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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차이나타운 오직 쓸모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곳

 

차이나타운 오직 쓸모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곳  

 

 

차이나타운. 단지 김혜수가 출연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보러 간 영화다. 김혜수가 누구인가? 우리나라 믿고 보는 배우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톱배우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소감은? 실망이다. 너무 기대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아무튼 별 뚜렷한 이유도, 목적도 없이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때리고, 찌르고,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소나 돼지를 도축해 팔아넘기듯 사람의 몸을 분해해서 팔아넘기는 것이 대단한 능력이라도 되는 듯한 전개가 영화를 보는 내내 너무 불편해서 몰입하기가 힘들었다. 

 

평소 영화를 볼 때 스토리를 통해 관객들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외 영화적 요소는 그 메시지를 좀더 잘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잔혹한 조폭세계를 그린 영화라 할지라도 최소한 상대를 죽일 때는 먼저 공격을 받았거나, 아니면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정도의 명분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저 상대가 쓸모있는 존재냐 아니냐를 따져 더 이상 <쓸모없어진> 사람은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죽여나간다.

 

 

다행히 믿고 보는 배우 김혜수의 변신은 감탄할 만했다. 한준희 감독은 김혜수가 연기하는 '엄마' 캐릭터에 대해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대부>의 돈 콜리오네를 떠올렸다고 한다. 즉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낯설고 불편한데도 엄청난 에너지를 주는 <대모> 김혜수를 그려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엄마>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여자로서의 아름다움보다는 살아남는 게 더 중요했을 피폐한 삶을 산 인물답게 주근깨며 기미가 빼곡한 거친 피부, 뻣뻣하게 선 머리스타일, 몸에 보형물을 채워넣어 덩치를 키우고 뱃살까지 두둑하게 만든 김혜수의 강렬하고도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훌륭했다. 중년남자처럼 팔자걸음을 걷는 모습도 그럴싸했다. 김혜수 자신도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듯이 "관객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연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 어떤 사람들에게나 따스함과 정겨움을 주는 이 아름다운 이름 <엄마>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모성애를 가진 평범한 엄마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모성애는커녕 오직 <쓸모>라는 잣대를 들이대어 써먹을 건덕지가 있는 사람은 거두지만 쓸모가 없어진 사람은 간단하게 내다버리거나 죽여버리는 냉혹하고 잔혹한 무늬만의 엄마다. 그 점은 매일 식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는, 그래서 감히 <식구>라고 부르는 아이들에게도 예외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엄마가 아이들을 식탁에 둘러앉혀 놓고 밥을 먹이는 이유는 단 하나, 소나 말처럼 부려먹기 위해서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잔혹하게 굴어야 하는지, 왜 사람을 기계 다루듯 오직 <쓸모>라는 용도로만 판단하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줄 만큼 이 영화는 친절하지도 않다. 아마 이 험하디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최대한 강인하게 키우겠다는 의도인가 보다고 애써 믿고 싶어질 뿐이다.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개를 단번에 삽으로 내려쳐 목숨줄을 끊어주는 것이 그 개를 돕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비정한 엄마,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은 그것이 누구든 구구한 말 대신 번뜩이는 칼짓 한 번으로 가볍게 저세상으로 보내버리는 엄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엄마>가 자신이 엄마라고 불렀던 엄마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누설의 염려가 있으니 영화 차이나타운의 홈피에 나와 있는 줄거리를 바탕으로 따라가보면, 이런 엄마 밑으로 지하철 보관함 10호에 버려져서 일영(김고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아이가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잔혹한 엄마가 지배하는 이곳, <쓸모있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이 차아나타운에서 일영 또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쓸모있는 존재임을 증명해 보이고자 극도의 잔인함으로 온몸을 감싼 채 성장한다. 

 

 

이렇게 자란 일영의 무감각하고 무감정한 캐릭터를 <은교>의 앳된 김고은은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영은 엄마의 돈을 빌려간 악성채무자의 아들 석현(박보검)을 만나게 된다. 석현은 일영에게 <엄마>와 <식구들>이 있는 차이나타운에서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친절함으로 다가온다. 그는 또한 시종일관 칙칙하고 음산한 이 영화 속에서 밝고 따뜻한 미소로 한 줄기 햇살처럼 빛나는 단 한 사람이다.   

 

 

살아남기 위해 본의 아니게 잔인일변도로 달려온 일영의 삶 속으로 불쑥 들어온 석현이 보여주는 따스한 친절에 일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린다. 부모의 사랑이든 남녀간의 사랑이든 사랑의 감정이라고는 느껴본 적이 없었던 일영이었기에, 나뭇잎을 잘게 흔드는 미풍 같은 감정에 오히려 더 크게 흔들린 건지도 모르겠다. 상대의 친절과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어 몹시 어색해하면서도 조금씩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일영, 그리고 그런 일영의 변화를 알아차린 엄마는 일영을 이제 더 이상 쓸모 없어진 존재로 여기고 내치려 한다. 일영은 엄마의 생각을 알아채고 "이제 나 하나도 쓸모없어요?"라고 묻는다.  

 

 

엄마는 일영을 향해 석현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증명해 봐. 네가 아직 쓸모 있다는 증명” 하고 말한다. 여기서도 영화는 왜 석현을 죽이는 것이 일영이 자신의 쓸모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일인지, 또 왜 그토록 <쓸모>라는 단어에 집착하는지 납득하게 해주지 않는다. 누구든 세상에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쓸모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사람을 쓸모라는 잣대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분명치가 않다. 쓸모가 없어진 사람은 하루빨리 이 세상을 떠나라는 뜻일까?     

 

 

결국 일영은 석현을 죽이지 못하고 도주하도록 도와주고, 엄마는 일영의 눈앞에서 간단한 손짓 한 번으로 석현의 목을 베어 죽인다. 그 후 일영은 그 동안 엄마가 해오던 방식과는 달리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음에도 자신을 죽이지 않고 일본으로 내쫓으려는 엄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마침내 엄마를 죽여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일영은 엄마와 정면대결을 하기 위해 차이나타운으로 간다.

 

 

칼을 들고 나타난 일영을 보고 <엄마>는 엄마를 죽이고 차이나타운의 대모로 군림해 온 자신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면서 순순히 자신을 죽이라고 말한다. "결정은 한 번이고 그게 우리 방식이야"라고 덧붙이면서. 폭력 혹은 죽음의 대물림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여기서도 왜 <결정은 한 번이고, 그게 우리 방식이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설마 <쓸모있는 자>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부모를 죽이고 그 주검을 딛고 서게 하는 것이 차이나타운식 엄마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함께 밥는 먹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식구>는 가족이라는 단어보다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가족이 아닌 타인일지라도 차 한 잔, 식사 한 번이라도 함께 한 사람은 다르게 느껴지는데, 하물며 매일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사람들은 비록 혈연이 아닐지라도 피붙이보다 더 진한 감정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상대를 존재 자체로 보는 게 아니라 오직 <쓸모>라는 가치로만 판단하는 사람에게 그런 감정은 사치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인간으로 태어나 자연스레 갖게 되는 인간적 감정들을 저 무의식의 세계로 꾹꾹 눌러넣고 뚜껑을 단단히 덮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쓸모>가 있는 한 밥은 먹여주는 엄마에게 기대 살아남아야 하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부모라는 존재가 아이들에게는 폭력 그 자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게 의존해서 살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말 그대로 갑질을 해대는 것이 부모니까. 

 

 

이 영화 속 차이나타운은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와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다. 아니면 사람을 기계 부품의 하나로 치부하는 거대한 공장이라고 해도 좋겠다. 부품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한 그 자리에 머물러 생명을 유지할 정도의 끼니는 때울 수 있지만, 어떤 이유로든 쓸모가 다해지면 간단히 제거돼 버리고 다른 부품으로 대체되는 가엾은 삶이다. 하지만 사람이 기계 부품일 수는 없다. 

 

물론 살아가면서 쓸모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더없이 기쁘고 가슴 뿌듯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쓰임새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쓰임새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고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소중한 생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쓸모가 없어졌다고 해서, 또 자신이 쓸모있는 존재임을 증명해 보이지 못한다고 해서 수명이 다한 자동차를 폐차시켜 버리듯 사람을 죽이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쓸모있는 존재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누구에게 자신이 쓸모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만 차이나타운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이상 영화 차이나타운 오직 쓸모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곳에 관한 포스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