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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히말라야에서 산쟁이들보다 더 빛났던 정유미

 

히말라야에서 산쟁이들보다 더 빛났던 정유미 

 

 

산쟁이. 전문 산악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었다.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단단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그 말은 여느사람으로서는 감히 가닿지 못할 경지에 이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처럼 들렸다.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을 허락받는 것일 뿐"이라는 영화 속 대사도 오직 그런 산쟁이들에게만 허락된 깨달음일 터였다. 

 

그런데 그런 산쟁이들의 뜨거운 의리를 다룬 감동실화를 황정민 주연의 영화로 만들었다는 [히말라야]여서 하루라도 빨리 보려고 허겁지겁 달려간 결과는 좀 씁쓸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어서 평소 영화를 보기 전에 되도록 큰 기대를 갖지 않으려고 하는데, 믿고 보는 배우 황정민이기에 방심했던 탓인지 이번엔 제대로 낚여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테랑]에서 보여주었던 황정민의 좌충우돌 종횡무진 멋진 활약상이 [히말라야]에서는 오히려 독이 된 게 아닌가 싶었다. 마치 베테랑의 무대를 히말라야로 그대로 옮겨놓은 [베테랑 히말라야편]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에서 산쟁이들보다 더 빛났던 정유미

 

일단 영화가 너무 수다스러웠다. 산쟁이들이 본디 그렇게 수다쟁이인 건지, 아니면 영화의 실재인물인 산악인 엄홍길과 함께한 등반대원들이 유독 그토록 수다스러웠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영화 [히말라야]에 출연한 배우들이 남다른 수다 실력을 보여주었던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말, 말, 말의 향연이었다. [산쟁이들의 수다]라는 제목을 붙여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말이다. 말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예능인들이 나와서 저마다 온몸을 불사르며 토크배틀을 벌이는 한판의 토크쇼 같았다고나 할까.  

 

물론 말이 넘쳐나는 것이 꼭 나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관객들을 위해서라면 재미있는 대사들이 차고 넘치는 것이 더 흥미진진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거기가 어딘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산도 아니고, 여간해서는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감히 범접하기조차 어려운 신의 산 히말라야 아닌가. 그런 히말라야를 두고 무슨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침묵과 표정만으로 의미를 전달해 주어야 할 것 같은 순간에도 모든 것을 말로 다 설명하려는 듯이 떠들고 소리지르고 웃고 울고..하는 바람에 감정이입이 될 겨를도 없어서 그들이 노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대표 산악인 엄홍길이 이끄는 휴면원정대의 감동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토리이니 감동은 따놓은 당상일 텐데, 아무래도 다큐를 오락으로 만들어버린 것에 실망의 원인이 있었지 않나 싶다. 오락을 다큐로 만드는 것도 절대 해선 안 될 일이지만, 반대로 다큐를 오락으로 만드는 것도 절대 삼가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말라야라는 이름 자체가 주는 압도감도 그렇고, 아무나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그 산을 오르는 일이 여느사람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움이 따르는 일임을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거의 백 프로 다큐여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혹 지루함이 느껴지더라도 기꺼이 관람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에 더 안타깝고 더 아쉬움이 컸던 것 같다. 언제쯤 그런 느낌을 갖게 해줄까 기다리느라 오히려 지루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일단 마음이 꼬여버리자 <기록도, 명예도, 보상도 없는 가슴 뜨거운 도전이 시작된다!>라는 저 카피까지도 기어이 삐딱한 시선으로 보게 되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아니, 그럼 동료대원을 구하러 떠난 길이, 기록도 명예도 보상도 없는 것이 당연하지, 뭘 바랐던 거야. 이 말은 거꾸로 기록도 명예도 보상도 없으면 도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 아냐?" 하는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ㅎㅎ) 

 

 

정유미마저 그랬으면 어쩔 뻔했나. 다행히 박무택(정우)의 아내 최수영 역을 맡은 정유미는 다른 배우들도 딱 정유미처럼만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을 만큼 절제된 연기를 보여주었다. 엄흥길 대장이 이끄는 히말라야 원정대에 합류하기 위해 5년이나 교제해 온 수영에게 결별을 고한 무택을 찾아와 따지고 드는 당돌한 모습도 너무 사랑스러웠고, 오랜 기다림 끝에 기어이 무택과의 결혼을 성사시킨 꿋꿋한 모습도 너무 미더웠다. 그리고 남편 무택이 히말라야의 데스존인 8,750미터에서 숨을 거두고 그 시신을 거두기 위해 다시 히말라야로 떠난 휴면원정대 앞에 나타난 용기있는 모습도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압권인 모습은 힘겹게 무택의 시신을 찾긴 했지만 운반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어려워 부상자가 속출하는 것을 알고는 휴먼원정대에게 무전기로 “오빠는 산이 좋은가봐요. 히말라야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은가봐요 ”라고 말하며 애써 눈물을 삼키는 모습이었다. 남편 무택의 시신을 산에서 데려오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무택을 위해 생업도 제쳐두고 히말라야로 떠나온 원정대가 선택의 기로에서 결단을 내리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기에 과감하게 용기를 낸 것이었다. 이렇듯 히말라야에서 산쟁이들보다 더 빛났던 정유미는 짧지만 인상적인 연기로 가슴 절절한 감동을 안겨주어 씬스틸러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제작노트에 따르면, [히말라야]의 제작과정은 국내에서는 전례가 없는 최초의 도전이었기에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모든 배우와 스탭이 산을 직접 등반하며 촬영했고 경사면이나 빙벽에 매달려 촬영하는 장면도 많아서 리허설과 테스트 촬영을 수십 차례 진행하며 안전을 점검하고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고, 도봉산 등산학교에서 안전벨트 차는 법, 하강하는 법, 등강기 세우는 법과 암벽 훈련, 빙벽 훈련은 물론 백두대간 산악 등반 훈련 등 실제 원정대를 방불케 하는 사전훈련도 거쳤다고 한다.

 

이석훈 감독은 “네팔 히말라야의 3,800미터 정도까지 스탭 전원이 등반을 하며 촬영을 진행했고, 프랑스 몽블랑에도 올라 매서운 추위에 서로 동고동락하며 촬영했다. 눈보라 폭풍이 몰려와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 고산병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지만 현지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생생한 현장감을 영화에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었다. 배우, 스탭들 모두 촬영이 끝날 때 즈음에는 웬만한 장비는 스스로 착용 가능한 준 산악인으로 거듭났다”며 에피소드를 전했는데, 감독과 스탭, 배우들이 힘겨움을 무릅쓰고 혼연일체가 되어 탄생시킨 [히말라야]이니, 좋은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애쓴 그 노고만은 충분히 의미있고 감사한 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이상, 히말라야에서 산쟁이들보다 더 빛났던 정유미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