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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벤허 증오와 복수 대신 사랑과 화해, 용서의 해피엔딩

 

벤허 증오와 복수 대신 사랑과 화해, 용서의 해피엔딩

 

 

2016년판 [벤허]는 주인공 유다 벤허 역을 맡은 잭 휴스턴에게서 느껴지는 이미지와 1959년판 [벤허]의 주인공 찰톤 헤스톤에게서 느껴지는 이미지만큼이나 서로 다른 영화로 다가왔다. 전설적 배우 찰톤 헤스톤이 연기한 [벤허]가 웅장하고 카리스마 넘치고 비장미마저 느껴졌다면, 잭 휴스턴의 [벤허]는 현대적 외모의 꽃미남이 보여주는 연기의 한계 때문인지 아무리 강하고 센 척해도 자연스럽게 풍겨나와야 할 절실한 강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원작 [벤허]를 스케일이 어마어마한 대서사시라고 한다면, 이번 [벤허]는 화려하고 불꽃 튀는 액션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라도 한 편 보고 나온 기분이랄까. 아무튼 원작에서 전편에 흘렀던 온몸을 죄어오는 듯한 박진감과 긴장감이 크지 않아서 좀 아쉬웠지만,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벤허 증오와 복수 대신 사랑과 화해, 용서의 해피엔딩

 

다만, 한 가지 더 아쉬운 게 있다면, 주인공 유다 벤허 역을 맡은 잭 휴스턴의 카리스마가 배신과 복수로 똘똘 뭉친 메살라 세베루스 역의 토비 케벨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를 압도하지 못한 데서 오는 안타까움이었다. 원작 [벤허]에서 찰톤 헤스톤이 등장만으로 온몸에서 뿜어나오는 카리스마로 메살라를 찍어누르던 느낌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던 것이다. 

 

하긴 주인공 유다 벤허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세기의 배우 찰톤 헤스톤과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좀 무리이긴 할 것 같다. 이번 벤허를 보면서 요즘의  CG 처리한 것보다 오히려 당시 전차경주 장면 등 격렬한 액션을 직접 소화해 냈던 찰톤 헤스톤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던가를 더 뚜렷이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2016년 티무르 베크맘베토브 감독에 의해 새롭게 재탄생한 불멸의 명작 [벤허]는 본디 1880년 남북전쟁의 영웅인 루 월리스 장군이 쓴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1907년 무성영화로 처음 만들어진 후 1925년, 1959년에 이어 이번이 네번째 리메이크 작업이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면, 로마제국 시대, 예루살렘의 귀족 유다 벤허는 로마군 사령관이 되어 돌아온 형제와도 같은 친구 메살라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러나 뜻하지 않았던 메살라의 배신으로 벤허는 가문의 몰락과 함께 모든 것을 잃고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가혹하고 끔찍한 5년간의 노예생활 중에 벤허는 친구의 배신에 이를 갈며 복수를 결심하고 기어이 살아남아 돌아오지만, 사랑하는 아내 에스더(나자닌 보니아드)는 복수는 복수를 부를 뿐이라며 벤허를 만류한다. 갈등하던 벤허는 간악한 복수가 아닌 진정한 승리를 위해 제국에 맞서 목숨을 건 전차경주를 준비한다. 

 

 

같은 영화나 책을 몇 년에 걸쳐서 다시 보거나 읽게 되면, 그 사이에 달라진 주변상황이나 나이가 들어가는 데 따른 사고의 변화 때문인지 예전에는 못 봤던 것을 보게 되거나, 당시에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번에 벤허를 보면서도 역시 여러 가지 다른 감정이 느껴꼈지만, 그 중 더욱 크게 다가온 변화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정복자나 왕, 나라의 지도자들에 의해 늘 핍박받고 고초를 겪는 백성들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토를 넓히기 위해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그들이 호화판으로 놀고 먹기 위해 사용된 가장 만만한 수단이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새삼 분노가 느껴진 것이다.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데 들어가는 막대한 돈, 자신들의 호사를 위해 퍼부어대는 그 돈을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쓴다면, 황금으로 치장한 그들 옆에서 헐벗은 모습으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여유롭고 평화로워질까 싶은 것이다.

 

또 하나는 저마다 복수의 칼을 버리고 미래의 행복을 꿈꾸는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영화가 끝났음에도, 그 후에도 과연 지금처럼 다정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배신과 복수로 이를 갈던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조만간 또 그전과 유사한 일이 일어나거나 어떤 피치 못한 곤경에 빠지면 앞서와 똑같이 배신하고, 증오하고, 복수의 칼을 갈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싶었던 것이다.

 

물론 무엇하러 굳이 떠올릴 필요 없는 미래를 생각하며 의구심을 갖느냐,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그냥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이면 그만 아니냐고 한다면 달리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아마도 그 동안 서로를 믿지 못해 경쟁하고 견제하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세상의 때가 묻은 탓도 있을 테고, 또 현실세계가 도무지 해피엔딩이란 것을 믿어서는 안 될 만큼 지저분하고 혼탁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젠 "그래서 그 후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맺곤 하던 동화책을 덮으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행복해하던 시절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으리라.     

 

 

다들 채찍이라도 맞을까봐 겁먹고 쭈볏거리고 있는 군중을 뚫고 목마른 유다 벤허에게 물을 건네는 예수다. 물을 마시게 해주면서 예수는 "너도 나에게 한 잔의 물을 줄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하고, 실제로 유다 벤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골고다의 언덕으로 올라갈 때 예수에게 물을 건넬 기회를 갖는다. 

 

배신은 배신을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면, 물 한 잔으로 상징되는 사랑과 용서 또한 사랑과 용서를 부른다는 메시지가 은연중에 전해지는 장면이다.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잔혹한 세월을 견디면서도 인류가 건재해 온 것은 증오와 복수가 아닌 사랑과 화해, 용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를 연기한 로드리고 산토로는 “전 세계 수십억의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저마다의 이미지를 생각하고 있다. 덕분에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지만 예수의 가르침, 영성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했고, 신화 너머에 있는 인간 예수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내고자 했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는데, 뒷모습만으로 신비스러움을 보여주었던 원작의 예수와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이미지로 다가와서 좋았다. 지도자가 가져야 할 진짜 리더십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스스로 몸을 낮춤으로써 더 우러러보게 만드는 힘 말이다.

 

이상, 벤허 증오와 복수 대신 사랑과 화해, 용서의 해피엔딩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