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으로 보는 세상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5인의 성공습관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5인의 성공습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순수한 가르침들은 올바른 품성과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스털링 실/댄 맥코믹의 [위인들의 성공습관]에 실려 있는 16명의 위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전 인생을 통해 현실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항상 근면하고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중 윈스턴 처칠, 마하트마 간디, 호레이쇼 넬슨,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부커 T. 워싱턴 등 시공을 초월한 성공의 법칙에 초점을 맞추고 그 누구보다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실한 삶을 살았던 위대한 5인의 성공습관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기울인 열정적인 노력을 통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윈스턴 처칠 - 쓰러질지언정 무릎은 꿇지 마라

 

비범할 정도로 강한 신념의 소유자였던 윈스턴 처칠은 조직을 구성하고 관리하는 능력으로도 유명하다. 표현력이 뛰어난 저술가이자 말하기의 달인인 그는 대범하고 자유분방한 말과 뛰어난 유머감각, 풍자로 의회에 활기를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대중을 선도하는 어휘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았다. 그리스 고전문학 등 광범위한 출처에서 인용구를 뽑아내고 상투적인 문구와 비속어, 성경 글귀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쳐 아무리 투쟁적인 사회주의자라 해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처칠의 연설 중에는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말들이 많다. 그 말들은 상황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의무감을 일깨웠으며 위험한 시기를 최고의 날들로 만드는 비법을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도 그는 인간의 깊은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패배감을 날려보내고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올바른 단어를 선택할 줄 알았던 그는 그 단어의 소리가 주는 느낌뿐 아니라 수사적인 효과와 정서적인 의미를 간파해서 활용하는 데 천부적이었는데, 그의 이런 재능은을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나타났다. 

 

처칠의 삶은 많은 점에서 두드러진다. 그 중 하나는 인격이다. 그와 시대를 같이한 정치인들 중에서, 심지어 그와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조차도 그를 거짓말쟁이, 공평하지 못한 인간, 비도덕적인 인간, 명예롭지 못한 인간이라고 비난한 사람은 없었다. 게으름, 나약함, 두려움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죄의식이나 열등감에 시달리는 법도 없었다. 그래서 미 대통령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당신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2 마하트마 간디 -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은 없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5인의 성공습관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마하트마 간디는 거의 벌거벗고 살았다. 전기와 수도, 전화기도 없는 흙집에 살았던 그에게는 내세울 만한 정치적 지위와 학문적 업적도 없었고 과학적 성과나 예술적 성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군대를 통솔하거나 외교를 주재할 권한도 없었고 개인 재산도 한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정부와 군대는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겉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이는 그는 5억 인도인들로부터 무한한 존경을 받는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었다. 루이스 피셔는 이렇게 별다른 재능도 없고 초라하게 시작한 사람이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탈바꿈한 현상을 '인격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간디가 처음부터 그렇게 완성된 인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상당히 심각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둠을 무서워하고 사람들을 기피했으며 자신감도 없었고 스스로를 겁쟁이로 생각했다. 아주 심각한 열등감에 시달렸으며 기분 변화도 심했다. 하지만 이런 약점을 자각한 간디는 자신을 개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전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만큼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크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간디는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았고 성공하려고 안달하지도 않았다. 오랜 기간 단식 수련을 계속했는데, 음식에 대한 탐욕도 억제하지 못한다면 이 삶에서 더 어려운 일들을 헤쳐나가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간디에게 믿음이란 곧 행동을 의미했다. 그는 성실함과 인간성이 국가와 개인의 힘을 기르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일찌감치 깨달았으며, 이런 깨우침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때 큰 장점으로 작용하여 인도의 독립을 위해 싸울 때에도 영국 지도자들에 대한 존중과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의 좌우명은 "갈등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어라"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였다.

 

3 호레이쇼 넬슨 - 자신감을 가지고 나만의 매력을 계발하라

 

위대한 장군이었던 호레이쇼 넬슨은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병약하기까지 하여 결국 버려졌지만 마침내 위기에 처한 영국을 구해낸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11형제 중 한 명으로 태어난 그는 9세 때 어머니를 잃었다. 너무 가난해서 많은 자식들을 부양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자식들 중 가장 약한 넬슨을 12세 때 무임으로 배에 태워 바다로 내보냈다. 

 

넬슨은 19세에 북극을 여행하고 돌아왔을 때 2등 항해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20세에는 대위가 되었고 21세에는 해군소령이 되었으며 23세에는 드디어 자신의 배의 선장이 되었다. 그리고 26세가 되기 전에 이미 해적, 야만인, 스페인 사람, 프랑스 사람들과 전투를 치르며 경험을 쌓았다. 그는 육체적으로 너무 약했기에 힘으로는 경쟁자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머리를 써서 적들을 함정에 빠뜨리곤 했는데, 그의 이러한 능력은 평소 동료들이 노름이나 술에 빠지거나 도시 구경으로 휴가를 즐기는 동안 공부를 함으로써 키울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남다른 성실성은 주변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지휘자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함대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산타크루즈 전투에서는 야간공격의 선두에 섰다가 왼쪽 팔꿈치에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선두에 서서 지휘를 했다. 그 후 6개월 동안 그는 대적하는 모든 나폴레옹의 전투함을 전멸시켰고,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큰 환영을 받았다. 수많은 훈장을 단 그는 절뚝이며 행진했는데, 전쟁 중에 한쪽 눈과 한쪽 팔을 잃은 작고 수척한 모습이었다. 

 

나폴레옹 함대를 전멸시킨 후 넬슨은 전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나폴레옹이 다시 해군을 일으켰고 스페의 해군이 나폴레옹에 동조했으며, 그 결과 나폴레옹은 영국의 해군보다 더 큰 해군력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폴레옹에 대항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사람은 넬슨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다시 영국 함대의 총지휘자로 전장에 돌아왔다. 그리고 트라팔가 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넬슨 제독의 용감함과 뛰어난 전투기술은 나폴레옹의 위협에 제동을 걸며 영국을 보호했다. 넬슨은 위대한 성품으로 인생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살았다. 이것이 바로 매력의 보편적 법칙이다. 

 

4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의 전문가가 되어라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디는 어린시절 음악을 사랑했지만 노래를 못하고 악기도 다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잭나이프를 선물로 받은 그는 이 칼로 나무를 깎기 시작했고, 얼마 안 돼 작은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그가 만드는 바이올린은 어떤 바이올린 제작자들이 만든 것보다 완벽했다. 어느새 그에게 바이올린을 깎는 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닌, 매우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크레모나에는 또 다른 유명한 바이올인 제작자 니콜라스 아마티가 있었는데, 어느 날 스트라디바디가 만든 바이올린이 아마티의 손에 들어갔다. 아마티는 이 바이올린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을 첫눈에 알아보았고, 그 후 스트라디바디는 아마티를 위해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데 있어 그는 자신만의 뚜렷한 철학이 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바이올린을 만들지만, 진심을 다해 신이 자신에게 내려준 재능을 최대한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3백 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못 만들어져 깨지고 고장났다는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은 하나도 없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에 대해서는 어떤 보증도 필요없엇다. 현재 남아 있는 스트라디바리의 모든 바이올린은 자체의 무게가 금의 무게와 맞먹는 가치를 지닌다.

 

스트라디바리는 일에 대한 사랑을 배웠다. 이것은 성공의 가장 훌륭한 법칙이다. 한 번은 친구 나르도가 그에게 바이올린을 대량으로 생산해서 큰돈을 벌자고 했지만 그는 "나는 최고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기술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서투른 솜씨로 황제가 되었으니, 자연스레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오면, 깨어나서 그냥 앉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바이올린이 영원하도록 만든 것이다.

 

5 부커 T. 워싱턴 - 내 마음 외에 바꿔야 할 것은 없다

 

역사상 부커 T. 워싱턴보다 더 낮은 계층에서 시작해 높은 계층으로 올라간 사람은 없다. 농장에서 노예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자랐다. 그저 태어나서면부터 노예였으며 무지와 가난의 수렁에서 성장해야 했다. 이런 불우한 성장기에 대해 부커는"성년이 되기 전까지 나는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권리는 백인들을 위한 것이었지 흑인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노예였기에 학교에 가지 못했고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후에도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학교 안으로, 그 파라다이스 같은 곳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밤에도 낮에도 그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글을 읽을 줄 아는 어린 소년이 부커가 사는 동네로 왔고, 그는 그 아이의 일을 해주는 대신 그 아이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리고 그 후 버지니아 햄프턴에 흑인을 위한 학교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는 학교 문지기 일을 하면서라도 글을 배우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출생적인 불이익 때문에 그는 인정받기 위해 일을 더 열심히 했다. 사실 그는 '부커'라는 이름만 있었다. 하지만 곧 이름과 마찬가지로 성을 갖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누군가 자신의 전체 이름을 물어봤을 때 워싱턴이 자신의 성이라고 말하며 타리아페로(Taliaferro)를 뒤에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부커는 자기 힘으로 글을 배우고 열심히 일했듯이 자기 이름도 스스로 지었다,

 

그 후 교사를 찾는다는 말을 들은 그는 교육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생각하고 지원했다. 그리고 교사로서 업무, 고결함, 명예, 근면성, 학습 등 전 분야에 걸쳐 훌륭한 점수를 획득했고, 23세 때에는 앨라배마 터스키기에 설립할 예정인 흑인학교의 교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가 앨라배마에 갔을 때 학교로 사용하는 버려진 판잣집에는 아이들만 5명 있었다. 변변한 물품도 없어서 5명의 아이들이 책 한 권으로 공부를 했다. 2명이 책을 보고 있으면 뒤에서 두 아이가 어깨 너머로 보고 나머지 한 아이가 이 4명의 등 뒤에서 책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공부할 수 있는 터스키기 학교를 건립했다. 사소한 일이든 큰일이든 가리지 않고 모든 일에 믿음을 주었던 그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고,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데 열성을 다했다. 그리고 위대한 웅변가로 활동했다. 하버드대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처음으로 그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했다.

 

이상,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5인의 성공습관이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