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로 보는 세상

[명량] 전쟁의 신 이순신 장군 울돌목에서 기적의 승리를 거두다 / 김한민 감독 최민식 류승룡 주연

 

김한민 감독의 [명량]전쟁의 신 이순신 장군이 진도 울돌목에서 기적의 승리를 거두었던

명량해전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민식류승룡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대결이 볼 만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최민식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여느 영화가 시나리오가 씌어진 후 그에 합당한 연기자를 찾는다면,

[명량]은 아예 김한민 감독이 처음부터 최민식님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써나간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최민식의, 최민식에 의한, 최민식을 위한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으로 분한 최민식. “한국 남자배우라면 한 번쯤 꼭 맡아보고 싶은 역할”이기에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이순신 장군과는 인연이 없었던 그는 많은 작품을 거친 후에야 드디어 김한민 감독의 [명량]을 만났다.

 

 

최민식님은 제작보고회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제대로

알진 못하는 것 같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신화 같은 존재 아닌가”라며 “영화를 통해 교과서에서 접했던

모습이 아닌 ‘인간 이순신’에 접근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명량에서 부하들 앞에서는

용맹하고 강한 장수이지만 아들 앞에서는 더없이 자상하고 인자한 아버지, 그리고 혼자 있을 때는

두려움과 압박감으로 눈빛이 흔들리는 인간미 있는 이순신 장군을 놀랍도록 잘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명량에서 일본 해적 우두머리 구루시마 미치후사 역을 맡은 류승룡.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지금 막 지옥에서 온 것 같은 악마의 카리스마를 거침없이 보여준다

 

 

오늘 포스팅은 영화 [명량]과 한국사 전문가 설민석 선생님의 강의 [명량 1, 2]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 배밑에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던 병사와 백성들 중 한 사람이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을 해서 나라를 지킨 것을 후손들이 알아줄까?" 하고 묻자

또 한 사람이 "그걸 모르는 놈들은 호로자식이지" 하는 대답에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저렇듯 목숨을 감수하고 치열하게 싸워준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나라가 여기에까지 이르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듣게 된 대사여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명량을 보고 온 후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다시 한 번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명량은 12척밖에 안 되는 배로 330여 척의 적선을 맞아 싸운 전투였다

 

 

영화 [명량]은 임진왜란에서 승리를 거둔 후 2년여 뒤에 발생한 정유재란 초반의 

이순신 장군의 전투를 그린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전투는 굉장히 많은데, 

김한민 감독이 [명량]에 포커스를 맞춘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 초반에 이순신 장군은 옥포해전, 합포,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한산포, 안골포,

부산포까지 연전연승을 올린다.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 방심하고 있는 소수의 적을 기습하는 것이

이순신 장군의 전투 스타일이었다. 손자병법에 "승리하는 병사는 선승 이후 구전이다"(先勝以後求戰)라는

말은 일단 이겨놓고 싸운다는 의미인데, 이것이 바로 이순신 장군의 전투방법이었고,

그래서 명장이다, 전쟁의 신이다, 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명량은 달랐다. 12척밖에 안 되는 배로 330여 척의 적선을 맞아 싸운 전투였기 때문이다.

 

 

 

 

명량은 먼저 수묵화 CG를 이용하여 지도위에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해전을 보여준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채 이순신 장군을 인두불로 살을 태우며

고문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본디 이순신 장군은 문과를 준비하던 일반 선비였다. 21살에 결혼을 한 이순신은 1576년 32세에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는데, 무과시험으로 전항을 하게 된 것은 무인 출신의 장인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무과에 급제한 그는 워낙 원칙주의자이고 올곧은 성격 때문에 상관의 미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함경도 지역에 가서 여진족을 쳐부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북방의 기마민족인 여진족은 김한민 감독의 [최종병기 활]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민족이다.
당시 여진족의 장수를 그 누구도 사로잡거나 죽인 적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이순신 장군이 적장을 사로잡았다.

 

 

 

 

한편 일본 해적 우두머리 구루시마 미치후사(류승룡)의 고향은 일본 시코쿠 지역 에히메 현이다.

에이메 현과 일본 본토 사이에 있는 쿠루시마 해협은 엄청나게 물살이 센 해협이다.

대대로 해적 노략질을 일삼던 해적집안 출신인 구루시마는 자신의 형제를 이순신한테 잃었던 터여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혹자는 구루시마가 이순신한테 패한 이유가 명량의 빠른 물살에 적응하지

못해서라고 하는데, 명량은 구루시마한테는 어릴때 뛰놀던 동네 앞바다 수준밖에 안 되었다.

 

 

 

 

드디어 이 이순신과 해적질을 하던 구루시마가 맞붙었다. 100여 척과 300여 척이 맞선 것이다.

이 도저히 승산 없는 싸움에서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첫번째 이유는 작지만 강한 조선 수군이었다. 조선의 배는 훨씬 크고 단단했으며 360도 수준으로

포를 쏠 수 있는, 한마디로 배에 떠 있는 거대한 성이었다. 강한 조선 수군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란간다. 기록에 보면 신라가 왜한테 조선술을 가르쳐주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 수군을 이렇듯 강하게 키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왜군들이었다.

고려 말부터 자꾸 일본의 왜구들이 해안가를 노략질하니까 그것을 때려부수는 과정에서 

조선술이 급성장했던 것이다.

 

일본 배의 특징은 작고 빠르다. 어차피 왜구의 목적은 상대방 배에 실려 있는 물건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따라서 배는 상하게 하면 안 되기 때문에 함포 공격은 거의 하지 않았다. 빠르게 달려들어서 갈고리를 걸어

잡아당긴 후 사다리를 놓고 올라탄다. 그리고 일본군의 자랑인 육박전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고 물건을

빼앗아가는 것이 그들의 전투 스타일이었다.

 

이에 대비하려면 우리 배는 적선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화포 공격을 해야 했다.

그리고 배에 올라타지 못하게 하려면 높이 쌓아야 했다. 그래서 조선 주력함선 편옥선은 2층 구조의

높은 배임을 알 수 있다. 아예 거북선은 등껍질을 붙이고 거기다가 쇠꼬챙이를 꽂아 아예 올라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용머리에서는 유황연기와 포가 뿜어져 나와 일본군을 제압했다.

 

 

 

 

하지만 아무리 배가 강하다 한들 그것을 진두지휘하는 장군과 장수들이 따라주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원균 장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배를 몰고 나갔다가 다 잃어버린 것이 그 증거다. 

 

또 하나는 뛰어난 소프트웨어다. 지난 5년간 이순신과 사선을 넘었던 잘 훈련된 정예병사들이 주효했고,

이순신 장군의 기막힌 전략이 있었다.

넓은 바다에서는 사실상 10여 척으로 300여 척을 이길 수가 없다.

이순신 장군의 계산은 좁은 해협으로 그들을 유인하는 것이었다.

육지와 진도 사이에 있는 바다가 명량, 울 명(鳴)자를 써서 명량이라고 하는데,

워낙 물살이 빠르고 거리 있는 암초에 물살이 부딪쳐서 우는 소리, 물이 우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울돌목이라고 부른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돌이 오는 우웅! 하는 소리가 20리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곳으로 일본군을 유인한 것이다.

 

 

 

 

그래서 300여 척이 밀고 들어오는데 실제로 명량, 울돌목 좁은 곳을 통과해 간 배는 100여 척이 채 되지 않았다.

거기에 대기하고 있던 우리 조선 수군이 불을 뿜으면서 그들과 싸우기로 계산에 넣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명량해전이 벌어졌을 때 이순신 장군의 예측은 어긋났다.

장군은 그전에 병사들의 정신훈련을 제대로 시켰지만 다들 겁을 먹고 아무도 따라나서는 배들이 없었다.

그래서 100여 척에 맞서서 이순신 장군 혼자 싸웠다.

적들에게 포위되어 어떻게 싸워 이겼는지는 밝혀낸 사람이 없다. 미스터리이고 기적이었다.

그저 초인적인 이순신의 힘이 있었기에 그 100여 척을 맞아 싸울 수 있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 조선 수군에겐 감동이었고, 해협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일본 수군에게는 충격과 공포였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안위 장군과 김응함 장군의 배가 따라들어왔고, 맨 앞에 있는 적들 위주로

서른 한 척을 완파하고 반파된 배들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일본군들이 완전히 사기가 떨어진 그때 물살이 반대방향으로 흐르게 됐다.

썰물이 되면서 반대쪽으로 물살이 흐르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완벽하게 전의를 잃은 일본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이순신 장군도 빠르게 바람처럼 후퇴한다. 하루에 80킬로미터를 후퇴하여

법성포, 홍농, 부안의 위도까지, 오늘날로 따지면 고군산열도라 하는 새만금 간척지 지역까지 후퇴하는데,

이렇게 빠르게 후퇴한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10여 척밖에 안 되니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고, 둘째는 가는 도중에 다도해 지역이다 보니

많은 백성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조선 수군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즉 백성들의 사기를 높이고 나아가 그들을 해상의병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치밀한 계산이었다.

 

 

 

 

한편 일본군은 후퇴한 다음 가서 생각해 보니 그렇게 패한 것이 어이가 없고 억울해서 나중에

다시 이순신 장군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왔는데, 장군은 이미 후퇴하고 없었다.

명량해전은 1597년 움력 9월 16일, 양력으로 10월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이제 곧 겨울이 찾아와 추워지고 바람이 세어지자 활동하기가 어려워진 일본 수군들은

별수없이 전라도를 버리고 자신들의 왜성 본진이 있는 부산, 즉 경상도 쪽으로 후퇴했다.
즉 이순신의 계산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셈이다.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동장군이 그들을 몰아냈던 것이다.

 

 

"독버섯처럼 퍼진 두려움이 문제지, 만일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수만 있다면

그 용기는 백배 천배, 큰 용기로 배가 되어 나타날 것이다."

 

[명량]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주제는 두려움이다. 일본군도 조선군도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이 두려움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를 김한민 감독은 [명량]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