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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얼굴 광해군의 아내 세자빈 유씨가 폐비 유씨가 되기까지

 

왕의 얼굴 광해군의 아내 세자빈 유씨가 폐비 유씨가 되기까지

 

왕의 얼굴 광해군의 아내 세자빈 유씨가 폐비 유씨가 되기까지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 임진왜란을 맞은 선조(이성재)는 그토록 미적거리면서 뜸을 들이던 아들 광해군(서인국)의 세자 책봉을 서둘러 마친 후 광해군만 남겨둔 채 궁을 버리고, 백성도 버리고 자기만 살아보겠다고 도망을 갑니다. 어이없게도 광해군은 전쟁이 가져다준 행운 덕분에 세자가 되고 아내 유씨(김희정)도 세자빈이 됩니다. 

 

하지만 유씨가 세자빈이 되고 그 후 왕비가 되어 화려한 영화를 누린 것이 큰 행복만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왜냐하면 16년이라는 광해의 긴 세자시절을 광해와 함께 견뎌야 했고, 그 후에는 왕위에 오른 광해가 인조반정으로 쫓겨나자 폐비가 되는 수모까지 겪다가 끝내는 “후세에는 절대 왕실의 부인으로 태어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라는 뼈아픈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깝고도 허망한 삶을 산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포스팅은 "왕비를 알면 조선의 역사가 보인다"는 부제가 붙은 윤정란님의 [조선왕비 오백년사] 중 폐비 유씨에 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본 이야기입니다. 왕의 얼굴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왕의 얼굴 광해군의 아내 세자빈 유씨가 폐비 유씨가 되기까지

 

세자빈 유씨가 보낸 인고의 세월은 혼례를 치른 첫날밤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신혼 첫날밤, 술에 취해 잠들어버린 광해를 보면서 유씨는 막연히 광해의 마음속에 뭔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실제로 광해가 유씨와의 결혼을 택한 것은 세자가 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광해의 관상 스승인 송내관(김명곤)도 "마마께서 그토록 가슴아파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다른 이에게 맡기실 수 있느냐"며 뜻을 펼치라고 하고 광해 또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갈망으로 스스로 세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후 마음속 깊이 품고 있는 가희(조윤희)가 보는 앞에서 눈물의 혼례식을 올렸던 것입니다. 

 

 

진작부터 광해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유씨가 혼례를 치르면서 행복하게 미소짓고 있는 모습이 유씨에게 앞으로 얼마나 참혹한 생애가 펼쳐질지 알고 있기에 더 처연하리만큼 아름다워 보입니다.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이라고도 불린 유씨(1576~1623년)는 선조 때 광해군의 아내로 간택되어 길례를 올렸습니다. 그 후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왕세자빈이 되고, 광해군이 34세로 즉위하자 왕비로 진봉되었습니다. 하지만 1623년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왕으로 즉위하면서 유씨도 광해군과 함께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들과 며느리가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후 자결하는 사건이 있었고, 결국 유씨도 폐위된 지 7개월 만에 유배지에서 자결로써 생을 마감했습니다. 경기도 양주 적성에 장사지냈고, 폐비인 까닭에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왕의 얼굴에서 지금 세자빈에 오른 유씨가 결국 폐비 유씨가 되기까지의 허망하고도 안타까운 이야기를 [조선왕비 오백년사]를 바탕으로 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광해군의 아내 폐비 유씨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칼날처럼 달려드는 초겨울 강화도 교동땅 초라한 초가의 방안에서 꼿꼿이 선 채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얼굴로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축수를 올렸다. “후세에는 절대 왕실의 부인으로 태어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라는 축수였다.


그녀는 몇 번 축수를 한 후 치마를 벗어 둘둘 말아 올가미처럼 만든 것을 방안 시렁에 묶고는 목을 매달았다. 두어 차례 발버둥을 치던 그녀의 몸은 축 늘어졌고, 밖에서 지키고 있던 군졸들이 들이닥쳤지만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자기 손으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패주 광해군의 아내 폐비 유씨는 16년 동안 세자빈 생활을 하면서 구박도 많이 받고 마음고생도 막심했다. 그 후 남편이 왕위에 올라 15년간 화려한 왕실생활을 누렸지만 유씨에게 남은 것은 자결뿐이었다.

 

 

유씨는 아버지 문양부원군 유자신과 어머니 동래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6세 되던 해에 광해군 혼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아버지 유자신은 진사에 함격해서 태릉참봉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내다가 딸 유씨가 광해군과 혼인을 하자 벼슬이 올랐다. 그리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문양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어머니 정씨는 정유길의 딸이엇다. 유씨의 외할아버지인 정유길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으며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쳐 좌의정까지 지냈다. 유씨집안 사람들은 모두 광해군을 정점으로 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유씨는 광해군과의 사이에 아들 셋을 두었으나 첫째아들과 셋째아들은 홍역으로 일찍 죽고 둘째아들 지만 남았다. 둘째아들 지가 10세 되던 해에 시아버지 선조는 어린 신부 인목왕후 김씨를 맞았다. 이때 김씨가 19세로 유씨보다 열한 살이나 어렸다. 남편 광해군은 28세였으며 세자로 책봉돼 있는 상태였다. 물론 유씨도 세자빈에 책봉돼 있었지만 명나라에서 허락해 주지 않아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인목왕후가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고, 선조는 어린 신부가 사랑스러운데다 서출인 광해군보다 적출인 영창대군을 더 귀여워했다.

 

유씨 또한 어린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시어머니가 아들을 낳는 바람에 입지가 위태로워진데다 김씨 뒤에 선조가 버티고 있었기에 궁녀들의 콧대도 만만치 않았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문안인사조차 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궁인들도 은연중에 유씨를 무시했다. 김씨와 유씨 사이에는 서로 보이지 않는 팽생한 긴장상태가 계속되었고, 선조가 살아 있었을 때는 김씨의 텃세가 매우 심해 유씨는 분노를 속으로만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목왕후의 텃세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영창대군이 2세 되던 해에 선조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드디어 광해군이 조선 15대 왕으로 추대되고 유씨도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와 함께 유씨 집안의 세도도 갈수록 커져갔고, 급기야 왕실을 배경으로 비리를 일삼기 시작했다. 그러자 광해군 4년 봄, 성균관 진사 임숙영이 책문시(責問詩. 잘못을 꾸짖어 묻는 시)에서 유씨 집안과 정사를 풍자하여 비평한 글을 지어 논란을 일으켰다.

 

이처럼 뜻있는 인물들이 광해군과 유씨 집안을 을 비판했지만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일어난 후 나라의 부정부패는 더욱 심해졌다. 이 옥사는 대북세력이 소북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김직재가 희생양이 된 사건이었다. 한편 매관매직 등으로 조정은 갈수록 원칙이 없어지고 세상마저 부패해 가는데도 왕비 유씨는 별 걱정 없이 화려한 중전생활을 하며 가끔 어머니 정씨를 모시고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나라의 부패는 이렇듯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으나 이상하게 풍년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한 나이든 궁녀가 이건 분명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예언했고, 이 예언은 적중해서 광해군 15년 반정이 일어나고, 유씨의 화려한 중전생활도 이 날로 끝나버렸다. 반정이 일어났을 때도 광해군은 수많은 궁녀들과 함께 연회를 열고 술에 취해 흥청거리고 있었다.

 

 

반정 소식을 들은 유씨는 궁녀 수십 명을 이끌고 어수당(魚水堂)으로 피신했다. 반정군이 포위하자 그들은 이 안에 이틀 동안 숨어 있었다. 하지만 유씨는 이제 아무 희망이 없음을 알고 반정군에게 백기를 들기로 결심했고, 궁녀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알리고 목숨을 구하라고 명했다.

유씨는 동생들과 함께 나라를 문란케 했지만 그 기개만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전혀 비굴함 없이 패배를 인정했던 것이다. 야사에 의하면 유씨는 강화도로 광해군과 함께 귀양을 떠나는 뱃길에서도 몇 번이나 남편에게 목숨을 끊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비극을 영위하다가는 사람 꼴조차 우습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을 만큼 기개가 높거나 용기있는 인물이 못 되었다.

 

강화도 교동땅에서 구차한 삶을 꾸려나가던 유씨는 그나마 아들 지가 있어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반정을 꿈꾸며 몰래 밖으로 통하는 땅굴을 파던 폐세자 지가 군졸들에게 발각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고 이 소식을 들은 폐세자빈 박씨도 남편 뒤를 따라 자결하자 더 이상 살아가 희망이 없어진 유씨는 아들 지가 묵었던 방에 들어가 합장을 하고 “후세에는 절대 왕실의 부인으로 태어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라는 한맺힌 말을 남긴 후 치마에 목을 매어 죽고 말았던 것이다. 화려한 왕실생활 끝에 돌아온 비극이었다. 

 

이상, 왕의 얼굴 광해군의 아내 세자빈 유씨가 폐비 유씨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한 포스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