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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암살 전지현과 이정재의 한판승부..16년 전의 임무 지금 수행합니다

 

암살 전지현과 이정재의 한판승부..16년 전의 임무 지금 수행합니다

 

 

전지현과 이정재가 한 판의 스릴 넘치는 게임이라도 벌인 듯 멋진 연기를 보여준 영화 [암살]의 포스팅입니다. 반사회적 인간들에 대한 관심으로 [범죄의 재구성], [타짜], [도둑들] 등의 영화를 만들어온 최동훈 감독은 이번에는 일본이 백범 김구보다도 더 많은 현상금을 내걸었다는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모티브로 한 암살을 연출하면서 전작 도둑들에 출연했던 전지현과 이정재를 다시 캐스팅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신의 한 수여서, 두 사람 다 도둑들에서도 진일보한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이번에는 한층 더 점프한 연기를 보여주어 러닝타임 140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좋았습니다.

 

 

지난주 삼성블루스퀘어에서 공연하고 있는 뮤지컬 [엘리자벳]을 보았습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브루크 왕가의 황후였던 엘리자벳이 대공비의 지나친 엄격함과 왕가의 격식을 요구하는 삶에서 자유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토리였는데, 스토리에 흥미가 끌렸다기보다는 엘리자벳 역을 맡은 옥주현을 보러 갔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레베카]에서 온몸을 불사르듯 감동의 연기를 펼쳤던 옥주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옥주현의, 옥주현에 의한, 옥주현을 위한 무대였습니다. 오래 전 [아이다]에서 수줍은 듯 조심스럽게 연기를 펼치던 그녀를 꽃송이였다고 표현한다면, 지금은 화려한 꽃을 아름답게 활짝 피워낸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눈부시게 흰 드레스를 입고 노래하는 엔딩의 옥주현은 고귀하고 기품있는 한 마리 백조를 연상케 했습니다. 백조는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물밑에서 고통스러울 만큼 다리를 움직인다고 하지요. 아마도 옥주현 역시 그 백조처럼 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덕분에 새삼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무서운 것인가를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목표에 이르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그곳이 어디든 끝도 없이 성장해 나가는 놀라운 힘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생각이 옥주현의 공연을 보는 내내 떠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암살 전지현과 이정재의 한판승부..16년 전의 임무 지금 수행합니다

 

왜 영화 암살을 포스팅하면서 엘리자벳의 옥주현 이야기부터 하느냐 하면, 암살의 전지현과 이정재에게서도 옥주현을 보면서 느꼈던 성장해 나가는 사람들만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감동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기름기를 쫙 뺀 전지현의 담백한 연기와 역시 기름기를 쫙 뺀 다음 자신만의 독특한 소스를 개발해서 슬쩍 맛을 낸 듯한 이정재의 연기는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한층 높여주었습니다. 두 사람 다 연기파 배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오히려 비주얼로 승부를 거는 배우로 여겼는데,  이젠 그 생각을 내려놔야 할 것 같습니다.

 

암살의 포스터 중 하나에는 가운데에 전지현(안옥윤)을 두고 왼쪽에 하정우(하와이 피스톨), 오른쪽에 이정재(염석진)이 나란히 나와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하정우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전지현과 이정재를 더욱 돋보이게 해준 들러리였을 뿐입니다, 약방의 감초인 영감 오달수도, 아네모네 마담 김해숙도, 또 악질 친일파 이경영(강인국) 등의 명품배우들도 전지현과 이정재의 포스에 빛이 가려졌다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을 음식에 비유해서 죄송하긴 하지만, 피자를 예로 들어 말한다면 전지현은 최상급 도우이고, 이정재는 도우에 올린 다양한 토핑이라고나 할까요. 

 

범죄의 재구성, 타짜, 도둑들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은 “매 촬영마다 열정적으로 임하는 전지현의 온도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전지현이 아니었다면 안옥윤 역할을 누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혹이 들 정도로 아주 멋지게 완성했다”며 몸을 사리지 않는 열연을 보여준 전지현에 깊은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염석진 그 자체로 산 이정재는 불안정하고 이중적인 심리를 드러내야 하는 중요한 장면을 위해 두 달간 15킬로그램을 감량한 것은 물론 촬영 전 48시간 동안 깨어 있는 피나는 노력으로 완성되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은, 영화를 보고 나와서야 깨달은 것인데, 끝없는 배신을 일삼으면서 해바라기처럼 오직 밝은 해를 향해서만 나아가는 이정재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조국도 버리고, 아내도 버리고, 딸도 직접 총으로 쏘아 죽이는 이경영의 모습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전 같으면 영화나 드라마,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을 일들이 요즘은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뭔가 상상도 못했던 일에 대해 흔히 "소설 같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젠 소설이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는 가공할 일들이 잊을 만하면 발생합니다. 게다가 그것이 하나같이 인간의 잔인성과 잔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어서 같은 인간이라는 것에 자괴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정재, 이경영처럼 배신을 일삼고 불신을 조장케 하는 악독한 인간군단들이 더 늘어난 걸까요? 아니면 원래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비겁하고 비열하고 잔학한 동물인데 인터넷의 발달로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일을 좀더 빠르고 정확하게 알게 된 것뿐일까요?     

 

 

2015년 8월 15일이면 광복 70주년입니다. 1945년 광복을 맞을 때 1살이었던 아기는 지금 70노인이 되었습니다. 어린 아기가 광복의 기쁨을 알 리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광복의 기쁨을 알 만한 13살 내지 15살 소년들이라 해도 지금은 80대 중반에 이르렀으니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도 계실 테고, 또 살아 계신다 해도 다른 사람의 보살핌 없이는 홀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당시 어린 아기였던 분들마저 세월이 흘러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누가 그때의 감격을 전해줄까요?

 

영화에서 안옥윤(전지현)은 "염석진(이정재)이 밀정이면 죽여라"라는 백범 김구의 명령을 잊지 않고 16년 후에 다시 이정재 앞에 나타나 "16년 전에 받은 임무, 지금 수행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총으로 쏘아 죽입니다. 잊어도 될 일이든 잊어서는 안 될 일이든 16년은커녕 16일, 아니 16시간도 안 돼 새카맣게 잊곤 하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독립의 그 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도 메시지도 넌지시 던져줍니다. 

 

국가의 독립이 무엇일까요? 아니, 식민지란 무엇일까요? 독립국가에서 태어났으니 식민의 설움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학교에서 교과서로 배운 것, 또 어르신들이 들려준 이야기, 그리고 이렇게 영화나 드라마, 책을 통해  상상을 해볼 뿐입니다. 감히 비교할 바는 아니어도 부모 없는 고아, 혹은 악랄한 의붓엄마나 의붓아빠 밑에서 눈칫밥 먹으며 사는 설움 같은 걸까 미루어 짐작해 보지만, 그 어느 것도 직접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한스럽고 고통스러운 시간의 아픔들을 온전히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처럼 영화로나마 접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 자신과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나아가 후세들에게 남의 나라에 빌붙어 사는 식민지가 아닌 어엿한 독립국가를 만들어주고자 목숨을 잃는 위험쯤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그분들에게 크고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할 뿐입니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1920년 의열단의 박재혁 의사는 상해에서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잠입합니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암살하고 붙잡혀 순국한 후 그의 편지 한 통이 뒤늦게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전달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명처럼 그 시대에 맞서 싸웠고 버텼습니다. 어떤 이사람은 이름을 남겼지만 어떤 사람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고 하물며 삶의 이야기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 남겨지지 않은 이야기로부터 이 영화는 출발합니다. 영화에서 암살을 주도한 약산 김원봉(조승우)에 대해 정리한 내용도 함께 올립니다. 김원봉은 당시 일본인들이 백범 김구 선생님보다 더 두려워했던 독립운동가였지만 좌우이념의 대립에 의해 후세에 전혀 알려지지 않아서 비운의 독립운동가로 불린다고 합니다.

 

암살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의열단의 활동 기록을 모티브로 하여 가상의 인물들이 펼쳐나가는 허구의 암살 사건을 그려냈다. 최동훈 감독은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지만 시대의 비극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다르게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었다”면서 조국이 사라진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관객들과 함께 기억하고 싶은 마음을 내비쳤다.

순 제작비 180억 원 규모의 시대 재현! 1930년대 경성과 상하이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대규모 오픈세트를 위한 최적의 로케이션! 한국과 중국 상하이를 넘나드는 총 5개월 간의 대장정! 1930년대 경성과 상하이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기 위해 중국의 10대 세트장인 상하이 처둔, 셩창, 라오싱 세트장에서 한 달여간 24회 차의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해 시대의 리얼리티를 담아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담당하는 미츠코시 백화점은 3층 규모의 건물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한 개 층을 더해 당시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공간을 활용하여 경성우편국, 조선상업은행, 조선저축은행 등 주변 거리의 건물들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해 1933년 화려했던 경성의 거리를 표현해냈다. 옛 경성역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구 서울역사에서 촬영을 진행해 의미를 더했고, 서울 종로의 운현궁, 광주 오웬 기념각 등 근현대식 건축물에서 병원, 극장 내부 등 실내 촬영을 진행하여 관객들에게 그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

 

한일병합 중에 일본이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건 독립운동가는 김구도 유관순도 윤봉길도 아닌 바로 의열단((義烈團) 단장으로 활동했던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이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단체로, 의열단의 의미는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하자’는 뜻이었다. 

 

 

의열단의 목적은 악질적인 친일파, 일본의 고위관료, 일본이 가지고 있는 식민지 통치의 시설들을 파기하고 요인들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러그나 활발한 의열단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암살투쟁에 그치는 것에 한계를 느낀 김원봉은 조직적인 투쟁방법을 배우기 위해 황푸군관학교중(정식 명칭은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한다. 평화로운 방법으로는 독립을 이루기가 어려우니 무력투쟁을 해서라도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1931년 일본의 중국을 침략한 사건인 만주사변으로 중국 내 반일감정이 고조되자 김원봉은 이를 계기로 중국과 합작을 약속하고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운다. 그리고 1기에서 4기까지 150여 명의 청년은 이후 독립운동의 핵심 동력이 된다. 간부학교를 통해 독립운동세력을 양성한 김원봉은 본격적인 무장항쟁을 준비한다.

 

1938년김원봉은  중국정부가 인정한 최초의 한국인 정규뷰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대적선전(對敵宣傳)을 주요임무로 한 조선의용대는 항일운동에 굉장한 공적을 쌓았다. 그 후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화북으로 이동하지만 김원봉은 국민당 정부가 있던 충칭을 떠날 수 없었다. 그 후 충칭의 조선의용대는 한국의 광복군에 편입된다

 

 

해방 후 전국 순회연설에 나선 김원봉은 국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지만 국가로부터는 외면을 받는다. 미군정은 공산당을 포함한 죄악계열을 탄압했고, 그는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수모를 겪는다.

 

정부수립이 차질을 빚자 1948년 남북의 정상사회단체 대표들이 평양에서 연석회의를 열었다. 회의가 끝났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북한에서 정부수립에 참여한다  그 후 그의 행적은 1958년 숙청설 이후로 알려진 바가 없다. 평양에 남은 그의 가족들은 6.25전쟁 후 무참히 학살되었다. 한평생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윘던 김원봉은 좌우의 이념의 대립 속에서 해방된 조선땅 어느 곳에도 발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 암살 전지현과 이정재의 한판승부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