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호 인간 대호 최민식이 총을 들어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리산을 지키는 영험한 산군(山君),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 대호는 마을사람들에게 섬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1925년 일제강점기, 박제수집가인 일본군 고관 마에노조(오스기 렌)는 귀국 전 대호의 가죽을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 된다. 이 와중에 출세와 돈에 눈이 먼 조선인 출신 일본 장교 류(정석원)와 도포수 구경(정만식)을 비롯한 조선의 포수들이 너도 나도 가세한다. 하지만 아내를 잃고 늦둥이 아들 석(성유빈)과 단둘이 살아가는 조선 최고의 명포수 천만덕(최민식)은 그들의 대호사냥에 전혀 관심이 없다."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남자들의 세계, 자신의 목표와 욕망을 향해 목숨까지 걸고 나아가는 멋진 남자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 [신세계]의 박훈정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대호]의 간략한 줄거리다.
묵직했다. 아니, 솔직히 너무 무거웠다. 마지막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의 음향까지도 지나칠 만큼 무거워서 영화를 보는 내내 의자에 푹 가라앉아버린 몸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았다. 러닝타임 139분, 두 시간 하고도 19분 동안 <인간 대호>와 <호랑이 대호>를 만나고 있는 내내 범죄스릴러도 아니면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풀 수가 없었고, 느린 듯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전개는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겨를도 없게 만들었다. 싸늘한 시체로 죽어 돌아온 아들 석이를 안고 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애끊는 울음을 토해내던 천만덕의 울음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고, 죽음으로써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두 대호가 눈밭 속으로 차츰차츰 모습을 감춰가던 엔딩씬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 말 그대로 <죽으면 죽으리라>로써 더 대호답고 더 인간다운 삶에의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대호 인간 대호 최민식이 총을 들어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리산을 지키는 왕 중의 왕 대호가 바로 조선 최고의 명포수 천만덕(최민식)이었고, 천만덕이 곧 호랑이 대호였다. 인간 대호 천만덕이 총을 들어 지키고 싶은 것이 바로 호랑이 대호가 지키고 싶은 것이었다는 점에서 둘은 닮음꼴이었다. 그렇다면 그 둘이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유혹이나 탐욕에도 굴하지 않고 나아가 생존의 본능조차 초월하는 존엄성, 그것이었다.
천만덕 역을 맡아 진짜 호랑이 대호보다 더 대호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준 최민식은 “[대호]에서 조선 호랑이는 민족의 정기일수도 있고, 우리가 지켜내야만 하는 순수한 정서, 자존심일 수 있다.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호랑이가 아니라 대자연과 더불어 이 호랑이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그 시대의 정신적인 상징성에 매료되어 출연을 결심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 동안 그가 출연했던 어떤 영화보다도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점령
인류의 역사는 곧 점령의 역사다. 어느 날 갑자기 저렇듯 총구를 들이대며 쳐들어가 그곳에서 잘 살고 있던 사람들을 짓밟고 쫓아냈던 일들은 너무도 비일비재해서 셀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되고 만 조선은 바로 내 나라 내 땅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더욱 가슴아프고 비참하고 억울하고 울분에 찬 역사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서 나라를 빼앗고 정신을 짓밟고자 했던 일본인들과 삶의 터전인 지리산에서 호랑이를 쫓아내고 죽이는 우리와 뭐가 다를까 싶다. 점령군의 군홧발은 언제나 무지비한 잔혹함 그 자체일 뿐이다. 짓밟히는 나 자신이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짓밟는다면, 점령의 역사는 앞으로도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 생존
점령을 당하면 인간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권력자에게 빌붙어 목숨을 연명하거나 심지어는 호사까지 누리려는 자들, 그리고 또 하나는 근근이 먹고 살더라도 권력자들로부터 한 걸음 멀찍이 떨어져 초연한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이다,
구경(정만식)과 칠구(김상호)는 일본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자들이고, 조선인이면서 조선인이기를 거부하는 일본군 류(정원식)는 비열하게 호사까지 누리려는 자들이다. 물론 이들이 이렇게 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지극히 정당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눈물겨운 생존에의 열망이다. 하지만 아무리 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비열하고 인간답지 못한 삶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생존을 위한 생존은 거부하는 사람들도 엄연히 있다. 자존감을 잃은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천만덕 같은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 탐욕
생존에의 열망은 기어이 탐욕에 이르고, 탐욕은 인간의 눈을 멀게 만든다. 그래서 아직 작은 소년인 16살의 석이도 그 작은 가슴에 탐욕의 씨앗이 뿌려지자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나선다. 평소 "뭐든 쓸데없이 욕심이 들믄 안되는겨"라는 아버지 만덕의 말에 "야, 알았씨유" 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하던 석이는 마음에 둔 처자가 다른 데 시집가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하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그리곤 오로지 돈 욕심만으로 아버지 몰래 <대호사냥>에 나선다. 자신이 아버지 만덕을 대호사냥에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복수에 불타는 도포수 구경도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자 물불 안 가리는 대호사냥에 나선다. 사람들의 총질에 죽어간 산군의 새끼를 미끼로 대호를 유인하는 비열한 짓도 마다 않고 만덕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덕의 아들 석이를 호랑이 사냥에 앞세우기까지 한다. 그런 그의 마지막 말로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당사자만 모를 뿐, 다른 사람들 눈에는 훤히 보인다. 그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행태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탐욕 앞에서 시쳇말로 "눈에 뵈는 게 없어진" 구경은 그 누구보다도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 예의
생존에의 열망과 지나친 탐욕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은 뜻밖에도 예의다. 짐승의 생목숨을 끊어 자기 삶을 유지해 온 천만덕은 이제 그 쌓여온 ‘업’을 풀기 위해 더 이상 사냥에 나서지 않는다. 그리고 아들 석이와 산을 다니며 약초를 캐어 생계를 꾸려간다. 석은 명포수로 알려진 아버지가 남들처럼 호랑이, 그것도 대호만 잡으면 읍내 대궐 같은 집 하나쯤 거뜬히 장만할 수 있다는데도 아픈 다리로 약초나 캐어 시장에 내다파는 것이 도무지 마땅치가 않다. 하지만 그런 아들 석에게 천만덕은 이렇게 말한다. "잡을 만큼만 잡는 것이 산에 대한 예의인겨. 그리고 산군님은 건드리는 게 아니여."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실종된 지 오랜 요즘이어서 그런지 산에 대한 예의, 짐승에 대한 예의를 논하는 말이 왠지 생뚱맞게까지 들린다. 하지만 어차피 인간의 삶이 짓밟는 자 있고 짓밟히는 자 있다 할지라도, 또 약육강식의 정글세계여서 먹이사슬처럼 먹고 먹히는 관계로 연결돼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만이라도 갖추고 살아간다면 필요 이상의 출혈이나 살상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호와 죽음을 함께하기로 각오한 만덕이 총을 쏘기에 앞서 대호를 향해 절을 올리며 예를 갖추는 모습은 숙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 죽음
천만덕이 총을 들어 지키고 싶었던 것, 죽음으로써 지켜내고자 했던 것은 생존만을 위한 삶이 아닌 자존감 있는 삶이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인간의 삶이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 하는 생명의 연장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어서는 안 되며, 그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더 뜻을 두고 살아야 짐승들 위에 군림하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칭호를 들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점령당하는 것은 한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점령자를 향해 꼬리를 흔드는 짓은 <그저 사는 것>이지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 대호가 삶을 마감하면서 떠올리는 것은 새끼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던 광경이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만덕의 눈앞에도 아들 석이와 투닥투닥 말씨름을 하며 약초를 캐러 다니던 광경이 떠오른다. 짐승도 사람도 가장 행복한 삶은 큰 욕심 없이 자신의 터전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도 쉬울 수 있는 이 소망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남의 것을 빼앗아야 직성이 풀리고,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더라도 가득가득 재물을 쌓아놓고 싶은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로 넘쳐나고, 인간에 대한 예의보다는 돈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은 아닌지 인간 대호 천만덕과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 대호가 묻고 있는 것 같다.
호랑이의 공격에 온몸을 찢기는 것도 모자라 늑대들에게 물려가는 석이를 볼 때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어린 그가 느꼈을 공포를 생각하면 나 역시 지금도 몸이 죄어드는 기분이다. 죽어가는 석이의 눈앞엔 이렇듯 아무 걱정 없이 아버지와 웃으며 행복해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그 소중한 시간을 잃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는가를 알게 되는 인간의 어리석음의 끝은 어디일까?
이상, 대호 인간 대호 최민식이 총을 들어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였습니다. 재미있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