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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을 맞아 돌아본 제암리 학살사건

 

삼일절을 맞아 돌아본 제암리 학살사건 

 

 

제암리 학살사건을 아시나요? 제암리 학살사건은 1919년 4월15일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제암리 교회에서 일본 군인들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말합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인 1919년 3월 31일 화성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 명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면서 만세운동을 계속합니다. 그러자 일제는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문을 모두 잠그고 집중사격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질러 안에 있던 주민들이 모두 불에 타죽고 맙니다.

 

올해로 98주년인 삼일절을 맞아 EBS 역사채널 [제암리 1919]를 바탕으로 일제의 만행에 의해 20여 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던 [제암리 학살사건]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제의 또 하나의 만행입니다. 

 

 

1982년 9월 경기도 화성에서는 제암리 학살사건에서 살아남은 84세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이  발굴조사에서 조끼단추, 동전, 병, 철사, 그리고 한덩어리로 엉킨 채 발견된 20여 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 3월 4일 평안남도 강서, 3월 16일 경상남도 합천 등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3월 28일 송산, 3월 31일 향남, 4월 3일 장안, 우정 등 경기도 화성에서 수천여 주민들의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러자 일제는 예고 없는 발포로 주민 46명 사살하고 4백여 명을 연행하여 갖은 고문을 가한다. 이에 분개한 주민들은 봉화 시위를 벌이고,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고, 급기야 일본 순사를 처단하는 공격적인 시위를 벌이게 된다.

 

 

화성을 눈엣가시로 여긴 일제의 특별 검거반은  4월 15일 오후 2시경 화성 제암리에 들이닥쳐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러 왔으니 다들 교회로 모이라"고 말한다. 주로 15세 이상의 성인 남자들을 제암리 교회로 불러모았고, 미리 명단을 파악해서 교회에 오지 않은 사람들까지 찾아서 데려오는데, 모두 모이자 교회 문을 폐쇄하고 무차별 사격을 가한다.

 

 

마구잡이식 사살을 한 일본군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교회를 불태운다. 이때 처참히 학살당한 주민이 20여 명이나 된다. 게다가 집집마다 불을 질러 평화롭던 마을 제암리는 화염 속에 휩싸이는데, 생존 주민 전동례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 이튿날까지 여기서 30리 밖까지 재가 날아가고 송장 탄내가 났다"고 한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은 사건 발생 3일 후 현장에 도착한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찍은 사진에 의해 세상에 공개된다. 일본군은

'집단적으로 반항할 기세가 보여 사격했고, 혼란 중에서 서쪽 집에서 불이 나 바람을 타고 교회당에 옮겨붙었다"고 증언했다. 즉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이 교회 안팎에 짚을 늘어놓고 석유를 끼얹어 불을 질렀으며,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불을 질렀다고 한다. 즉 일제가 치밀하게 계획한 만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명령 오해로 기록되고 판사 이름이 생략된 재판을 거쳐 제암리 학살의 주범 일본군 아리타 중위는 50여 일의 근신 처분 후 무죄 판결을 받는다.

 

 

1982년 20여 구의 유해는 사건 발생 63년 만에 발굴되어 제암리 교회 뒷동산에 안장되어 있다. 1982년 9월 29일 문화공보부는 사건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했다.

 

이상, 삼일절을 맞아 돌아본 제암리 학살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