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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조선 킹메이커 5인 황희 신숙주 조광조 최명길 채제공

 

조선 킹메이커 5인 황희 신숙주 조광조 최명길 채제공

 

 

최근 방영되고 있는 KBS 대하드라마 [장영실]에서는 태종(김영철)을 보필하는 황희(정한용)도 볼 수 있습니다. 황희는 누구의 이야기도 들어줄 줄 아는 소통의 대가로 태종을 지나 세종 시대에도 열정 넘치는 개혁군주의 완급을 잘 조절하는 수용의 리더십을 보여준 참모입니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 군주 곁을 지키며 참모로서의 위대한 족적을 남긴 뛰어난 킹메이커들이 있는데, 정도전, 하륜, 황희, 신숙주, 조광조, 류성룡, 최명길, 채제공이 바로 그들입니다. 대중역사작가 박기현은 [조선의 킹메이커]에서 이 8인8색 참모들의 리더십을 들려주고 있는데, 이 중 조선 킹메이커 5인 황희, 신숙주, 조광조, 최명길, 채제공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서로 살아온 방식과 시대는 다르지만 군주 곁을 지키는 역할에 대한 투철한 신념만은 같았던 그들의 삶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정도전과 하륜, 류성룡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조선 킹메이커 5인 황희 신숙주 조광조 최명길 채제공

 

황희 꼼꼼한 군주의 실무형 참모 - 세종의 완급을 잘 조절한 '수용의 리더십' 

 

완벽주의자 세종은 철저한 자기관리로 자신을 지키며 남에게 쉽게 신뢰를 주지 않는 군주였다. 그런 세종이 황희를 불렀을 때 이미 황희는 예순을 헤아리는, 당시로서는 은퇴를 종용받을 나이였다. 무엇이 그토록 의심 많은 세종으로 하여금 황희를 중용하게 했을까? 실록을 보면 황희는 청백리라는 평가를 받기 이전에 적잖은 소동을 일으킨 문제 많은 관료였다.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이 나이도 많고 문제도 많은 노인을 핵심 참모로 쓴 이유는 무엇일까?

 

설득형 커뮤니케이션의 대가 황희는 누구의 이야기도 들어줄 줄 아는 '남에게 베풀어야 하는 배려'를 품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이런 황희의 강점을 간파한 세종은 조정 중대사에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그를 내보냈고, 황희의 중재가 있어야 일이 풀려나갔다. 정치적 노선이 다른 사람들이라도 황희를 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공과 서열 파괴 황희는 세종의 인사방침을 그대로 실현시켜 능력 위주의 인사정책을 펼쳤으며 지방이나 가문보다 실력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세종은 왕족의 권한을 축소하여 종친이라도 일하지 않는 자에게는 특혜를 주지 않는 등 공평하고 누구나 공감하는 정책으로 일관했고, 황희는 이를 감시,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풍부한 인적 네트워크 황희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인적 정보를 가지고 이를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태조부터 시작해 네 명의 제왕을 보필한 경륜 덕분이었다. 또한 정권의 중심부에 있다가 실각해 유배를 당하는 등 실패도 충분히 맛본 그는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개혁을 외치며 실패를 모르는 저돌적인 신진 관료들, 그리고 변화를 자제하며 기존 질서의 유지를 바라는 의정부 대신 사이에서 천칭처럼 균형을  잘 잡아냈다. 또한 세종이 황희가 추천한 인물들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중용한 것은 그만큼 황희의 사람 보는 눈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재등용 정책  덕분에 세종 재위 중 청백리의 대명사 맹사성과 변계량, 정인지, 김종서, 최항, 신숙주, 성삼문 등 수많은 인재가 빛을 발했고, 조선왕조 최고의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숙주 라와 백성을 위한 큰 그림 - 세조의 오명을 치적으로 덮은 '열정의 리더십'

 

세조를 보필한 대표적 참모는 한명회지만 그 못지않게 세조를 정치적 승자로 만들어낸 참모는 신숙주다. 신숙주는 세조치하에서 가장 비정치적인 인물로 순리에 따라 국방과 외치, 문화를 맡아 조선 초기의 빛나는 국제외교사와 문화창달을 이룩해 낸다. 신숙주는 성삼문과 사육신이 걸어간 길을 따라 죽음으로 명예를 지킬 수도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세조와 손을 잡았다. 선왕인 문종에게서 어린 단종을 돌봐달라는 유지를 받았으니 이른바 변절이었다. 그러나 나라와 백성을 위한 큰 그림을 생각하고 조선 초기의 정국을 안정시키는 것은 진정한 참모의 길이기도 했다.

 

끝없는 열정 신숙주는 정치적 이해타산에는 누구보다 소극적이었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는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독서에 대한 그의 열정, 끝없는 학문적 탐구심, 그리고 중국을 13차례나찾아가 필요한 결과를 얻어내고 돌아오는 집념 등은 세조의 끝없는 신뢰로 이어졌다. 지독한 독서광이었던 그는 어릴적부터 경서를 탐독하여 7세에 이미 경사를 두루 섭렵했으며, 책을 읽다가 첫 닭이 울고 나서야 잠이 드는 일도 많았고 웬만큼 술이 취해도 자다가 일어나 글을 읽을 만큼 독서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음 신숙주는 경사와 고전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여러 역사서적과 예서, 운서, 병서 편찬에 기여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주장과 주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김종직이나 송시열, 이황, 이이, 심지어 정도전조차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밝히고 이름을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지만, 자기 자랑이나 학문적 주장을 싫어한 그는 늘 본론부터 말했다. 학자로서 유학을 숭상하고 즐겨 공부했어도 실질적인 정치와 경제의 결과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준 것이다. 그가 유학자이면서도 세종과 세조의 불교 적극 수용방침을 거부하거나 비판하기보다 객관자로서 이단논쟁에 깊이 개입하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관심은 불교가 이단이냐 아니냐보다는 백성들에게 어떤 정치를 펼치는 것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가에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 역량부족의 중종을 군주로 키움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건 '일편단심의 리더십' 

 

중종과 조광조는 한때 친형제처럼 호흡을 척척 맞추며 중종반정으로 권세를 잡은 공신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갔다. 중종에게 조광조는 꼭 필요한 참모였고, 조광조에게는 조선의 개혁을 위해 중종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런 간절한 욕구가 두 사람을 한몸처럼 묶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둘 사이는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해 결국 돌아올 수 없는 사이로 갈라지고 말았다. 조광조의 개혁 실패는 군신간의 관계를 다시금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이었으나 그가 남긴 개혁의 족적은 조선 중후기의 사상과 국가경영의 틀을 새로이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중종을 적극적으로 지원 조광조는 중종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강의를 하며 임금의 자질을 키워갔다. 경연은 학문을 토론하는 성격을 띠었지만 실제로는 정치현안을 두고 군주와 신하가 의견을 주고받고 국제정세에 대한 교육이나 국정의 중요사안들을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교육의 장이었다. 필요한 경우에는 밤에도 경연관을 불러 야대(夜對)까지 열었다. 중종조에 유난히 석강과 야대에 관한 실록의 기록이 많은 것은 조광조가 군주의 교육에 그만큼 정성을 기울였다는 증거다.

 

개혁의 전도사 조광조는 군주가 군주답지 못한 점을 보이면 핍박하듯 중종을 밀어붙였는데, 그의 이러한 임전무퇴식의 개혁 주도는 급기야 중종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끝내 두 사람을 갈라놓고 말았다. 군주는 참모 조광조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보았고, 참모는 무리하더라도 군주 중종을 더욱 옥죄려고 한 것이 둘 사이를 갈라놓은 결정적 계기였다. 하지만 조광조가 제시한 개혁의 명분과 진실이 후대에 전해지면서 조선 중후기 국가경영의 틀을 짠 참모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다.

 

 

최명길 실리추구로 절체절명의 조선을 구함 - 인조 위해 악역 자처한 '뚝심의 리더십'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군주와 백성의 생사가 백천간두에 서 있었을 때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기 이름을 높이기에 바빴다. 그들은 오랑캐라고 부르던 청나라에 복속되는 것을 죽음보다 더 큰 치욕으로 느껴 온몸으로 화친을 막고자 했다. 이런 와중에 척화야말로 나라와 백성을 죽이는 길이라며 주화론을 주창한 최명길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고 이단을 뛰어넘어 역적 취급을 받았지만 이름과 명분을 던져가면서까지 나라와 군주를 걱정한 애국자였다.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음 작은 절개과 큰 대의를 구분할 줄 알았던 최명길은 후금과 강화한 후 조정 여론의 비난이 갈수록 커졌지만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갔다. 그에게 정묘호란은 잠시 허리를 굽힌 것이지 영원히 머리를 숙인 것이 아니었으며, 정묘호란이야말로 다시금 국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기회의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조에게 적극적으로 국력을 키우고 국방을 강화하도록 주청하는 한편, 스스로도 소용돌이치는 정국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앞일을 내다보는 예지력 최명길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면 절대물러서지 않았으며 남의 눈치를 살피거나 자신의 안위를 가려 뒤로 빼는 일도 없었다. 또한 최명길은 청렴해서 인조반정 후 정사공신 1등으로 봉해져 전직 중신들이 살던 집과 노비, 전답들이 내려졌지만 모두 돌려주었다. 기민하고 계책이 많았던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위급한 경우를 만나도 결코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했다. 

 

국난 수습의 해결사 인조의 항복 이후 청군이 물러가자 최명길은 이조판서와 우의정으로 일하면서 흐트러진 국내정치를 일신하고 국력을 키우는 데 앞장섰다. 인조 15년 4월 청나라가 원병을 요청하자 이의불가를 주장하여 관철시켰고 잡혀간 수많은 조선의 포로들을 귀환시켰으며, 1645년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돌아와 마지막까지 쉬지 않고 조국에 봉사했다. 그는 사대부들로부터 비판받고 심지어 저주 섞인 욕까지 들었지만 옳다고 믿는 일에 대해서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올곧은 언행으로 일관한 지조와 뚝심을 보여준 진정한 참모였다.

 

 

채제공  군주의 든든한 보디가드 - 정조를 위해 벼슬마저 던진 '동고동락의 리더십'

 

영의정은 조선의 사대부라면 누구나 올라보고 싶은 영예로운 직위다. 하지만 채제공은 가문의 영광이요 일생의 최대 명예인 영의정 자리를 임명된 지 열흘 만에 내던지며 압도적인 정치력을 발휘하는 노론측에 승부수를 던졌다.. 채제공이 분란의 씨앗이자 폭탄의 뇌관과도 같은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며 칼날을 겨눈 것은 군주의 든든한 보디가드 역할을 다하기 위함이었다.  

 

서민정치 채제공은 큰 가뭄과 홍수, 심각한 전염병에다 가혹한 세금에 짓눌려 신음하는 서민들을 위해 정치적 관록을 발휘했다. 영조 재위 50년 여름 평안도 관찰자로 부임했을 때는 평안도민의 부채가 도민들의 힘으로는 백 년을 갚아도 힘든 정도라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연회와 사냥을 삼가며 지출항목마다 철저하게 관리해 재정적자를 크게 줄이고 12만여 냥에 이르는 도민들의 부채를 탕감하는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영조 44년 도승지 때에는 지방의 심각한 재난을 살펴보고 영조에게 계책을 강구하여 세금을 면제해 주고 나라의 창고에서구휼을 베풀기도 했다.

 

군주의 지팡이 채제공은 온화하고 후덕한 인품으로 한평생 군주를 향한 올곧은 충성과 백성을 위한 위민정신을 내려놓지 않은 진정한 참모였으며 3대에 걸쳐 목숨을 바쳐 군주를 지켜낸 조선왕조 최고의 보디가드였다. 이미 영조시절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그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으며, 정조를 지켜준 든든한 버팀목이자 경호실장이었으며 정조의 오른팔이었다. 내외직을 두루 섭렵하며 정조를 도와 백성들이 더욱 잘사는 방법을 고심한 그는 영조/정조 시대에 글깨나 읽었다고 자만한 여느 지식인들과는 달리 이상만 외친 것이 아니라 현실정치, 곧 민생정치에 발을 붙이고 직접 경제회생에 총력을 기울인 정치가엿다.

 

이상, 조선 킹메이커 5인 황희 신숙주 조광조 최명길 채제공이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