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조선 최고의 기술과학자
얼마 전부터 방송된 대하드라마 [장영실]은 노비였던 장영실이 세종대왕을 만나 15세기 조선의 과학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키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최초의 과학사극입니다. 장영실 역은 송일국을 비롯하여 노비 장영실을 발탁해 5백년 조선의 굳건한 토대를 세운 창조적 리더십의 세종대왕 역의 김상경, 태종 역의 김영철 등 연기파 배우들이 드라마를 이끌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영실(蔣英實)이라고 하면 혼천의, 측우기, 자격루 등을 발명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어떻게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거의 아는 바가 없어서 역사 대중화의 기수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과학혁명의 주창자 장영실에 대해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미리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과학발전에 일생을 바친 장영실 조선 최고의 기술과학자 장영실입니다.
장영실 조선 최고의 기술과학자
세종시대의 과학혁명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주도한 사람은 단연 장영실이었다. 세종의 과학적 열정이 아무리 대단했어도 장영실이 없었다면 그것을 실현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장영실의 태생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가 사대부 중심의 사회였던 만큼 천민 출신인 장영실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중국에서 귀화한 아버지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동래현에서 관노생활을 하던 중에 재주가 출중해 천거되었다. [세종실록]에 여진족에게 붙잡혀 있던 중국 기술자들이 조선으로 탈출해 조정의 대접을 받고 관기를 아내로 삼은 기록이 있는데, 장영실의 아버지도 그런 유의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그런 아버지를 통해 중국의 선진기술을 접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관기인 탓에 관노 신분으로 지내야 했던 것이다.
장영실(이미지 출처 여주 영능전시관)
비록 관노 신분이었지만 장영실의 기술적인 능력은 워낙 탁월했던 듯하다. 그는 태종대에 이미 재능을 인정받아 궁궐에서 일했고, 과학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손기술이 뛰어난 기술자를 찾고 있던 세종의 신임을 얻어 노비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기술관료로 발탁되었다. 이렇게 발탁된 뒤 그는 은밀히 중국에 파견되어 선진기술을 익혔다. 비록 사신을 호종하는 직책이었지만 세종의 정책에 따른 기술학도들의 견문 유학 성격이 짙었다. 중국에서 천문기기에 대한 식견을 넓힌 그는 귀국한 후 궁중 기술자로 일하면서 본격적인 기술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뛰어난 능력 덕분으로 이미 세종 5년에 노비 신분에서 면천되었으며, 상의원별좌(尙衣院 別坐)라는 직책에 올랐다.
장영실이 가장 먼저 만든 기계는 물시계였다. 이는 중국의 물시계를 모방해서 만든 것으로 완벽한 자동시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 물시계를 개발한 덕분에 정5품 벼슬에 올랐고 이후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세종 14년에 시작된 천문관측기인 간의대 조성작업을 이끌었던 그는 간의대에 혼천의, 혼상, 그리고 별자리표와 방위지정표로 구성된 정방안 등을 설치했다.
국보 제230호 혼천의 및 혼천시계(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혼천의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계로 중국 우주관 중 하나인 혼천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혼상이란 일종의 우주본으로 지구본처럼 둥글게 되어 있으며, 둥글게 만든 씨줄과 날줄을 종이로 감싼 것이다. 어설프게 보이는 이 천문 관측기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과학적 결정체였다. 이러한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장영실과 일군의 학자들이 해시계와 물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장영실의 과학적 업적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해시계의 하나인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물시계인 자격루였다. 해시계를 일구라고 부른 것은 이것이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앙부일구란 말 그대로 '솥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의 해시계'란 뜻으로, 그 모양이 마치 가마솥에 다리가 세 개 붙어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앙부일구의 재료는 청동으로, 솥같이 생긴 반구 속에 그림자 침이 한가운데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반구 바닥에는 그림자 위치를 나타내는 선이 세로로, 절기를 표시하는 선이 가로로 그어져 있고, 이들 선은 서로 수직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림자 길이에 따라 절기를 재고, 그림자 끝의 위치에 따라 시간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앙부일구의 위대성은 그것이 반구로 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는 곧 당시의 학자들이 태양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태양이 반원을 그리며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를 뒤집어서 이해하면 현재의 과학에서처럼 지구가 태양 주변을 낮 동안에 반원을 그리며 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동설의 논리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장영실은 1334년(세종16년) 세종대왕의 명으로 제작하여 이 앙부일구를 흠경각에 처음 설치했다.
앙부일구
이 같은 해시계의 발달은 물시계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왜냐하면 해시계는 낮의 시간만 알 수 있었고, 또 그것도 비가 오거나 날시가 아주 흐리면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물시계였다. 물론 당시까지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가 있긴 했지만, 이것은 온전한 자동도 아니었고 시간도 정확하지 않았다. 장영실은 이 점이 마음에 걸렸던 듯 중국과 아라비아의 것을 비교연구하여 이른바 '스스로 종을 치는 물방울' 시계를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바로 자격루였다.
1434년에 완성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종, 북, 징을 자동으로 울리는 동시에 시간을 알리는 목각인형이 솟아올라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일종의 자명종 시계였던 셈인데, 이는 4개의 파수호(播水壺)와 2개의 수수호(受水壺), 12개의 살대, 동력전달장치와 시보장치에 의해 가능했다. 즉 파수호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수수호로 들어가서 살대를 띄워올리면 동시에 부력이 지렛대와 쇠구슬에 전달되고, 이 구슬이 떨어지면서 시간을 알리는 장치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이 자격루는 1536년(중종31년)개량되었으나 지금은 복잡한 자동시보장치가 없어지고 3개의 파수호와 2개의 수수통만 남아 덕수궁에 보존되어 있다.
자격루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로로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했고, 이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태양 모양을 본떠 만든 천상시계와 물시계인 옥루를 만들어 궁중에 바쳤다. 이 옥루 역시 완전한 자동시계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 발명품이었다. 장영실은 해시계, 물시계의 제작 이외에도 금속활자 주조사업에도 참여해 조선시대의 활판인쇄술의 대명사인 갑인자(甲寅字)와 그 인쇄기를 완성했다.
갑인자는 경자자(庚子字)가 납(蠟)을 판(板) 밑에 펴서 그 위에 글자를 차례로 맞추어 꽂아 사용하는 형태여서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지는 등 정밀하지 못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갑인자는 우리 글자를 만들고 처음 만들어진 활자본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 이 밖에도 장영실은 경상도의 채방별감(採訪別監)이 되어 도내 각 고을의 동과 철의 채광, 제련에도 관여했다.
이처럼 장영실은 과학발전에 일생을 바친 조선 최고의 기술과학자였다. 천체의 원리뿐 아니라 자연동력의 원리에도 밝고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면모를 과시한 그는 세종시대의 찬란한 과학혁명을 이끌어낸 선구자였다. 하지만 그의 노후의 삶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동국여지승람] 따르면 1442년(세종 24)에 그가 감독해서 제작한 왕의 가마가 오래 가지 못하고 부서진 사건으로 장(杖) 80도의 중형을 받고 파직됐으며, '아산의 명신'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노년을 아산에서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그 외 장영실의 발명품
관천대(觀天臺) 조선 관측 천문대로 현재 창경궁에 있는 관천대 등 2개가 남아 있다.
간의(簡儀) 1276년 중국 원나라때 처음 만들어져 1437년 오늘날의 천문관측기기와 같은 원리로 개량된 천문기기. 행성과 별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 임진왜란, 정유왜란으로 유실된 후 최초로 복원되었다.
규표(圭表) 1년의 길이가 정확히 몇 날인가와 24절기를 알아내는 도구. 수직으로 세운 막대 표의 그림자 길이를 기준으로 동지, 하지, 춘분, 추분이라 하고 나머지 20개 절기를 그 사이에 약 15일 간격으로 배열한 것이다.
수표(水標) 세종 23년 제작을 시작하여 서울 청계천과 한강에 설치한 하천 수위 측정계. 처음에는 나무기둥에 자, 치, 푼의 길이를 표시하고 돌기둥 사이에 묶어 하천에 세운 반목재였으나 그 후 석재로 개량됐다.
풍기대(風旗臺)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는 바람깃발. 우리 손으로 만든 독특한 기상관측기기 중 하나다.
정방안 간의대 한가운데 관측에 필요한 보조장치로 크기 4자, 두께 1치인 판에 수준장치를 만들고 가운데에 1자 반짜리 기둥을 세워서 방향을 잡는 데 썼다.
이상, 장영실 조선 최고의 기술과학자였습니다. 흥미롭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