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로 보는 세상

[화차] <근본도 없는> 사람들이 떠밀려 들어가는 고통의 블랙홀

 

 

며칠 전 모큐드라마 <싸인>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한의사 며느리를 찾아나선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추적해 본 결과 큰돈을 가로챈 후 잠적한 그 며느리는

학력 등 거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고, 심지어는 결혼식 때 참석했던 친정부모조차

알바대행이었음이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그녀가 타인에게 인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

자신의 이력 등에 대해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을 넘어 스스로도 그 거짓말을 믿는

‘연극성인격장애’를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미처 모르고 있어서 그렇지,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잊을 만하면 밝혀지는 것을 보면
이런 가짜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주변사람들을 기만하는 행위야 벌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아무리 꽁꽁 싸매고 산다 산들 모래성과 다를 바 없는 삶일 텐데,

늘 고공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할까 싶은 마음도 한편으로는 든다. 

 

영화 <화차>도 신분세탁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고 남의 인생을 훔쳐 살아가는

강선영(김민희)이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만 강선영은 연극성인격장애라기보다는 부모가 남긴 빚더미를 혼자 힘으로

감당해 낼 수가 없게 되자 오직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선택한 가짜인생이었기에 

가난한 부모가 대물림해 준 빚에 의한 희생양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옥과도 같은 삶 속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이제 다시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건만, 악령과도 같은 과거에 다시 덜미를 잡힌 

한 여인의 운명이 그저 안타깝게 여겨질 뿐이다.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장문호(이선균)와 문호의 아버지(최일화)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던 선영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문호가 커피를 사러 간 사이에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다.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머리핀 하나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선영을 찾아나선 문호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드러나는 그녀의 정체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에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놀라고, 

결국 자신이 알아왔던 그녀의 모든 것이 가짜임을 알고 절망에 찬 심정으로 아버지에게

선영과 결혼을 못하게 됐다는 것을 알린다. 그러자 문호의 아버지는 “근본도 모르는 아이를

데려왔는데도 허락을 해주었더니 이제 와서 뭐하는 짓이냐“며 분노한다.

 

 

이상하게 <근본도 모르는 아이>라는 아버지의 말이 귀에 꽂히듯 들어왔다.

선영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생전에 악한 일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끌고 간다는

불수레“인 <화차>에 오를 수밖에 없게 된 것도 결국은 빈곤의 대물림으로 인해

<근본도 모르는 아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몰아넣는 사회의 그러한 편견과

왜곡된 시각 때문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가문 대대로 이어내려오는 가풍을 ‘근본’이라고 했다지만,

요즘은 부모가 아무리 인품이 뛰어날지라도 경제력이 전혀 없다면

근본없는 집안 취급을 당해도 달리 할 말이 없는 세상이다.

그 때문에 부모가 가난하면 자식도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결코 쉽지 않은 현대사회에서

<근본도 모르는 사람>들은 <근본있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는

행복의 한 조각이나마 갖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조차 억누른 채 살아가든가,

아니면 일단 올라탔다 하면 죽어야만 끝나는 화차에 오를 수밖에 없는 지경에 몰린다.

 

게다가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말씀하셨듯이

"과거에는 유리잔이 가득 차면 흘러넘쳐 가난한 자들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간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유리잔이 가득차면 마술처럼 유리잔이 더 커져버린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에게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

물이 가득차면 아래로 흘러넘치는 게 자연의 이치인데, 잘못된 편법이나 일부 사람들의

탐욕으로 부자는 더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더 가난해지는 사회구조가

점점  더 화차에 올라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양산해 내는 데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가짜인생을 살다가 죽어간 한 여자의 기구한 삶을 통해 ‘소비지향의 사회’,

그리고 ‘빚 권하는 사회’가 발생시키는 폐해를 보여주고 있다.

하우스푸어, 에드푸어, 카푸어에 이어 웨딩푸어라는 신조어까지 나올 만큼 빚더미 위에

쌓아올린 모래성 위에서 아슬아슬한 삶을 지탱해 가고 있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요즘,
<화차>의 저자 미야베  미유키는 오직 자신들의 곳간을 배불리 채우기 위해

빚 권하는 사회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날카롭게 경고하고 있다.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타인이 되려 했으나 끝내 그럴 수 없었던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한마디로 애절하다. 빚더미에 허우적대는 사람들하고는 아무 상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화차를 읽고 나면 분명히 그 사람들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서서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현대사회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그 깊은 지옥의 심연에 전율할 것임에 틀림없다

 

는 책의 카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난한 부모가 남긴 빚더미에 짓눌리고 삶을 저당잡힌 선영은

가짜인생을 살았던 점에서는 <싸인>에 나온 연극성인격장애를 가진 여한의사와 다를 바 없지만,

더 깊숙한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일개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덫을 쳐놓고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신용사회의 희생양인 셈이다.

 

 

갖가지 상품들이 한껏 자태를 뽐내며 구매를 기다리는 요즘 같은 소비만능 풍조에서는

돈도 없고 학력도 없고 별다른 능력도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화려한 생활을 꿈꾸게 된다.  
예전에 다들 부족한 듯이 살았을 때는 그냥 그런 꿈을 꾸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요즘은 쇼핑이나 여행 등 화려한 생활에 대한 꿈을 별어려움 없이 빌려주는

신용카드와 사채로 인해 손쉽게 이룰 수 있다.

 

블랙홀 같은 함정은 바로 거기에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현대인의 필수요건이 된 신용카드 대출,

할부, 내집마련을 위한 지나친 대출 등 편의를 제공해 주는 것들에 자칫 발목이 잡히기 십상인 것이다.
영화에서 선영에게 죽임을 당한 그 여자도 처음에는 35만원에서 시작된 빚이 8천만원에 이르자

결국 개인파산을 신청해야만 했고, 선영 또한 부모가 진 사채빚을 갚으라는 사람들에 의해

첫 결혼도 깨지고, 사창가로 끌려다니고, 마침내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고
그 사람의 신분으로 위장한 가짜인생을 살아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불행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꼭 사용자들만의 책임일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책 속에서 변호사를 통해 이 점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교통사고에도 운전자의 책임론만을 운운하면서 형편없는 자동차 행정이나

안정성보다는 경제성만을 내세워 새로운 모델을 내놓고 있는 자동차업계에

냉정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도 문제다. 물론 문제가 있는 운전자들도 많긴 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하고 아무런 과실도 없이 상대방의 실수로 목숨을 잃은

운전자들을 싸잡아서 ‘사고를 당한 것은 본인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닐까? 다중채무자들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즉 사회구조적으로 벌어지는 이러한 폐해를 개인들 각자의 힘으로

해결해 나가라는 말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돈 없이도 소비를 가능케 해주는 신용사회는 급히 돈이 필요할 때 융통할 수 있다는

편리한 점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욕망의 함정에 빠져 헤어나오기 힘들게 만드는 큰 위험을 안고 있다.

게다가 각종 금융권들은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때도 없이 대출을 권유하는 '빚 권하는 사회'가 된 지도 오래다.
이런 상황은 한 개인의 깨어 있는 의식만으로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다.
빚을 권하는 것도 모자라 개인의 신용정보까지 팔아 넘기는 작금의 사태도 그렇고,

강선영이가 타고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화차’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인식케 해주는
사회 전반적인 각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