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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애니깽 멕시코 에네켄 이민자들..1033명의 여권

 

애니깽 멕시코 에네켄 이민자들..1033명의 여권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로 알려진 작가 주요섭의 작품 중에는 1900년대 초에 시작된 미국 이민 1세대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죽음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려낸 [구름을 잡으려고]도 있습니다. 1930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장편이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죄로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 낯선땅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참혹한 실상이 가슴아프게 그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아무리 바닥을 기는 것처럼 온몸을 내던져 살았건만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마치 구름을 잡으려는 듯 손을 내뻗으며 죽어가는 주인공 준식의 모습은 삶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줍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진결혼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사진결혼이란 서로 사진만 보고 결혼상대를 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미국이 워낙 먼 곳이어서 만날 수는 없으니 남자도 사진만 보고 아내 될 사람을 고르고 여자도 사진만 보고 남편 될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떠납니다. 그나마 사진과 실물이 크게 차이나지 않으면 다행이고, 좀 차이가 난다 해도 분복으로 여기지만, 간혹은 예기치 못한 불상사도 벌어져 쓴웃음을 자아나게 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하와이 이민은 [구름을 잡으려고]를 통해 대략 알고 있었지만, 얼마 전 EBS 지식채널e에서 방영한 멕시코 이민세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습니다. 에네켄 농장에서 일을 해서 애니깽으로 불렸다는 것도, 또 [애니깽]이라는 영화가 바로 그 에네켄 농장에서 죽을 고생을 했던 멕시코 이민자들의 애환을 그린 영화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태어난 나라에서도 대접받고 살기가 어려운데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남의 나라에 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래도 꼿꼿한 자부심을 잃지 않았던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이민자들..1033명의 여권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애니깽 멕시코 에네켄 이민자들..1033명의 여권

 

어느 날 신문에서 이민 광고를 본 사람들은 "묵서가(墨西哥)에서 4년만 일하면 부자가 되어 돌아온다"면서 고국을 떠날 생각을 합니다.'4년 계약. 주택 무료 임대. 높은 임금'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이 가난에 찌들려 살던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묵서가란 멕시코를 말합니다. 

 


이때 일본의 인력송출회사가 모집한 인원은 남자 802명, 여자 207명 등 모두 1033명이었습니다. 이 1033명은 2년 전인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1905년 4월 4일  나라 도장이 찍힌 여권을 고이 품고 인천 제물포항에 모여 영국 상선(商船) 일포드(IIford)호에 오릅니다. 

 

 

그리고 1905년 5월 15일, 그들은 40여 일의 험한 뱃길 동안 심한 멀미와 영양실조로 세 명이 죽고 한 명이 태어난 끝에 묵서가, 즉 멕시코에 도착합니다. 

 

 

섭씨 45도 살을 찌르는 태양 아래 농장주들이 그들을 데려간 곳은 선인장처럼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들이 솟은 에네켄 농장이었습니다. 그들에겐 하루 에네켄잎 2천 장을 따라는 할당량이 주어집니다.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17시간을 일하는 그들의 몸 구석구석은 에네켄 잎의 가시에 찔린 상처로 뒤덮였고 피가 마를 새가 없었으며, 이 와중에도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농장관리자에게 채찍으로 맞아야 했습니다. 키 2미터에 줄기와 가시가 억센 열대 선인장 에네켄은 잎 모양이 용의 혀(龍舌)와 같다고 해서 용설란(龍舌蘭)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멕시코 이민자들을 가리키는 호칭이 된 <애니깽>은 스페인어 에네켄(Henequén)을 한국식으로 발음한 것입니다. 

 

 

지상낙원으로 알고 멕시코에 왔던 그들은 그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며 일했지만 임금도 받지 못했고 임대주택이며 식량도 직접 돈을 주고 사야 했습니다. 결국 일을 할수록 빚만 늘어나는 나락에 빠진 그들은 사기 이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905년 7월 황성신문에 실린 중국인 허훼이의 편지에 따르면, "이곳 토인을 지구상 5~6등 노예라 칭했는데 한인은 7등 노예가 되어 우마 같다. 제대로 일하지 못하면 구타당해 피가 낭자하여 차마 못 볼 모습에 통탄 통탄이라 하였더라"며 당시의 처참한 생활상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4년 계약 노동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고국이 사라져 버리고 여권도 쓸모없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결국 그들은 다시 에네켄 농장의 가시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주대한인국민회에서는 "우리가 도웁시다! 농장에서 갖은 고초를 겪던 우리 동포들이 또다시 곤경에 빠졌습니다. 멕시코 동포들을 하와이로 이주시킵시다!"라고 외칩니다. 멕시코 동포 구출 계획에 동참한 그들은 1902년 대한민국 최초의 계약 이민으로 먼저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1903년 5월 제국신문 사설에는 "유민원(이민담당기관)에서는 얼마씩이나 받고 허가하였으며 백성이 하와이 건너가서 어떻게 지내는지는 아는가" 하는 글이 실렸습니다. 소와 말, 짐을 싣는 3등칸에서 22일을 견딘 끝에 자국민을 보호할 영사관도 외교관도 없는 하와이에 상륙한 사람들은 3년간 약 7,2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사탕수수밭에서의 10시간의 중노동 속에서도 멕시코 동포들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던 그들은 일당 60센트를 쪼개고 세탁, 바느질삯을 보태서 모은 멕시코 동포들의 이주 비용을 6000달러를 마련합니다.

 

 

하지만  미국 이민국이 노동 입국을 허가하지 않아서 멕시코 이민자들을 구출하려 했던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 후 어느 날 멕시코 에네켄 농장을 찾아온 일본 영사관원이 "조선은 이제 일본에 병합됐으니 일본은 당신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우리는 인구조사차 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멕시코 이민자들은 "우리는 일본 백성이 아니다. 너희는 우리에게 요구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 이게 보이지 않느냐"며 그들에게 뭔가를 내보입니다. 

 

 

그때 그들이 일본인들에게 내보인 것은 제물포를 떠날 때 받은 조국의 여권이었습니다. 그 후 1920년대 인조섬유가 등장하면서 에네켄 농장은 문을 닫고 한인 이민자들은 생존을 위해 다시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져 가고, 이 중 270여 명은 쿠바의 사탕수수밭으로도 갑니다.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정착하여 오늘날 4만 명이 넘는 한인사회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이상, 애니깽 멕시코 에네켄 이민자들..1033명의 여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