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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마더> 악어의 눈물 속에 감춰진 빗나간 모성((母性)

 

 

몇 년 전 여름 어느 날, 여느때는 조조영화를 보는 일이 없는데,
그 날따라 오전 일찍 영화관을 찾은 적이 있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영화관은 적막감이 감돌 만큼 한산했다.

 

그날 본 영화가 <검은집>이었다. 
나름 스릴러를 잘 보아왔던 편이라 별생각 없이 보기 시작한 그 영화는

너무나도 공포스러웠고,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잔혹할 수 있는지
그 끝을 보여주는 듯했으며, 악(惡)의 화신 그 자체이면서도 인간이

얼마나 초연한 모습을 할 수 있는지 입증해 주는 더없이 괴기스러운 영화였다.

 

그날 영화관을 나오면서 오금이 저려 걷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을 했고,

그 영화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유선을 그 후 드라마나 다른 영화에서 보게 되면

서늘하다 못해 얼음장 같은 냉기가 흘렀던 검은집에서의 표정이 떠올라 온몸이 죄어드는 느낌이 들곤 했다.

덕분에 그 후로는 꽤 오랫동안 그와 유사한 영화를 일절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정우의 연기가 너무나 궁금한데도 아직까지 <추격자>를 볼 엄두를 못 내고 있다.

 

그런데 세월이 약인지라, 얼마 전부터 다시 슬금슬금 그런 류의 영화를 하나씩 둘씩

찾아보기 시작하게 됐는데, 한동안 멀리했던 터여서 별다른 정보 없이 보게 된 것이 <마더>다.

 

 

<마더>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듯이 얼핏 엄마가 아들이 억울하게 뒤집어쓴 살인 누명을

벗기기 위해 사력을 다해 동분서주하고, 그 위대한 모성에 힘입어 아들이 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담은 영화려니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감독이 이 영화의 이면에 담고자 했던 의도가 무엇인지는 차치하고,
겉으로 드러난 줄거리만 쫓아가보면, 시종일관 어딘가에 넋을 빼앗긴 듯한 표정의

엄마(김혜자)는 지능이 떨어지는 바보 아들(원빈)이 살인을 저지른 걸 알게 되고,

그 사실이 발각날 것 같자 살인과 방화를 저지른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 아들처럼 온전치 못한 다른 아이가 자기 아들 대신 죄를 덮어쓴 것을

알고도 시침 뚝 떼는 악랄한 모성의 끝을 보여준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지 자기 아들이 들어가야 할 감옥에 갇힌 그 아이를

찾아가서는 더할 수 없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너 부모님은 계시니? ...엄마 없어?" 하며

슬픔을 억누른 듯한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안쓰럽기는커녕  "그래, 악어의 눈물이란 게

바로 저런 것을 두고 말하는 거겠지" 싶은 생각에 교활해 보이기만 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엄마가 자식을 위해 어디까지 해줄 수 있을까?
자식이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 같으면 열일 다 제치고 몇 년이든 그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미친 듯이 쫓아다닐 수는 있겠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죄를 지은 자식 대신 감옥에

가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죽어가는 자식을 위해 대신 목숨을 내어주는 것까지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자식을 위해

이 정도까지는 해줄 수 있는 엄마들이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정말로 딱 여기까지여야만 하지는 않을까?
내 자식이 소중하다고 다른 아이에게 그 죄를, 그것도 살인죄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엄연한 범법행위이기도 하거니와,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그 자식만큼이나

소중한 한 아이의 일생을 송두리째 불행의 늪에 빠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아이가 부모 없는 고아라 할지라도, 엄마 없는 설움을 그런 식으로까지 

겪게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그 아이가 내 아이라면, 하는 생각을

딱 한 번만 해본다면, 절대 그런 철면피 같은 짓을 할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영화 <용서는 없다>에는 자기 자식의 목숨을 구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위증을 함으로써

억울하게 살해된 한 여자아이를 명예롭지 못한 죽음으로 몰아넣는 아버지(설경구)가 나온다.

그는 그 대가로 그 여자의 가족(류승범)으로부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처절한 방법으로 

죽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길이 없을 만큼 끔찍한 복수를 당한다.

그리고 실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렇게 저마다 서로 자기 자식, 혹은 자기 가족의 목숨만 소중히 여기는 이기심의 극을 달리는 

복수의 의 혈투를 벌이다 보면, 이 세상은 결국 어느 누구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는 정글이

되어버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회자된 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거리의 소멸’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의 놀라운 충격도 어느덧 희미해져 가고 있으니까.
인터넷으로 연결된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의 세계로 이어주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물리적인 거리의 소멸만이 아닌 사람의 마음과 마음 간에

가로놓인 거리의 소멸도 필요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내 부모이자 내 아이이고 내 형제라고 생각한다면, <마더>의 엄마처럼,

그리고 <용서는 없다>의 아버지처럼 자기 아이를 위해 남의 아이의 인생을

짓밟고 희생시키는 짓은 못할 테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는 왜 이런 엽기적인 살인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에 갈수록 흥미를 갖는 걸까?
<시네마 테라피>의 저자 최명기 원장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즘은 영화는 물론 TV드라마에서도 살인이 없으면

스토리가 전개되지 않는다.
이렇게 살인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이유는 뭘까?
실제 세상에서 공격셩, 더군다나 살인본능은

절대로 발휘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다 보니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
내가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상상은 애초에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하다.
공격성을 대리만족하기 위해 복싱, 격투기, 인터넷 게임이 필요하듯
우리 안의 무의식적인 살인본능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잔인한 살인영화가 필요하다.
즉 영화 속에서 아무 이유 없이 살해당하는 이들은
내 안의 살인본능을 잠재우기 위한 가상제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