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설날과 정월대보름 유래와 풍속, 시절음식
2016년 붉은원숭이해의 문을 열고 새해인사를 드린 지 한 달 남짓인데 또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드립니다. 어제 오후부터 고향에 내려가거나 역귀경을 하는 차량들로 도로도 몹시 붐비고 있습니다. 안전운전하시고, 좋은 분들 만나는 기쁨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2월에는 설날 말고도 또 하나의 큰 명절인 정월대보름도 있어서 국립민속박물관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설날과 정월대보름의 유래와 풍속, 시절음식, 놀이 등을 알아보았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설명절 보내세요!!
2월 설날과 정월대보름 즐유래와 풍속, 시절음식!
■ 설날 어원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라는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설날의 어원에는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있다. 첫째는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어원을 찾는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갖는다. 둘째는 '선날', 즉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선날'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連音化)되어 설날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설날을 '삼가다[謹愼]'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는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일'이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으로, 완전히 새로운 시간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한편 설날은 원일(元日), 원단(元旦), 정조(正朝), 세수(歲首), 세초(歲初), 세시(歲時), 연두(年頭), 연시(年始)로도 불린다.
■ 설날 유래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역법(曆法)이 제정되어야만 하므로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중국 [삼국지[에는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돼 있고 신라 문무왕 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인 가위[嘉俳]나 수릿날의 풍속도 우리 민족에게 고유한 역법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현단계에서는 중국 전래의 태양태음력이나 간지법(干支法) 외에 우리 고유의 역법 제정에 관한 기록이 없어 6세기 이전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에서는 36대 혜공왕 때 오묘(五廟, 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는데,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이 짐작된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 삼짇날, 팔관회, 한식, 단오, 추석, 중구, 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로 여겼으니 이미 이 시대에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 설날 시절음식
설날의 음식을 통틀어 '설음식' 또는 '세찬(歲饌)'이라 하고 설날의 술을 '설술[歲酒]'이라고 한다. 설음식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떡국이다. 설날에 흰 떡국을 끓여 먹는 것은 고대의 태양숭배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새해 첫날이므로 밝음의 표시로 흰색 떡을 사용한 것이고, 떡국의 떡을 둥글게 하는 것은 태양의 둥근 모양을 상징한 것이다. 그리고 설날에는 찬 술을 마시는데,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술을 데우지 않는 것은 봄을 맞이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설날 풍속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이 각 가정에서는 대청마루나 큰방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상 뒤에는 병풍을 둘러치고 제상에는 설음식[歲饌]을 갖추어 놓는다. 조상의 신주(神主), 곧 지방(紙榜)은 병풍에 붙이거나 위패일 경우에는 제상 위에 세워 놓고 차례를 지낸다. 차례를 마친 뒤 에는 조부모, 부모에게 세배로 새해인사를 올리고, 가족끼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한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설빔[歲粧]을 입는다. 또 일가친척들과 친구를 서로 축하의 말을 건네는 덕담을 했다.
문안비 설날에 여자는 세배를 하러 다니지 않지만, 중류 이상 양반 가문의 부인들은 자기 대신 잘 차려입은 젊은 여종을 일가친척이나 그 밖의 관계 있는 집에 보내 새해인사를 전갈(傳喝)했는데, 이때 새해인사를 다니는 계집종을 말한다. 문안을 받는 집에서는 반드시 문안비에게 세배상을 한 상 차려주며 또 약간의 세뱃돈도 준다.
설그림[歲畵] 조선 말까지의 풍속에 설날 도화서(圖畵署)에서 수성(壽星) 선녀와 직일신장(直日神將)을 그려 축수(祝壽)하는 뜻에서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로 주기도 준 그림을 말한다. 수성이란 장수를 맡은 노인성(老人星)을 말하고 직일신장은 그 날을 담당한 신인데, 모두 도교의 신이다. 또 붉은 도포와 검은 사모를 쓴 형상을 그려 대궐의 겹대문에 붙이거나, 귀신 잡는 형상을 그려 문에 붙이고 귀신의 머리를 그려 문설주에 붙여 사기(邪氣)와 역신을 물리쳤다.
복조리 설날 이른아침 또는 섣달 그믐날 밤 자정이 지나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엮어 만든 조리를 사서 벽에 걸어두었다. 조리가 쌀을 이는 기구이므로 그해의 행운을 조리로 일어 취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 설날에 1년 동안 사용할 조리를 사서 방 한구석이나 대청 한귀퉁이에 걸어두고 하나씩 사용하면 1년 동안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민간신앙도 있다.
야광귀 쫓기 설날 밤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인가에 들어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 보아서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는 속설이 있는데, 만일 신을 잃어버리면 신 임자는 그해 운수가 나쁘다고 해서 신을 모두 방안에 들여놓았다. 이날 밤에는 모두 불을 끄고 일찍 자는데, 야광귀를 막기 위해 대문 위에 체를 걸어두면 야광귀가 와서 체의 구멍을 세어보다가 잘못 세어 또 세고 또 세고 하다가 신을 신어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새벽닭이 울면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청참(聽讖) 새해 첫새벽에 거리로 나가 방향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사람의 소리든 짐승의 소리든 처음 들리는 그 소리로써 그해 자기의 신수(身數)를 점치는 것을 말한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 그해 풍년이 들고 행운이 오며, 참새 소리나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흉년이 들고 불행이 올 조짐이라고 했다. 그리고 먼 데서 사람 소리를 들으면 풍년도 흉년도 아닌 평년작이 들고, 행운도 불행도 없이 지낸다고 한다.
■ 정월대보름 유래
정월대보름 또는 대보름은 음력 1월 15일로 오기일(烏忌日)이라고도 한다.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도 하는데, '상원'은 도교적인 명칭으로, 삼원(상원, 중원, 하원) 중 첫번째다. 우리나라에서는 새해 들어 처음 맞는 보름날로 농사의 시작일이라 하여 매우 큰 명절로 여겼는데, 조선말에 간행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정월대보름에도 섣달 그믐날의 수세하는 풍속처럼 온 집안에 등불을 켜 놓고 밤을 새웠다고 한다.
■ 정월대보름 시절음식
햅찹쌀을 찌고, 밤, 대추, 꿀, 기름, 간장 등을 섞어서 함께 찐 후 잣을 박은 약반(藥飯)을 준비한다. 이 약반은 지방에 따라 오곡밥, 잡곡밥, 찰밥농사밥 등을 그 대용으로 즐기기도 한다. 대보름날엔 세 집 이상 성이 다른 집의 밥을 먹어야 그해 운이 좋다고 하며, 평소 하루 세 번 먹는 밥을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해서 틈틈이 여러 번 먹는다. 또 밥을 김이나 취나물, 배추잎 등에 싸서 먹는 복쌈은 여러 개 만들어 그릇에 노적 쌓듯이 높이 쌓아 성주님께 올린 다음에 먹으면 복이 온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것을 귀밝이술이라고 한다.
■ 정월대보름 풍속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정월을 '노달기'라 하여 농군들은 휴식을 취하면서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퇴비 만들기, 농기구 제작 및 수리 등 농사준비를 한다. 그 외에도 새해를 맞아 건강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얻기 위한 다양한 제의(祭儀)와 점세(占歲), 놀이가 행해졌다. 아침 일찍 부럼깨기를 하는데, 이렇게 하면 1년 내내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밤에는 뒷동산에 올라가 달맞이를 하며 소원을 빌고 1년 농사를 점쳤는데, 달빛이 희면 많은 비가 내리고 붉으면 가뭄이 들며,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오고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했다.
곡식 안 내주기 경남지방의 풍속으로 농가에서는 정초에 자기 집 곡식을 팔거나 빌려주지 않는다. 이 시기에 곡식을 내면 자기 재산이 남에게 가게 된다는 속신 때문에 행해진 풍속이다.
나무그림자점 한 자 길이의 나무를 마당 가운데 세워 놓고 자정무렵 그 나무 비치는 그림자의 길이로써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달붙이기 정월대보름 전날 밤 콩 12개에 12달을 표시하여 수수깡 속에 넣고 묶어서 우물 속에 집어넣은 후 콩알이 붙는가 안붙는가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닭울음점 정월대보름날 꼭두새벽에 첫닭이 우는 소리를 기다려 그 닭울음의 횟수로써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복토 훔치기 부잣집의 흙을 몰래 훔쳐다 자기 집 부뚜막에 발라 복을 기원했다.
사발점 정월대보름날 밤 사발에 재를 담아 그 위에 여러 곡식의 씨를 넣어 지붕 위에 올려놓은 후 다음날 아침 씨들이 남아 있으면 풍년이고 날아갔거나 떨어졌으면 흉년이 든다고 했다.
안택(安宅) 주부들이 단골무당을 청해 가신(家神)과 여러 잡신을 풀어 먹임으로써 가내평안을 기원했다.
용알뜨기 정월대보름날 새벽 맨 먼저 우물물을 길어와 풍년을 기원하며 운수대통하기를 기원했다.
■ 정월대보름 놀이
다리밟기 12다리를 밟으면 액을 면하고 다리병을 앓지 않는다고 한다.
달맞이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을 맞으면서 새해의 풍년을 점치고 행운을 빈다.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길하다고 했으며, 달의 형체, 대소, 출렁거림, 높낮이 등으로 1년 농사를 점치기도 한다.
달집 태우기 짚이나 솔가지 등을 모아 언덕이나 산위에서 쌓아 놓 고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른다. 그리고 농악에 맞춰 함께 춤을 추고 달집 주변을 돌면서 한 해 동안 마을에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기원했다.
볏가릿대 세우기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들고 그 안에 벼, 기장, 피, 조의 이삭을 넣어 싸고, 목화도 장대 끝에 매달아 이를 집 곁에 세워 풍년을 기원했다.
사자희 머리에 사자 가면을 쓰고 농악을 울리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춤추며 놀았다.
액막이연 그 해의 액운을 멀리 날려 보낸다는 뜻으로 음력 정월 열나흗 날에 띄워 보냈다. 연에는 이름, 생년월일 따위와 송액영복(送厄迎福)과 같은 글귀를 쓴다.
연날리기 정월대보름 날에는 겨울내내 띄우던 연을 날려보낸다. 대보름 이후로는 연날리기를 하지 않았고, 대보름 이후에 연을 날리면 ‘고리백정(또는 백정)’이라고 불렀다.
줄다리기 짚 또는 칡으로 큰 줄을 수십 발이나 되게 길게 꼬고 줄 양머리에는 수많은 작은 줄을 매달아 몇몇 마을을 둘로 편을 갈라 줄을 서로 잡아당겨 승부를 가린다.
쥐불놀이 밤에 들에 나가 논 둑, 밭 둑을 태우는 것을 말한다. 못된 귀신을 쫓고 신성하게 봄을 맞이한다는 뜻과 더불어 잡초를 태움으로서 해충의 알을 죽여 풍작을 기도하며 봄에 새싹이 날 때 거름이 되도록 한 것이다. 또 쥐불놀이를 하면 1년 동안 병이 없고 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지신밟기 영남지방의 대보름 문화로 농민들이 농악대를 조직하여 집집마다 다니며 땅을 다스리는 신에게 인사를 드리고 못된 귀신을 물리쳐 한 해 동안 좋은 일만 생기고 풍년을 기원했다. 집주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농악대에게 대접했다.
횃불싸움 마을 청년들이 가족 수대로 싸리나 짚으로 횃불 막대를 만들어 농악을 울리며 산 위로 올라가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가 달이 떠오르면 달려나가 싸운다. 진 편은 그해 흉년이 들고 이긴 편은 풍년이 든다고 생각했다.
이상, 2월 설날과 정월대보름 유래와 풍속, 시절음식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