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를 사랑한 황제 유비의 용인술 4가지
흔히 조조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유비에게는 우호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관념이 만들어진 데에는 유비가 충성과 정의를 우선시하는 긍정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유비가 거느렸던 부하들은 서로의 정과 의리를 생명보다도 소중하게 여겼으며, 유비는 정의로 부하들의 마음과 몸을 얻었습니다.
중국 고대 의학사와 문헌 연구를 하고 있는 리아오 교수는 [황제 유비]에서 맨주먹으로 지존이 된 자수성가형 리더인 유비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는데, 이 중 [인재를 사랑한 황제 유비의 용인술 4가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타고난 능력으로 혼란스러운 난세에 시달리는 백성과 부하들에게 희망을 보게 해주었던 유비의 덕목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인재를 사랑한 황제 유비의 용인술 4가지
기회를 얻을 가능성에 대해 유비는 거의 참담한 수준이었다. 조조나 손권에게 비할 바가 못 되었던 것이다. 일단 막강한 집안의 배경이 없었고, 정치적인 경험 역시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히 인간관계도 좋을 까닭이 없었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한나라 황실 후예라는 명분뿐이었다. 하지만 유비는 결코 낙담하지 않고 잔혹함과 교활함으로 승부를 건 조조와 달리 백성들에게 일관되게 인의의 태도와 너그러움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기회가 없다거나 운명이 공평하지 않다는 불평을 자주 털어놓는다. 남의 성공을 보고 운이 좋았던 것뿐이라고 시기어린 말도 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말하면,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유비처럼 일관되게 긍정적인 인의의 카드를 쓴다면 그 기회를 거머쥘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큰 성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기회를 잡아야 성공의 길로 접어들 수 있는 법이다.
최고 지도자가 권력을 공고하게 하려면 간언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나름의 아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집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면 실수를 초래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아집을 없애는 것은 성공에 이르기 위한 보증수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언로를 열어놓고 간언을 잘 듣는 것이 권력을 공고하게 하는 지름길인 셈이다.
유비는 말년에 관우에게 복수하기 위해 오나라를 토벌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제갈량은 출정을 반대했지만 유비는 듣지 않았다. 이것이 유비가 제갈량의 간언을 듣지 않은 유일한 경우였다.
결국 유비는 이릉에서 오나라의 화공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 다른 군주들 같았다면 "제갈량이 반대했기 때문에 내가 패했다"며 책임을 뒤집어씌우거나 화풀이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유비는 제갈량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했다. 이처럼 간언을 잘 듣는 사람은 나중에라도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법이다.
청나라 조익은 삼국 군주의 용인술의 특징에 대해 논했는데, 그에 따르면 조조는 권모술수로 부하들을 통제했지만 유비는 충의라는 덕목으로 관계를 맺었다. 단, 유비가 모든 부하들과 그런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으며, 일부 부하들에게는 단호하고 까칠하게 대했다. 사실 최고 지도자는 상황에 맞춰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덕목을 지녀야 한다. 융통성이 없는 무골호인은 결과적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무능한 지도자의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용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유비는 손에 한없이 피를 묻힌 조조나 손권과는 확실히 많이 달랐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과감했다. 유비가 우유부단하다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조조나 손권과 함께 천하를 삼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중국 고대사회에서 '인의'라는 두 글자는 금 같은 희귀한 금속과 다름 없었다. 얼굴에 붙이면 얼굴을 빛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담도 될 수 있었는데, 인의라는 것이 윤리, 도덕적인 무거운 짐이 돼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유비가 주창한 인의가 양날의 칼인 것은 그래서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비는 이미지 조작에 능했다. 마지막에 가서는 윤리, 도덕에 비쳐볼 때 문제가 있는 행동을 많이 했지만, 외견적으로는 불인불의한 일은 하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자신에게 강하게 남도록 처신한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유비는 타고난 이미지 정치의 귀재였다고 할 수 있다.
불인불의한 일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이미지 정치와 관련된 행동은 타고난 성격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지 정치가 주는 효과를 유비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서 나중에는 독립하게 된 것 역시 이런 이미지 정치의 결과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인재를 사랑한 황제 유비의 용인술 4가지였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