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실명과 익명의 시대를 향한 사라마구의 통렬한 지적질!

 

 

주제 사라마구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실명(失明)과 익명(匿名)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제부터라도 서로 이름도 모른 채 눈뜬장님으로 살아가기를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고 서로를 제 이름을 가진 소중한 인격체로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라마구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들을 말해 보려고 합니다. 


 

안개가 그렇게나 무서운 존재인 줄은 정말 몰랐다.

이따금 아침이면 주변의 사물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이 뒤덮고 있었다가도

햇살이 퍼지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던가 싶게 말끔히 걷혀버리는 것이 안개였다.
어느 날인가 새벽녘에 가보았던 두물머리의 물안개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모습이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러고 보니 안개 때문에 난처한 일을 겪은 적이 있긴 했다.
경주를 여행하기 위해 포항 가는 비행기를 탔었는데, 포항공항에 안개가 짙어서

내리질 못하고 김해공항까지 가서 항공사에서 내준 버스를 타고 경주로

되짚어오느라 짧은 여행길의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게 된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안개로 인해 이런 불편을 겪을 수도 있구나 싶었을 뿐,
안개가 그토록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올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었다.

 

 

새벽 2시가 가까운 시각이었고, 집안일로 대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느 지점부터였는지는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희고 거대한 장막이라도 드리운 듯 고속도로 전체에 촘촘하고도

농밀한 안개의 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한 치 앞이 안 보일 만큼 짙은 안개여서, 조금 전까지 앞서 달려가던 차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

약간 속도를 올려보니 바로 조금 앞에서 달려가는 차의 후미등이 희미하게 보였다.
조심조심 차를 몰아야 했는데, 자칫 속도를 올렸다가는 앞차를 들이박게 될 것 같아 겁났고,

그래서 속도를 조금 늦추면 앞차의 희미한 후미등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느라 진땀이 바짝바짝 났다.

게다가 바로 뒤에서는 대형 덤프트럭이 금세라도 덮칠 듯 바짝 달라붙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아마 그 기사분도 앞차의 후미등 빛을 놓칠세라 그렇게 바짝 붙어 오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워낙에 덩치가 산만한데다, 그 기사분이 자칫 졸기라도 하는 날엔

그냥 바로 죽은 목숨이겠구나 싶어 간이 오그라붙는 느낌이었다.
새벽에 특히 화물차 기사분들의 졸음운전이 위험하다는 뉴스 멘트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렇게 오직 앞차의 엷은 후미등 빛만을 길잡이삼아 달려야 했던

그 공포의 밤은 언제까지고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펼쳐들었을 때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눈이 안 보이게 된

남자의 상황을 묘사하는 첫장면을 읽고 있노라니, 시야를 완전히 차단한 안개 때문에

공포에 떨어야 했던 그날 밤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어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자 그토록 공포스러웠는데,

아예 실명이 돼버려 희미한 불빛조차 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면

그 공포가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그날 앞차의 후미등만을 쫓아 나아가면서도 그 차가 제대로 된 길을 나아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혹 천 길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만일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간다 한들 앞차를 따라가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온몸을 죄어붙여왔었다.

아마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앞을 볼 수 없게 되어 눈이 멀지 않은 단 한 사람,

즉 의사의 아내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던 도시 사람들의 심정이

꼭 그렇게 막막한 수준을 뛰어넘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책에서는 그 의사의 아내가 선의와 책임감을 가지고 눈먼 사람들을 이끌면서

돕고 있지만, 그렇지 않고 만일 그 기회를 악용해 어떤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한들,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다.
혹자는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를 신으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신이든 악마든, 그리고 그곳이 천국으로 나아가는 길이라 믿고 가지만,   
그게 아니라 지옥을 향해 가는 길이라 한들 달리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작가는 이 책의 등장인물들을 제 이름으로 부르지 않음으로써 익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비애를 꼬집어내고 있다. 그들은 분명히 이름이 있을 터이지만

그냥 눈이 먼 남자, 의사, 의사의 아내, 검은색안경은 쓴 여자, 사팔뜨기 소년,

검은 안대를 한 노인, 차를 훔친 남자 등으로 불린다.

그렇게 불릴 때 그들은 인격체가 아닌 책상이나 자동차, 건물 등의

사물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님의 시에서처럼 서로를 이름으로 불러줄 때 우리는 사물이 아니라

뛰는 심장으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인격체로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식물학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흔히 산속이나 들에 핀 꽃들을 보면 ‘이름 없는 꽃’이라고들 하는데,

이름 모를 꽃은 있어도 이름 없는 꽃은 없다고.
그러니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이름 없는 꽃이라고 해서는 안 되며, 

또 이름 모를 꽃조차 이름을 알아보고 제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이름이 없을 때, 그리고 이름을 모를 때 우리는 서로에게 사물과 다름 없는 존재로 추락한다.
또 오늘날 익명으로 말하거나 행동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오만방자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우리는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 

반대로 제 이름으로 불릴 때 우리는 그 이름에 걸맞는 책임감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떳떳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있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그날 새벽 그 깊은 안개 속에서 추돌차고라도 났더라면 뭐라고 불렸을까?
아마 신원이 밝혀지기까지는 앞서 달려가던 승용차의 운전자,

그 뒤를 따라오던 또 다른 승용차 가족, 그리고 그 승용차를

뒤따라오던 트럭의 기사 등으로  불렸을 게 분명하다.

 

그런 지칭으로는 큰 사고를 당했거나 생명을 잃는다 한들 누구의 마음에도 가닿을 리 없다.
하지만 신원이 밝혀져 제 이름으로 불리게 때 비로소 그 사람은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

누군가의 아빠나 엄마, 혹은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내로, 즉 '아무나'여도 상관 없는 사람이 아닌 

더없이 소중한 존재로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파동을 일으킬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연극에서 주연이나 조연을 맡지 못하는 엑스트라의 설움 중 하나도

아마 지나가는 행인 1,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행인 1, 2, 3 등으로 지칭될 뿐,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다행스럽게도 작가는 통렬한 지적질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적인 대안도 내놓고 있다.

서로를 진정한 마음으로 돕고자 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눈뜬장님으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으며
서로를 제 이름으로 불러줄 때 우리는 서로를 생명을 가진 엄연한 인격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의사의 아내는 사람들이 서로를 돕게 됨으로써 모두 시력을 되찾게 되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었던 거죠.“

 

자신에게 뭔가 손해가 될 것 같으면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순간에도

가차없이 외면해 버리는 사람들은 눈먼 자들, 그들이 곧 눈뜬장님들인 것이다.

그리고 의사의 아내는 이런 말도 덧붙인다.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시네마 테라피]의 저자이자 정신과전문의인 최명기 원장님은 영화 <윌로우 트리>를 통해

시력을 되찾는 행운을 맞았음에도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바라봐주는 마음의 눈을 잃고

오히려 장님이었을 때보다 더 불행해진 주인공 유제프의 삶을 짚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눈뜬장님들은 자신의 악한 점, 추한 점을 보지 못한다.
그것을 제대로 보는 순간 자신이 잘못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죽고 싶을 만큼 괴롭다.
따라서 남 탓을 하며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하고, 그렇게 평생 눈뜬장님으로 살아간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순간은 목표를 제외한 다른 곳에는 눈을 돌리지 않게 된다.
삶의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서는 눈뜬장님이 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주변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로또복권에 당첨된 후 불행해진 사람들이나 줄을 잘 서서

벼락출세를 하고 나서 타락하여 몰락한 정치인들 역시 눈뜬장님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돈 혹은 권력을 얻게 되자 그때부터는 자제력이 풀려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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