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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얼굴 양위를 선언하는 선조와 석고대죄하는 광해군

 

왕의 얼굴 양위를 선언하는 선조와 석고대죄하는 광해군

 

왕의 얼굴 양위를 선언하는 선조와 석고대죄하는 광해군

 

왕의 얼굴에서 광해군(서인국)은 가희(조윤희)와 대동계의 도움을 받아 분조(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제2의 조정)를 이끌고 수십만 왜군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직접 전장으로 돌진해서 맞서싸우는 대단한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사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왕세자로 지명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적자도 아니고 장남도 아닌 위치에서 왕세자로 지명된 광해군의 위상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분조 활동은 광해군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왜군 앞에 조선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선조(이성재)가 의주까지 내몰리면서 조정이라는 존재는 백성에게 점점 더 희미한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때 분조를 이끌고 각 곳을 누비고 다니는 광해군을 보면서 백성들은 아직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는 것, 자신들이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기운을 얻습니다. 이렇듯 분조를 이끌고 있던 시기에 광해군은 백성들에게 있어 사실상 ‘조선의 왕’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왕의 얼굴 양위를 선언하는 선조와 석고대죄하는 광해군 분조를 이끄는 광해군은 백성들에게 사실상 조선의 왕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죽을 힘을 다해 왜군을 맞아 싸우는 광해군의 업적을 시샘한 선조는 임진왜란의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양위를 선언하면서 아들을 힘겹게 만듭니다. 역사에는 선조와 광해군 말고도 부자자간의 관계가 늘 위태위태했던 왕과 아들이 있습니다. 태조와 태종, 태종과 양녕대군, 영조와 사도세자, 인조와 소현세자 등이 바로 그런 관계였습니다. 즉 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에, 또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윈인이 되어 왕세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거나, 혹은 왕세자 자리에 올랐지만 낙마했거나, 아니면 죽음을 맞았던 것입니다. 

 

오늘 포스팅은 분조 시절의 광해군의 활약과 역사학자 강문식, 한명기, 신병주 공저의 [왕과 아들] 을 바탕으로 부자지간에도 나눠가질 수 없었던 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왕위 계승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본 것입니다. 왕의 얼굴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방패를 날려 왜군을 죽이는 광해군입니다. 왜군의 보급로를 끊고 하나하나 섬멸해 나가는 광해군의 모습이 어찌나 멋지던지 가슴이 뻥 뚫리는 통쾌함이 물밀 듯이 밀려왔습니니다.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몸을 날리면서 칼을 휘둘러 왜군의 적장도 단칼에 베어버립니다. 왜군을 모두 죽이고 환호하는 광해군과 대동계, 의병들입니다.

 

 

조총을 들고 나선 왜군도 광해군의 손에 단번에 목숨이 날아갑니다.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는 대동계와 의병들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화답하는 광해군, 늠름하기 그지 없습니다.

 

 

광해군이 이렇듯 맹활약을 하고 있는데도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간 선조는 아들의 이런 활약을 칭찬해 주기는커녕 백성들이 기뻐하면서 광해군을 우러러보는 마음이 커져간다는 것을 알고는 그 쪼잔함과 비열함을 다시 총동원해서 양위를 선언합니다.

 

 

결국 광해군은 왜군들을 무찌르느라고 힘겨운 와중에 쪼잔한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려고 달려와 밤늦게까지 석고대죄를 하며 "양위의 명을 거둬달라"며 석고대죄까지 합니다. 그러고 보면 선조야말로 시쳇말로 갑질의 대마왕이 아닐까 싶습니다. 왕위를 물려주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아들 광해군을 향해 갑질을 해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음 글은 조선시대에 선조와 광해군 외에도 권력을 놓고 이런 갑질이 이루어졌던 태조와 태종, 태종과 양녕대군, 영조와 사도세자,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본 것입니다. (이 중 영조와 사도세자는 비운의 사도세자와 비정한 영조, 청사에 남을 왕비를 꿈꾼 혜경궁 홍씨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왕과 아들 조선시대 왕위 계승사 


조선왕조에서 왕세자의 위상은 참으로 중요했다. 다음 보위를 이어나갈 종사의 계승자이자 만백성을 다스리는 지존의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왕세자에 대한 교육은 뮤엇보다도 우선하는 국가적 대사였다. 실제로 왕세자의 교육은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수태한  직후부터 모친은 정성을 다해 태교를 행하고 출산 이후에도 양육을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유모를 선발하고, 보양청(輔養廳)과 강학청(講學廳)을 두어 유아기, 유년기의 인성 교육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정식으로 왕세자로 책봉된 뒤에는 관례, 입학례, 가례를 거행하고 학문을 연마하기 귀해 매진했다.

이렇게 힘들고 고된 교육과정을 마련한 것은 물론 왕세자를 장차 현철한 군주로 키워내기 위한 포석이었다. 종사를 보전하고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군주에게는 학문적 소양과 풍부한 지식, 명철한 판단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적 능력과 판단력을 키우려면 왕세자 시절부터 면학에 전진하는 것이 절실했다. 현존하는 왕에 버금가는 권력자인 왕세자 주변에는 곳곳에 여색과 유희의 대상들이 널려 있었던 탓이다. 자칫 방심하면 일탈에 빠지기 십상인 왕세자의 마음을 다잡고 학문으로 교화시켜 장차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현군이자 성군으로 키우는 것이 왕세자의 최종 목표였던 것이다.

 

 태조와 태종

태조와 태종

 

태조 이성계는 5남 이방원을 총명하고 비범함 아들로 여겨 큰 기대를 걸었다. 고려 조정에서 무신 집안이라는 한계를 이방원이 과거 급제를 통해 극복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서 학문적 재능과 자능성을 발견하고 학문을 권면했고, 이방원도 과거에 합격하여 고려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부친의 기대에 부응했다. 나아가 아버지의 참모로 활약하고 ‘킹메이커’ 역할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버지는 이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하지 않았다. 이방원은 아버지의 왕업에 가장 큰 걸림돌인 정몽주를 살해하여 아버지에게 잘 보이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파탄나는 위기를 만난다. 아들은 이후 아예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도전해서 이복동생 이방석을 죽이고 정도전을 살해함으로써 스스f 대업을 위한 길을 닦아 나아간다

 

 태종과 양녕대군 

태종과 양녕대군


자수성가해서 왕 자리에 오른 태종은 아버지와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적장자인 양녕을 아홉 살 때 원자로 책봉했고 열한 살 때에는 세자로 책봉했고, 1416년에는 아예 양녕에게 국사를 위임하여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실시했다.

 

자신을 왕세자로 지명하는 것을 아예 외면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는지 태종은 양녕의 교육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공부가 체질에 맞지 않은 양녕은 싫증을 냈고 바깥으로만 돌려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공부에 싫증을 내는 양녕에게 활쏘기와 무사 습득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러한 시도 역시 역효과를 내어 양녕은 더욱 공부를 기피하면서 잡희와 여색에 빠졌으며 심지어 사대부의 첩과 사통하여 아이까지 낳는다. 그럼에도 아버지 이성계에게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던 태종은 적장자 양ㅏ녕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 반성의 기회를 주지만 양녕은 단식까지 하면서 아버지에게 맞서고, 동생이 죽었을 때조차 궁궐에서 활을 쏜 양녕을 태종은 결국 포기하기에 이른다. 

 

 인조와 소현세자 

인조와 소현세자


인조도 소현세자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지녔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정변을 통해 목숨을 걸고 정권을 잡은 이상 그것을 수성하려면 무엇보다 왕세자 소현세자를 잘 훈육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인조는 15세의 소현을 왕세자로 책립했고, 왕세자로 책립한 당일에는 전국에 사면령까지 내렸다. 신료들에 의해 추대되었기 때문에 불안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왕통을 인조는 왕세자 소현이 이어받아 반석에 올려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착하고 온순한 소현세자 역시 아버지의 기대를 너무 잘 알았고, 또 그런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인조와 소현세자의 애틋한 관계는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 들어갔을 때도 변함이 없었다. 춥고 배고픈 상태에서 구원군마저 끊긴 외로운 산성에서 종사의 명맥은 가물가물했다. 청군이 인조에게 나오라고 강요할 때 소현세자는 자신이 대신 나가 인질이 되겠다고 자처했다. 이윽고 소현세자가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가던 날 아버지 인조는 새파랗게 어린 청의 장수에게 “아들을 온돌에서 재워달라"며 머리를 조아리기도 했다.

소현이 심양에 들어가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부자관계는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한다. 소현이 머무는 심관을 사실상 ‘작은 조정’으로 여겨 조선에 대한 온갖 요구들을 쏟아냈다. 반면에 인조는 소현이 씩씩하게 청나라에 맞서며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처리해 주기를 바랐다. 착하지만 심약한 소현은 한편으로는 청의 눈치를 보랴,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랴 서서히 샌드위치 신세로 몰렸다.

 

결국 청의 이간책에 넘어간 인조는 이제 아들이 아들로 보이지 않고 경쟁자이자 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1644년 명이 멸망하고 청이 북경을 차지해서 아들이 돌아왔지만 인조는 그런 아들이 반갑지 않았다. 냉랭해진 아버지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컸기 때문인지 아들은 귀국하자마자 병석에 눕고 알 수 없는 증세를 보인 끝에 요절하고 만다. 아버지는 사인을 따질 생각도 없이 장례를 서두르고, 손자들을 내치고, 곧이어 며느리마저 죽는다. 왕의 자리를 보전하겠다는 인조의 조바심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왕의 얼굴 양위를 선언하는 선조와 석고대죄하는 광해군, 흥미롭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