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나 몹시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상태를 흔히 '아수라장'(阿修羅場)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신들에게 까불다가 원반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아수라들이 또다시 공격을 당해 그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영화 [아수라]에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하나같이 피를 철철 흘리고 죽어가면서도 서로 물고 뜯기를 멈추지 않아 줄줄이 시체가 되어 널부러지는 것이 영락없는 아수라장이다.

 

 

그 때문인지 이 핏빛어린 아수라장에서는 그냥 <나쁜 놈> 정도는 <좋은 놈>이다. 이권과 성공, 출세를 위해 온갖 범죄란 범죄는 다 섭렵하는 안남시 악덕시장 박성배(황정민)의 뒷배를 봐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 챙기는 강력계 형사 한도경(정우성) 정도는 그냥 <나쁜 놈>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이 <나쁜 놈>의 뒤통수를 치려다가 기어이 죽음을 맞는 한도경의 후배 형사 문선모(주지훈)는 <더 나쁜 놈>, 말기암 환자인 아내의 병원비 때문에 돈 되는 일이라면 살인청부도 마다하지 않을 기세인 한도경의 약점을 쥐고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하는 독종검사 김차인(곽도원)은 <더 더 나쁜 놈>이다. 그리고 이 나쁜 놈들을 모두 합친 <더 더 더 나쁜 놈>이 악덕시장 황정민이다. 나쁜 놈들의 나라 아수라에서 기꺼이 아수라장을 즐기는 아수라 대마왕이라고나 할까.

 

 

<나쁜 놈> 정우성 - 생존형 비리형사 한도경  

 

겉으로는 주민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일하는 선한 시장을 코스프레하면서 뒷구멍으로는 어마무시한 권력으로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안남시 박성배 시장의 똘만이 역할을 하고 있는 비리형사 한도경(정우성)은 선배 형사 윤제문과 다투던 중 본의 아니게 그를 살해하게 되고, 이 사실을 또 다른 악행으로 덮는 악의 늪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여기에다 자신의 약점을 알고 박성배 시장을 체포하기 위한 미끼로 그를 이용하려고 하는 검사 김차인(곽도원)에게도 협박을 받으면서 한도경은 더욱 독안에 든 쥐 꼴이 되어간다.  

 

흔한 <나쁜 놈> 중 하나인 한도경이지만, 더 나쁜 놈들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는 그는 차라리 가엾은 느낌을 유발한다. 일단 발을 내디디면 다시는 되돌아나올 수 없는 악의 늪으로 점점 깊이 빨려들어가는 자기 모습을 인식하면서도 손쓸 길 없는 무력감과 절망에 빠진 그는 결국 쥐도 막다른 골목에서는 고양이를 물 듯이 악에 받쳐 피로써 피를 부르는 형사 역을 큰 과장 없이 차분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더 나쁜 놈> 주지훈 - 줄 타는 후배 형사 문선모

 

한도경의 부탁으로 악덕시장 박성배를 수행하는 일을 맡게 된 후배 형사 문선모(주지훈)는 나쁜 놈 한도경보다 <더 나쁜 놈>이다. 자신을 믿고 박시장의 수행팀장으로 보낸 선배 한도경의 뒤통수를 치는 그는 한도경과 박시장에 대한 충성경쟁을 벌이며 뒤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도 있듯이 치열하게 악행의 소용돌이 속으로 달려들어간다. 한번 들어가면 죽어야 끝나는 악의 늪인 줄도 모르는 눈먼 자의 광기다.   

 

이 세상이 지위나 권력, 돈으로 갑질하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리게 된 데에는 이 문선모 같은 간사스럽고 교활한 인간들의 역할이 참으로 크다. 갑질을 하는 사람들이 마음놓고 갑질을 할 수 있도록 근사하게 상을 차려주는 것이 바로 이런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충성경쟁으로 눈이 멀어버린 그들에겐 그 끝이 보일 리 없다. 그러니 또 다른 <더 나쁜 놈>이 나타나 자신이 했던 악행과 똑같은 악행으로 되갚음을 당할 때까지 더 깊은 악의 늪으로 한 발 한 발 더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더 더 나쁜 놈> 곽도원 - 판 짜는 독종검사 김차인 

 

비리의 냄새를 강렬하게 풍기는데도 요리 빠지고 조리 빠져나가는 바람에 잡아들이 못하고 있는 박성태 시장을 기어이 체포해 승진도 하고 출세도 하려는 독종검사 김차인(곽도원)은 천성은 지극히 폭력적이면서도 겉으로는 직접 주먹을 쓰지는 않는 느물거림과 의뭉스러움을 장착한 캐릭터다. 그는 병든 아내 때문에 악의 늪에서 도저히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비리형사 한도경을 쥐락펴락하며 박성배 시장을 잡아들이는 미끼로 철저하게 이용하는 <더 더 나쁜 놈>이다. 

 

더 가관인 것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그는 그 떵떵거리던 태도를 게눈 감추듯 감추고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무릎까지 꿇으며 목숨을 구걸하더라는 것이다. 제 목숨은 소중한 줄 알면서 남의 목숨은 하찮게 여기는 이런 전형적인 비열한을 윗사람으로 둔 사람은 하루하루가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일망정 장렬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적어도 곽도원이 연기한 김차인 검사인데 말이다. ㅎㅎ)      

 

 

<더 더 더 나쁜 놈> 황정민 - 죄짓는 악덕시장 박성배 

 

재개발 열풍을 등에 업고 안남시를 한입에 털어놓으려는 안남시장 박성배(황정민)는 탐욕과 비열함으로 똘똘 뭉친 악의 끝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아수라 나라의 아수라 신들 사이에서도 단연코 대마왕의 자리를 차지할 법한 <더 더 더 나쁜 놈>, 그러니까 나쁜 놈의 최고봉이다다. 

 

그나마 선한 시장 코스프레만이라도 삼가주면 좀 덜 역겨울 텐데, 앞에서는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뒤로는 악의 칼을 휘두르는 그는 공직선거법 위반, 부동산 개발 비리, 살인교사 등 악행이라는 악행은 빠짐없이 저지른다. 연신 싱글싱글 웃다가도 눈깜짝할 사이에 잔혹성을 보이고, 필요하면 스스로 팔을 끊으려고까지 하는 자해도 서슴지 않는 그는 사이코패스일 게 분명하다. 아니, 제발 사이코패스라면 좋겠다. 이런 인간이 평범한 사람 중에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것 같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삶을 두 가지 큰 기준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옳고 그름에 바탕한 기준이고 또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바탕한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은 다시 네 등급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경우, 둘째는 옳음을 고수하고도 해를 입는 경우, 셋째는 그름을 추종하고도 이익을 얻는 경우, 넷째는 그름을 추종하고 해를 입는 경우다.

 

정약용의 아들이 귀양살이를 가 있는 아버지에게 힘을 써줄 수 있는 분에게 편지를 써서 잘못했다고 빌고 귀양살이를 면하게 해달라고 애걸해 보라고 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정약용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네가 권하는 일은 나로 하여금 세번째 등급을 택하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조만간 네번째 등급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 불보듯 뻔한데 무엇 때문에 내가 그 짓을 하겠느냐"고 일갈한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세상일이란 게 그리 녹록한 게 아니다. 그러니 옮음을 고수하고도 해를 입고 귀양살이를 떠난다 한들 그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더 그른 길로 빠지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이다. 만일 그 억울함을 받아들이기 싫어 손사래를 친다면 결국 그름을 추종하고 해를 입는 네번째 등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곳이 바로 이 동물의 왕국, 약육강식의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 중에는 그름을 추종하고 얻은 달콤한 악마의 열매가 곧 끔찍한 악의 열매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끌려들어가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만 아는 이들은 자신의 그 어리석음을 오히려 현명함이나 능력으로 착각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올바르게 살고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길이 아니어서 가지 않는 것을, 길을 몰라서 못 가는 것으로 오해하고 비웃는다. 처절한 죽음을 맞는 순간에나마 그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는 있을까.  

 

이상, 아수라 생존형 비리형사 한도경(정우성)의 처절한 거리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