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일화 10선
1935년 58세의 도산 안창호는 대전교도소에서 나온 후 국내 순방의 길을 떠납니다. 호남과 영남을 두루 살피고 평안북도 산천에 들렀을 때 당시 오산학교 주기용 교장 댁에 머물게 됐는데, 동지들이 정성을 다해 좋은 병풍을 펴드리고 새 비단 이부자리를 깔아드리자 "저는 민족의 죄인이올시다. 이 민족이 저를 이렇게 위해 주는데 저는 민족을 위해 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엎드려 기도했다고 합니다. 나라를 위해 가정의 행복과 개인의 생명까지도 버린 애국자로 독립정신의 산 증인이자 민족정기의 본보기였음에도 자신은 민족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한낱 죄인이라고 참회한 것입니다.
숭실대 명예교수이자 도산아카데미연구원 설립자인 안병욱 교수님 등이 쓰신 [안창호 평전]에는 이 외에도 도산 안창호의 일화가 여러 편 실려 있는데, 그 중 10편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일화 10선]입니다. 이미지는 나라독립에 일생을 바친 도산 안창호의 일대기를 다룬 SBS 8.15특집다큐멘터리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에서 가져왔습니다. 도산 안창호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고니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일화 10선
1 약속을 꼭 지켜라
도산은 상해에 있을 때 소년들을 무척 좋아해서 여러 모로 소년단을 도와주었다. 어느 날 한 소년이 소년단 5월 행사에 쓸 돈이 필요하다고 도산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그때 도산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4월 26일에 돈을 갖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날 돈을 준비해서 소년의 집을 찾아갔다.
그 날은 바로 독립투사 김구 선생님의 지도하에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 백천대장에게 폭탄을 던진 의거를 일으킨 날이었다.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 애국지사들을 체포하기 위해 곳곳에 잠복하고 있었는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년의 집에 갔다가 잠복한 일본경찰에게 붙들려 한국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대전에서 3년 반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처럼 신의가 두터웠던 도산의 생활신조이자 행동원칙은 <약속을 꼭 지켜라>라는 것이었다.
2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했다
도산이 3년 반의 옥고를 치르고 대전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일본 경찰은 도산에게 자유의 몸이 되면 또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도산은 늠름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했다. 내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도산의 민족혼과 독립정신은 이토록 놀라웠다.
3 질서와 정돈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도산은 질서와 정돈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도산은 만년에 평양 근처 대보산에 송태산장을 짓고 살았는데, 그 산장은 언제나 청결했다.
어느 날 도산은 그 마을 사람의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집안에 들어서니 문지방 앞에 여러 켤러의 신들이 아무렇게나 어지러이 놓여 있자 도산은 그 신들을 하나하나 반듯하게 정돈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손님들이 밖으로 나올 때 신들이 반듯하게 정돈돼 있는 것을 보고 도산이 그렇게 한 것을 알고는 감동을 받았다. 이처럼 도산은 이래라 저래라 말하기 전에 손수 모범과 본보기를 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했다.
4 단돈 한푼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도산은 큰일에 정성을 다하였음은 물론이고 지극히 작은 일에도 온갖 정성을 다했다. 화분 하나를 사면서도 합당하게 생각되는 가격이 아니면 사지 않았는데, "그 돈이 어떤 돈이기에"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즉 자신이 쓰는 돈은 흥사단 동지들이 피땀으로 모아준 것을 알기에 단돈 한푼이라도 허투루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국고금을 쓰고 국민의 혈세를 다루는 사람들이 도산의 이 정성의 10분의 1만 가져주어도 부패가 사라질 것이다.
5 수고는 자신이 하고 공은 남에게 돌렸다
도산은 늘 겸손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았으며, 오만불손한 마음과 유아독존의 영웅주의적 태도는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수고는 자신이 하고 명예와 공은 남에게 돌리는 것이 도산의 철학이었다.
1919년 도산은 상해 임시정부의 노동총판으로서 나랏일을 보았다. 모두 그를 대통령 대리의 후보자로 추천했다. 도산은 그 자리를 끝내 사양했지만 결국 대통령 대리로 선정됐는데, 그때 그는 "나는 잠시라도 대통령 대리의 명목을 띠고는 몸이 떨려서 시무할 수가 없소"라고 말했다. 나같이 능력이 부족하고 인격이 모자란 사람이 그처럼 높은 자리에 앉으면 송구하고 몸이 떨려서 일을 할 수가 없다는 도산의 겸허한 말은 공인의 금언이자 나라의 중책을 맡고 국사를 담당하는 사람의 정신자세였다.
6 언제나 단정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간 도산은 취소실에서 옷을 벗기우고 마룻바닥에 꿇어앉힌 소독물 세례를 받았다. 차디찬 소독물을 펌프로 막 뿜어내는 바람에 소름이 끼치고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지만 도산은 머리 한 올 까딱하지 않고 단정한 태도로 그 차디찬 소독물을 고스란히 받았다. 오히려 시원한 기분을 느끼는 듯 태연자약했는데, 민족적인 체면과 지도자의 위신을 지키기 우해 열화 같고 강철 같은 의지력이 그 시련을 단연한 태도로 극복하게 했던 것이다.
도산은 정신통일의 훈련과 의지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양으로써 평소 아침마다 참선을 했다. 도산이 추운 감옥에서 차디찬 소독수의 세례를 받았을 때 태연자약한 태도와 단정한 자세로 그것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평소의 의지력과 수양의 힘이었다. 또 민족의 지도자요 혁명투사로서 일본인들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결심과 자신을 믿고 따르는 여러 동지와 제자들에게 어지럽고 추한 모습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도산으로 하여금 늠름한 태도를 취하게 했던 것이다.
7 아들 필립에게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못 사준 것이 죄스러웠다
도산의 59년 4개월의 생애 중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지낸 기간은 13년밖에 되지 않는다. 나라 일로 바빠서 가족들과 가정의 안락함을 누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도산은 "내가 지금까지 아내에게 치마 하나, 저고리 한 감 사준 일이 없었고, 필립에게도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못 사주었다. 그러한 성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랬는데 그것이 여간 죄스럽지 않다"고 말했는데, 일신의 안락가 가정의 행복의 희생하고 국사에 온힘을 바친 도산의 놀라운 애국심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8 나는 지금 7가지 병이 생겼다 하오
도산의 건강은 말년에 많이 쇠약해졌다. 대전 감옥생활로 그의 숙환인 소화불량이 더욱 악화되었고 폐와 간도 나빠졌다. 도산의 임종시의 병명은 '간경화증 만성기과지염 위하수증'이었다.
서울대학 병원 입원실로 선우훈씨가 방문했을 때 도산은 입안이 마르고 혀가 잘 돌지 않아서 말을 못했고 몸이 극도로 수척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수염은 희고, 머리의 반은 누렇고 반은 희어서 황백색이었다. 물을 숟가락에 떠서 입술을 축여드리자 비로소 도산은 입을 열어 "의사의 말로는 나는 지금 일곱 가지 병이 생겼다고 하오. 지금 위가 상하고 이가 빠졌고 폐와 간이 상하고 복막염, 피부염 모두 성한 곳이 없소"라고 말했다.
도산은 글자 그대로 온몸이 병투성이가 되고 뼈와 몸이 가루가 되도록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동포의 운명을 염려했다.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이 계획하던 민족자립의 방안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가는 것을 안타깝고 한스러워할 뿐이었다.
9 낙심 마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까물거리던 민족의 비극을 보며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낸 도산은 망국의 슬픔을 누르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장년의 온 정성과 정열을 바쳤다. 도산이 옥고와 병고, 탄압 속에서 노년을 보낼 때 일본의 통치는 항구화되고 한국은 독립의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릴 것으로 믿고 변절하고 부일하는 애국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도산은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력과 선견지명으로 "일본은 자기 힘에 지나치는 큰 전쟁을 시작했으니 필경 이 전쟁으로 인해 패망할 것이오"라며 낙심하는 동지들에게 희망과 용기로써 격려했다.
"한 민족의 운명이 그렇게 간단히 처리되는 것이 아니오. 나는 국난을 돌파할 수 있다고 믿고. 나는 민족 문제에 대해 낙심하지 않고. 그대들도 낙심 마오"라고 말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형편은 독립의 길이 아득하고 탄압은 날로 심해서 모두들 민족의 앞날에 대해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도산은 우리 민족에게 "낙심 마오!"라는 말을 남겨놓은 것이다. 민족의 가장 큰 시련과 고난과 위기 속에서도 도산은 결코 낙심하지 않는 정신적 자세를 가졌던 것이다.
10 이제 깨끗이 된 손을 다시 더럽히지 말라
천성이 교육자였던 도산은 일생 동안에 평남 강서의 점진학교, 평양의 대성학교, 중국 남경(난징)의 동명학원 등 학교를 세 개 세웠다. 교육을 통해 인물을 기르고 국력을 배양하려고 한 것이다. 이 세 개의 학교 중 도산의 영향력을 마음껏 바루히하고 그의 교육자로서의 자질과 천품을 유감없이 표현한 것은 대성학교에서였다.
한편 중국 남경의 동명학원은 미국으로 가는 한국 학생들에게 특히 어학공부를 준비시키기 위해 만든 학교였다. 도산은 그 경비를 조달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당시 남경에 체류하는 한국 동포들 중에는 마작에 미친 사람들이 있었다. 이 놀음에 밤을 밝히고 그것으로 생활비를 조달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도산은 망국병인 마작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삼가라고 했다.
도산이 알고 있던 한 사람이 마작에 미쳐 돌아다니자 도산은 어떻게 해서든 그가 마작을 그만두게 하려고 어느 날 그를 불렀다. 그리고 세숫대야에 물을 떠놓고 손을 씻게 한 다음 근엄한 어조로 "이제 깨끗이 된 손을 다시 더럽히지 말라"고 훈계했다. 그로 하여금 마음의 새로운 결단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 맑은 물로 손을 씻게 한 것이다. 도산은 인격의 감화력이 항상 몸에 풍겼고 그것을 통해 교육의 효과를 거둔 뛰어난 교육자였다.
이상,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일화 10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