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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조선의 글쟁이들 박지원 허균 김시습 정철 강희맹

 

조선의 글쟁이들 박지원 허균 김시습 정철 강희맹

 

조선의 글쟁이들 박지원 허균 김시습 정철 강희맹

 

'조선의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부제가 붙은 문효의 [조선의 글쟁이들]에는 시대를 아파하고, 백성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었던 조선의 글쟁이 14명의 발자취를 좇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탄탄대로의 안정적인 삶 속에서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삶 자체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져 리얼한 문장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글은 그들의 가슴속에 쌓인 울분이기도 했고 오랫동안 연구해 온 학문적 성과이기도 했습니다. 

 

이 중 경직된 유교사회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자 했거나 주류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이 삶을 살았던 연암 박지원, 교산 허균, 매월당 김시습, 송강 정철, 사숙재 강희맹 등 다섯 분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나같이 척박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향기로 써나간 그 글의 밑바닥에는 고통받는 민중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글쟁이들 박지원 허균 김시습 정철 강희맹입니다. 그분들의 삶을 통해 <글이란 강자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연암 박지원 낡은 사회에 도전한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자신의 호를 내세운 연암체가 당대 사회의 큰 이슈가 될 만큼 연암 박지원의 글쓰기는 과히 파격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글을 쓰는 사대부들은 전통적으로 지켜야 했던 바르고 고운 문체에 길들여져 있었지만 연암은 기존의 판에 박힌 글투를 과감하게 탈피하고 소설식 문체와 해학적인 표현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만들었다.

 

연암은 글이 과거를 통해 입신하기 위한 도구도 아니고 산림에서 물러나 심성을 기르기 위한 자기위안의 도구도 아닌, 선비로서 사회를 비판하는 중요한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 좇는 미천한 자들의 교우를 통해 충의에 대한 재래적 견해와 양반사회를 비판한 <마장전>, 천민의 성실성과 양반의 무위도식을 비교한 <예덕선생전>, 양반의 타락과 무위도식을 풍자한 <양반전>, 올바른 삶의 길을 소설의 효용에 실어 전달한 <민웅전>, 신선사상의 허무맹랑함을 풍자한 <김신선전> 등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간결한 필치로 익살스럽고 유쾌하게 그려냈다. 문학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하고 기존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으며 글쓰기 자체로도 사회개혁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는 생활의 풍족함이 바탕이 되어야 인간의 도덕이 바르게 설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학문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길 것은 '실용'임을 강조했다. 오래된 성리학의 폐해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사대부라는 자들이 이가 먼저냐 기가 먼저냐 하며 불꽃을 튀며 싸움질할 때 백성들은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상기시킨 것이다.

 

그의 사상은 철저히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 있었다. 신분질서의 개혁과 실용주의를 주장한 실학자로서의 그의 사상적 총체가 담겨 있는 <열하일기>는 역사와 시대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조선의 고루한 지식인들을 깨우치고자 한 것이었는데, 자신의 문법을 뽐내는 것, 상투를 지닌 의관을 뽐내는 것, 거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 중국에 문장이 없다고 헐뜯는 것, 청조에 복속하는 한인을 보고는 강개한 선비가 없다고 탄식하는 오망(五妄)을 예로 들었다. 치열한 문학정신을 지닌 그의 글은 매우 창의적이며 풍부한 상상력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반성력과 자기응시, 사회와 현실에 대한 지지한 성찰, 나아가 나라와 백성에 대한 선비로서의 경세적 책임감을 담고 있다.

 

교산 허균 조선 문학의 르네상스를 연 조선의 아나키스트

 

교산 허균은 조선왕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복권되지 않은 채 역적의 우두머리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인 그는 지금에 와서야 진보적인 개혁주의자로 평가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문제적인 이단아일 뿐이었다.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자유분방함을 마음껏 즐겼으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그는 조선사회와는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가족들 역시 만만치 않은 이력의 보유자들이다. 화담 서경덕의 제자인 아버지 초당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고 큰형 허성은 당파를 초월한 인물이었으며 동복형인 허봉은 아버지를 이어 동인의 우두머기가 됐던 당대의 명사였다. 누이 허난설헌 역시 조선 최고 여류시인으로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이렇듯 그를 둘러싼 주변조건은 그가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온전한 길로 가지 않았다. 

 

너무나도 완벽할 것 같았던 그의 집안엔 불행이 잇따랐는데,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5세 때 친형 허봉이 율곡을 탄핵하다가 함경도로 유배를 갔으며, 누이 난설헌은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었다. 그가 20세 되던 해에는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형 허봉마저 세상을 떠났고, 다음해에는 누이 날설헌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으며, 3년 후에는 임진왜란으로 아내와 아들마저 잃고 말았다. 그의 타고난 자유분방함에 집안의 계속된 불행은 그를 더욱 더 복잡한 인물로 거듭나게 했다. 게다가 엄청난 독서량은 그의 인식세계를 독자적으로 구축하게 만들었다. 

 

그가 세상사람들과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음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벼슬길에 오르면서부터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를 겪었다. 황해도 도사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서울 기생을 끌어들였고, 불상을 모셔놓고 염불과 참선을 했으며, 서얼들과 교류하는 등 사대부로서 조선사회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하지만 파직과 유배를 당하면서도 그는 결코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당대 사회에서는 참으로 위험하기 그지 없는 자신의 논리를 내세웠다. 그가 불경을 읽은 것은 마음 둘 곳이 없었기 때문이며, 자신의 삶과 행동을 다스리는 법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고 보았다. 또 법이란 조선사회가 말하는 성인의 사상이 아니라 자신의 천성이라고 했다. 그래서 타고난 본성을 구속하고 왜곡하는 유교 윤리를 거부했으며, 성리학의 세계에서 배척받고 따돌림을 당하자 불교를 믿었다. 그러나 불교를 믿되 금욕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구를 따랐다. 그 스스로가 정한 것이 곧 법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틀에 박히는 것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혁명을 꿈꾸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현실의 혁명에 철저할 수 없었기에 결국 그의 이상은 불온한 현실로 나타나 발목을 붙잡고 말았다. 역적의 괴수가 되어 능지처참을 당하는 최후를 맞은 것이다.

 

성리학이라는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얽매이길 거부한 지식인이었던 그는 사상과 신분의 억압에서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개혁 사상가였다. 때문에 그의 글 역시 자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글을 쓰는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자기만의 글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즉 글을 쓰는 목적은 이백이나 두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이름을 갖는 글을 갖기 위해서라고 했다.

 

허균은 자신의 사상이 녹아든 전기나 소설 형식의 <남궁선생전>, <장산인전>, <손곡산인전>, <장생정>, <엄처사전> 등을 남겼는데, 이 작품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주인공들이 모두 능력은 뛰어나지만 보잘것없는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들을 통해 불합리한 사회상을 알리고 유교적인 교훈에 집착하지 않고자 했다. 그리고 작품 곳곳에서 이상향을 향해 떠난다. 대단한 독서가이자 조선 문단을 새롭게 열었던 문학가. 급진적인 정치사상을 피력한 진보적 사상가 등 그를 지칭하는 명칭 또한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한 인물이 바로 허균이었다.

 

매월당 김시습 불의에 반기를 든 천재 비운의 아웃사이더

 

일찍부터 글을 께우치고 보는 대로 익힌다는 뜻, 즉 논어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이름을 따온 매월당 김시습은 생후 8개월 만에 글을 알고 세 살 때 세상에 이름을 떨친 천재였다. 세종 역시 신동이라는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끼고 궁중으로 불렀는데, 시험관이 묻는 대로 시를 쏟아내자 감동한 나머지 후일을 약속했다. 그러나 천재 김시습에겐 시련이 끊이질 않아 1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살이 3년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까지 병들어 있었다. 그러니 더욱 더 믿을 건 공부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혼인을 하고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가 공부에 몰입하지만, 천재 청년 김시습의 시련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계유정난을 통해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김시습은 분노했다. 세종의 후일 약속은 단종은 잘 보필하라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였다. 그러니 공부의 목적이 일순간 사라지고 만 것이다. 외골수였던 그는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린 후 스스로 머리를 깎고 설잠(雪岑)이라는 법호를 짓고는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가 숭유억불의 시대였던 만큼 유교를 던지고 불가로 귀의한 그가 사람들은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래서 퇴계는 김시습을 기인이자 세상의 부적응자 정도로 취급하기도 했다. "미쳐서 읊보리고 다니며 세상을 구경거리로 여겨 희롱하고 세상을 피해 선승이 되었으니 불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그를 광승으로 취급했다"는 기록도 있다.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명리나 부귀를 추구하지 않았다. 절대고독을 누렸고, 자신의 사상에 규제를 받지도 않았다. 유/불/도를 받아들이기도 했고 비판하기도 했다. 어느 것에 매몰되지 않았으니 자유로웠지만 그래서 늘 아웃사이더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율곡은 "그의 재주가 그릇 밖으로 넘쳐흘러 스스로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다면서 "그가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해 공과 실천을 쌓았더라면 그 업적이 한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틀 속에서 논의하기를 좋아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김시습의 공적에 대해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는 지극히 한국적인 작품으로 우리나라가 배경이 되고, 사람의 살아가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여성 인물이 당당하게 나타나 있다. 유교가 형식의 극을 달릴 때가 아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당당한 여성을 통해 얻고자 하는 효과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절의였다. 여성에게만 강요된 일방적인 절의가 아니라 남녀를 떠나 지켜야만 하는 것이 그가 내세우는 절의였다. 여성도 절의를 지키는데, 하물며 사대부라고 불리는 이들의 절의를 땅바닥에 내팽개쳐도 되느냐는 강한 독설이 숨어 있는 것이다. 특히나 비극적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지키는 절의란 가장 빛을 발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세상을 향한 비판은 부조리한 사회인식을 깨는 데도 한몫했다. 한평생 세상을 등지고 살면서도 세상과 가까워지려고 했던 아웃사이더 김시습,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칭송하는 이유는 그가 천재여서 그의 글이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빛나는 것은 아닐까.   

 

송강 정철 문학과 정치의 경계에 선 로맨티스트

 

송강 정철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질 만큼 그가 우리 문학사에 남긴 족적은 참으로 대단하다. 문학사에서 극찬을 받는 그가 문학에만 몰두했다면 살아서나 사후에도 남부러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서도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은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조선시대 최대의 정치적 사건이었던 기축옥사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 쥐어진 칼자루로 인해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켰는데, 그는 사건 지휘의 보복을 받기도 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였던 동인 이산해의 계략으로 유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이 가져다준 폐해는 조선사회에 큰 후유증을 안겨주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했고, 당쟁을 격화시켜 조선사회가 암흑기로 빠져드는 단초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축옥사의 지휘자였던 송강이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사람의 성품이 살아온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글의 성향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사미인곡>의 절절한 그리움은 여느 연애시 못지않게 강렬하다. 송강 자신을 한 여자의 몸으로, 임금(선조)을 님으로 비유해서 가까이에서 모싲 못하고 연모하는 심정을 독백체로 읊은 것이다. 송강의 글을 대하면 그를 향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언어로써 형상화하는 데 탁월한 감각과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시적 감상으로 단련된 그의 성품은 강렬한 시적 언어를 쏟아내듯 님을 괴롭히는 무리들에게 날선 칼날을 들이댔다. 훗날 자신에게 닥칠 일에 대해 계산할 겨를도 없고, 또 그럴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님이 나를 부르셨으니 님의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하면 될 뿐이었다.

 

내면이 한없이 약했던 그는 그것을 숨기려는 듯 평생 술을 끼고 살았다. 술에 취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남을 매도하는 버릇 때문에 적이 많이 생길 정도였다. 술 문제로 정적의 비난을 살 정도여서 지기였던 율곡도 이를 나무랄 정도였다고 한다. 자신의 약한 내면을 술로 가리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관료로서나 인간관계에서 보이지 않던 부드러움은 오직 글을 통해서만 발현되었다. 글 속에서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과격하고 불 같은 열정은 사라지고 정한과 탄식, 눈물과 체념, 안타까움, 외로움, 쓸쓸함, 원망 등이 그대로 드러난다. 투사의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송강에게서 어떻게 이런 서정성이 묻어나는 시어들이 나올 수 있는지 오히려 의문스러울 정도다.  결코 그의 정서와 맞지 않는 정치판, 그는 온전히 시인이었어야 했다. 격정적인 사대부이자 시인의 삶을 살았던 송강은 아름다운 수많은 글을 남김으로써 국문학사에 불멸의 업적을 세운 위대한 문인이었다. 

 

사숙재 강희맹 관인문학의 틀을 깬 농부의 마음

 

사숙재 강희맹은 당대의 문장가이자 서화에 뛰어났던 강희안의 동생으로, 그 역시 서화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세종의 이질이기도 한 그는 18세에 과거에 급제해 정치가로서 수십 년 동안 중앙관청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고 여러 편찬사업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특출한 분야가 있었다. 바로 가학(家學)으로 내려온 농학이 그것이다. 일찍이 농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농부들과 농법을 토론하기도 했다. 가학이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농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농장이었던 금양별업에서 스스로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 결과 <농사직설>과는 사뭇 다른 그만의 독특한 농서를 저술했다. 그의 대표적인 <금양잡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사계절의 농사와 농작물에 대한 필요사항을 기술한 농서로, 그가 직접 농사를 지으며 실험하고 관찰한 내용들을 엮은 것이다. 벼의 품종뿐만 아니라 각 작물의 품종과 농사법에서 맛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곡물 이름을 이두와 한글로 표기했고, 농민들과의 대담을 적은 글에서는 당시 관의 농업정책에 대한 비판도 들어 있다.

 

농사를 짓는 일이나 그림을 그리는 것,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은 각각 다른 일이지만 결국 하나로 통한다. 그것은 창조하는 일이며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하는 내면의 작업이다.

 

무릇 아비가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농사꾼이 곡식을 가꾸는 것과 같으니, 곡식을 잘못 가꾸면 마침내 굶주리는 근심을 보게 되는 것이요, 자식을 잘못 가르치면 마침내 위태로운 화를 이루는 것이다. 거름 주고 김매는 일과 훈계하고 격려하는 법을 어찌 잠깐이나마 마음에 소홀히 할 수 있으랴. -훈자오설

 

그의 글 속에는 농부의 마음이 들어 있다. 중국의 고사나 유학자들의 말을 빌린 것은 조선의 유학자들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경험한 일들이 많아서인지 마치 농부들과 이야기하듯 편안하게 쓴 글쓰기가 돋보인다.

 

이상, 조선의 글쟁이들 박지원 허균 김시습 정철 강희맹이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