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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송곳 가해자와 피해자 결코 좁혀지 않는 그 아득한 괴리

 

송곳 가해자와 피해자 결코 좁혀지지 않는 그 아득한 괴리 

 

 

우리 속담에 "때린 놈은 발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발 뻗고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때린 놈은 발 못 뻗고 잔다"는 말은 사람에겐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떤 이유로든 상대방에게 해를 입혔을 때, 그 순간에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도 나중에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미안해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맞은 놈은 발 뻗고 잔다"는 말은 맞은 것 자체는 억울하고 분할지언정 적어도 상대에게 가해를 한 것이 자신은 아니라는 안도감이거나 아니면 억울함을 스스로 달래는 마음일 것입니다. 어떻든 이 속담은 "피해자보다는 가해자 쪽이 더 그 상황을 불편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 다양한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서는 이 속담이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래야만 정상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때로는 이 속담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현상도 나타납니다. 즉 "때린 놈은 발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발 못 뻗고 자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맞은 것도 억울한데, 여기다 발 뻗고 잠들지도 못한다면, 그 억누를 길 없는 이중의 분노가 얼마나 피해자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송곳 가해자와 피해자 결코 좁혀지 않는 그 아득한 괴리

 

푸르미라는 대형마트에서 벌어진 정리해고 문제를 통해 세상의 부조리를 다룬 드라마 [송곳]에서 부진 노동상담소 구고신(안내상) 소장도 바로 그런 피해자 중 한 사람입니다. 젊은시절 겪은 모진 고문으로 인해 만성신부전증까지 얻게 된 그는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하루에도 너댓 번식은 투석을 해주어야만 하는 목숨을 부지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몸이 그러할진대, 그 동안 정신적으로 겪어온 피해는 "더 말해 무엇하리요"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혹한 고문에 관한 한 피해자였기에 맞은 놈 발 뻗고 자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왔습니다. 적어도 가해자는 발 못 뻗고 살고 있겠지, 나중에 우연히 만나게 되더라도 너그러이, 멋지게 용서의 말을 전하리라..하는 착각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착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은, 20여 년 후 그 가해자와 실제로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상대방은 미안해하기는커녕 자신을 알아보지조차 못하는 기막히고 황당한 일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억 속에 얼마나 깊디깊은 상흔을 남겼는지, 그 뒷모습만 보고도, 아니, 미처 그 뒷모습을 확인하기도 전에 기분나쁜 기운에 몸이 먼저 반응을 하는 구고신 소장입니다. 하지만 구 소장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경비원으로 새로 채용된 과거의 그 고문관은  구 소장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합니다.

 

 

고문관이 주구장창 고문만 했던 것은 아닌가 봅니다. 때로는 고문을 하는 사이사이에 티타임도 가지면서 공부 못하는 자식 때문에 답답한 마음을 풀려고 청평에 가서 웨이크보트를 타고 왔다는 이야기며 넌 공부를 잘하니 우리 아들도 공부 좀 잘하게 그 비법을 알려달라는 이야기도 건네니 말입니다.

 

그러면 고문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구고신은 그 참혹한 모습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활짝 지으면서 "웨이크보트, 그거 어려워서 아무나 타는 게 아니던데 참 대단하시다"며 고문관의 비위를 맞추고, 그 동안 치러진 본고사 기출문제를 다 모아서 공부를 하고 수학문제는 나중에 헷갈릴 염려가 있으니 깨끗하게 푸는 것이 비법이라고 열심히 대답합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해서 작은 애정이나마 한 조각 얻어볼까 갈구하는 표정이 참으로 처연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면 다시 언제 함께 차를 마시면서 그런 무심한 일상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가혹한 고문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또 다시 마주앉아 짜장면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점점 더 거대해져 가는 고문관의 존재에 노예처럼 길들어져 가는 구고신입니다. "꼬리가 있다면 흔들었을" 만큼 잘 보이고 싶은 심정이 되어간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 자신이 열심히 맞장구치던 말들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이 아니라 그 순간엔 진심이었다는 것이 그 후로도 두고 두고 구고신을 괴롭힙니다. 

 

(그런데 안내상씨의 젊은시절을 연기하는 저 배우는 씽크로율 100프로네요. 안내상씨 청년시절 모습이 딱 저랬을 것 같으니까요. 이수인 과장 역을 맡은 지현우씨의 고교시절을 연기했던 배우도 지현우씨를 꼭 닮아서 놀랐었는데, 어디서 그토록 닯은 분들을 잘도 찾아내셨는지 감탄스럽습니다. ㅎㅎ)

 

 

 

이후 구고신은 과거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 고문관을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러자 한 친구는 "당장 경비원 그만두게 해라, 어떻게 고문을 하던 놈하고 고문을 당하던 놈이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보고 살 수 있겠나"고 흥분하며 "너 그 인간 용서할 수 있겠냐 그 인간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냐"고 구고신을 다그칩니다. 이 말에 구고신은 "난 국가한테 고문받은 것이지 그 사람한테 고문받은 게 아니다. 칼 들고 찌른 놈 놔두고 칼한테 화내서 뭐하게" 하며 애써 대범한 모습을 보입니다.


 

모임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오던 구고신은 그자와 마주치자 "주말에 쉬느냐"는 등 예사롭게 말을 건넵니다. 하지만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내가 어색하게 굴었나? 너무 웃었나? 내가 자기를 의식한다고 생각했겠지? 그냥 모른 척할 걸 그랬나? 내가 웃어서 이제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할까? 대놓고 욕이라도 해주는 게 나았으려나? 아니, 차라리 가랑이 사이로 기어올 걸 그랬나? 그러면 그놈이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으려나?" 하고 안절부절 못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리고 투석을 하는 자신의 배를 가리키며 "여길 이렇게 만든 새끼를 20년 동안 날마다 생각했어.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렇게 그놈 만나면 뭐라고 말할 건지 연습까지 했는데,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네. 어이없이 사고로 죽어버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까지  했다니까" 하며 그 동안 피해자로서 고통의 세월을 보내온 것을 괴로워합니다. 결국 구고신은 "당신은 내가 그때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겠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당신을 고문하지 않는 한"이라는 깨달음에 이릅니다.

 

상대가 괴로워하고 있거나 용서를 빌어도 받아들이기 힘들 텐데, 너무나 마음 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꼭지가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이 들 게 분명합니다. 영화 [밀양]의 전도연(신애 역)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자기 아들을 납치해 죽게 만든 목사를 용서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는데, 당사자는 이미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끝모를 절망을 느꼈던 전도연입니다. 용서를 받아야 할 가해자보다 용서를 해주어야 하는 피해자 쪽이 더 고통을 느끼는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본능에 따라 충실히 움직일 뿐인 동물들과 달리 인간에게는 이성과 사려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일을 겪어보지 않고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굳이 그 능력을 발휘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억눌러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능력을 억눌러버리는 것은 평생 가해자로 살았으면 살았지 피해자로 살 일은 없을 거라는 믿음이 한몫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송곳]에서도 보듯이 과거의 가해자는 구고신의 너그러움에 기대야 하는 입장에 놓이고, 피해자 구고신은 가해자의 채용 여부를 좌지우지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구고신이 채용을 취소하라고 하며 당장 경비일을 그만둬야 할 처지인 것입니다. 물론 그깟 일 그만두면 되지..하는 차원의 말은 아닙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은 언제 어디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니, 결코 좁혀지 않는 그 아득한 괴리감을 깨닫지 않는다면 우리의 불행한 삶은 끝이 없을 거라는 의미입니다. 

 

피해자들은 주눅들어 살고 있는 반면에 가해자들은 더 떵떵거리고 거들먹거리며 사는 요즘입니다. 하지만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는 말도 있듯이 영원한 가해자도 영원한 피해자도 없는 법입니다. 또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일 수 있는 게 복잡다단한 우리네 삶입니다. 구고신 소장은 "당신을 고문하지 않는 한 절대 그때 일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라고 말했지만, 굳이 고문을 당하지 않더라도 그 참혹한 고통을 알아준다면 가해자가 더 승승장구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게 되는 이중의 고통은 줄어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송곳 가해자와 피해자 결코 좁혀지 않는 그 아득한 괴리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드라마 송곳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