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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신영복 교수 강의 논어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등

 

신영복 교수 강의 논어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등

 

 

20여 년의 옥중생활 동안 가족에게 보낸 편지글을 모아 펴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해주었던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지난 15일 암 투병 끝에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귀감이 되는 많은 글을 남겼을 뿐 아니라 그 글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당면과제를 고전을 통해 재구성해 본 [강의]에도 현실적인 지혜를 주는 글이 가득합니다. 이 중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관련 글을 하나씩 뽑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신영복 교수 강의 논어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등입니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따뜻한 세상을 꿈꾸었던 저자의 소망이 주옥같은 글에 깃들어 있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논어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서게 되지만, 정형(政刑)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교통순경이 교통법규 위반 차량 네다섯 대 중 한두 대만 딱지를 끊자 적발된 차량 운전자가 당연히 "왜 나만 잡느냐"고 항의를 했다. 그러자 "어부가 바닷고기를 다 잡을 수 있나요?"라는 교통순경의 대답이 압권이다.처벌받는 사람은 법을 어긴 사람이 아니라 다만 운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의 지표로 '집단적 타락증후군'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여러 내용이 있지만 이 교통법규 위반사례와 같이 적발된 사람만 재수없는 사람이 되는 상황이 그 중 하나다. 또 하나는 유명인의 부정에 대해 분노를 느끼거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느끼는 대신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가 있는데, 이 단계가 집단적 타락증후군이다.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하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부정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지점을 찾기 어렵다는 데 있다.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 1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관계가 붕괴된 상태인 것이다.

 

신영복 교수 강의 논어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등

 

맹자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엄격한 수기(修己)를 강조하고 있다. <등문공>편에서 맹자는 왕량(王良)의 비타협적인 자부심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진나라의 대부인 조간자(趙簡子)가 천하제일의 마부인 왕량에게 임금의 총신(寵臣)인 해의 사냥을 위해 마차를 몰게 했다. 하루 종일 한 마리도 맞히지 못하고 돌아온 해는 왕량을 향해 천하의 형편없는 마부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왕량은 다시 한 번 마차를 몰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이번에는 해가 하루 아침에 10마리를 쏘아 맞추었다. 그러자 해는 왕량을 천하제일의 마부라고 칭찬했다.

 

조간자가 왕량에게 앞으로도 해를 위해  마차를 몰겠느냐고 묻자 왕량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사냥의 법도대로 마차를 몰았더니 하루 종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법도를 어기고 궤우(詭遇)하게 했더니 하루 아침에 10마리를 잡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리 그가 권세가라 하더라도 마차를 몰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궤우란 짐승을 옆에서 쏘게 해주는 것으로, 즉 부정한 방법으로 사냥하는 것을 의미한다. 맹자는 법도를 잃지 않으려는 왕량의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원칙과 정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온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地位)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강자가 지배하는 구도에서 약자의 수가 항상 다수라는 사실이다. 강자가 다수일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핵심인 것이다.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가 있다. 첫째,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이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다수는 곧 정의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의 원리다. 불벌중책(不罰衆責), 즉 많은 사람이 범한 잘못은 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신호는 신호 위반자를 처벌하기보다는 신호등을 철거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소수의 선동가에 의해 다수의 의견이 왜곡되기도 한다. 그리고 언론권력에 의해 여론이 조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다수라고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가 바로 현실이며 정의라는 것이다.

 

 

장자 빈 배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건너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이 아니다. 삶이란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이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 를 극대화하고 있다. 부국강병이라는 전국시대의 패권논리가 장자에게 있어 어떤 것이었을까? 도란 무엇인가, 패권이 인간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가치인가를 장자는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장자가 이처럼 근원적 물음을 제기하고 나아가 최대한의 자유 개념을 천명한 까닭은 수많은 민초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패권경쟁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묵자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슬퍼하다

 

[천자문]에는 묵비사염(墨悲絲染)이라는 글이 있다.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는 뜻이다. 다음 구절이 '묵비사염'의 원전이다. 바로 묵자의 소염론이다.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된다. 넣는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 실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묵자가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던 문제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져야'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묵자는 임금과 제후가 훌륭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신하들로부터 올바르게 물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국가도 물든다는 것은 곧 사회문화론이 된다. 물건을 많이 소비하는 것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전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나라가 그렇게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순자 예(禮)란 기르는 것이다

 

순자의 예론(禮論)은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이론이다. 첫째 예란 물(物)을 기르는 것이며, 둘째 그 물로써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는 것이다.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되 물질의 생산과 소비에 일정한 한계를 두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그러기 위해서 예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경우의 예란 당연히 사회의 제도와 규범이다. 제도와 규범이 분계를 세워서 쟁란을 안정적으로 방지한다는 것이다. 순자의 예는 후에 법이 된다.

 

순자의 가장 큰 공헌이 바로 이 예론이다. 예를 새롭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예를 곧 법과 제도의 의미로 발전시킨 것이다. 순자의 예는 공자의 주례(周禮)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순자의 예는 전국시대의 예이며, 이 전국시대의 예가 바로 법으로서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예에 도덕적인 내용 이외에 강제라는 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순자의 예론은 전국 말기의 현실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새로이 등장한 신지주층과 상인계층의 이해관계가 그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한비자 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 부류

 

한비자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를 오두지류(五蠹之類)라고 했다. 두(蠹)란 벌레를 뜻한다. 첫째가 학자다. 이유는 선왕의 도(道)를 빙자하고 인의(仁義)를 빙자하며 용모와 의복을 꾸며서 변설을 그럴듯하게 하며 법을 의심하게 하고 임금의 마음을 흐리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언담자(言談者)로서 세객(說客)이다, 거짓으로 외력을 빌려 사복을 채운다는 것이다. 셋째는 대검자(帶劍者)다. 국법을 범하는 자를 말한다. 넷째는 근어자(近御者)로서 임금의 측근이다. 뇌물로 축재하며 권세가들의 청만 들어주고, 수고하는 사람들의 노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번째는 상공지민(商工之民)이다. 비뚤어진 그릇, 즉 사치품을 만들어 농부의 이익을 앗아간다는 것이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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