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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지식채널e 조선의 과거시험 조선왕조 500여 년 역사를 함께한 인재등용문/신숙주 이이 정약용

 

오늘 포스팅은 EBS 지식채널e 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500여 년 역사를 

함께한 인재등용문 조선의 과거시험을 정리한 것입니다. 

 

관리로 등용돼야만 출세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에는 관리 임용제도인 과거시험이 언제나 

주목의 대상이었습니다. 조선의 과거시험은 고려의 제도를 따라 크게 문과/무과/잡과로 구분했지만,

문(文)을 숭상하는 경향이 높아서 보통 과거라 하면 문과를 일컬을 만큼 비중이 컸다고 합니다.

 

 

EBS 지식채널e 조선의 과거시험 

 

 

과거시험에는 신분상으로는 일반서민인 양인(良人)과 양반만이 응시할 수 있었고

천인(賤人), 그리고 서얼은 양반이라도 응시할 수 없었다.

반면에 무과는 신분상의 제약이 훨씬 적어서 무관의 자손과 향리(鄕吏),

일반서민 중 무예(武藝)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응시가 가능했다.

그리고 기술관을 등용하는 잡과는 서울과 지방관청에서 양성되는 생도(生徒)들이 응시했는데,

양반들은 보통 잡과에 응시하지 않았고 일반서민이나 천인은 응시할 수 없었으므로

일정한 신분계급에 의해 세습/독점됨에 따라 중인(中人)이라는 신분층이 형성되었다.

 

 

EBS 지식채널e 조선왕조 500여 년 역사를 함께한 인재등용문

 

 

조선시대 때 과거시험에 임하는 것은 양반 행세를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래서 특히 지방의 유생들은 서울에 올라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숙식비 등

큰 비용이 필요했지만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실력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양반 체통을 지키기 위해

과거시험에 몰리는 바람에 응시자들이 수만 명이 넘었다.

보통 5세 때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30~35세가 되어야 과거에 급제했으며,

수만 명의 응시자 중 단 33명만을 뽑았으므로 수십 년을 공부해도 합격하기가 힘들었다.

 

 

 

 

모두 8번의 시험에 합격해야 최종 33인에 꼽혔으니 과거시험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렇듯 어렵고 중요한 시험이다 보니 합격하기 위해

갖가지 부정행위, 이른바 컨닝이 난무했다.

 

 

 

 

대표적인 부정행위로는 남의 답안지에 자기 이름을 써넣거나 뇌물로 시험관 매수하기.

또는 도포자락에 예상답안을 써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밖에서 써준 답안지를 몰래 건네받거나  심지어는 콧구명 속에 종이쪽지를 숨겨가지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 외에 답안지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려서 다른 사람을 보게 하거나

시험을 보는 도중에 화장실을 가는 등의 이유로 한 번 자리를 뜰 수 있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해 매수한 사람 근처로 옮기거나 아예 다른 사람과 자리를 바꾸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갖가지 부정행위가 기승을 부리자 그것을 적발해 내고자 하는 묘책도 

날이 갈수록 발전해 나갔다. 

 

 

 

 

시험 전에 몸 수색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응시자 간의 거리는 6자, 즉 1.8미터를

유지하도록 했고, 시험관과 안면이 있는 사람은 다른 시험장으로 배치했다. 

 

 

 

 

또 누구의 글씨인지 모르도록 시험관이 옮겨 적는가 하면 응시자의 인적사항을

오려내어 따로 보관하기도 했다. 가문. 혈통, 배경 등 일체의 압력과 청탁을 배제한

순수한 실력경쟁이 되도록 갖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는 노력을 기울인것이다.

 

 

 

 

이렇게 해서 과거시험에 합격한 인재들이 많은 가문은 명문가로 칭송받았는데, 

전주 이씨가 769명으로 문과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고, 그 다음 파평 윤씨가 419명,

안동 권씨가 368명, 남양 홍씨가 326명, 안동 김씨가 318명으로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다. 

덕수 이씨인 이순신의 후손들은 문과에서는 한 명밖에 없었지만 무과에서는 합격자가 267명이나 됐다.

 

 

 

 

문과는 유교적 지식을 중심으로 고급 인재를 뽑기 위한 시험이었다.

그래서 그냥 과거라고 하면 문과를 의미하며, 무과 등 다른 과거는 무과같이 따로 명칭을 불렀다.
시험은 3년마다 한 번씩 치르는 식년시(式年試)가 원칙이었으며,

관시, 한성시, 향시로 나누어지는 1차시험 초시(初試)에서는 총 240명을 선발했다.

관시는 성균관 유생 중 우수한 사람만이 응시해서 50명을 선발했고, 한성시는 서울에서 40명,

향시는 지방에서 150명을 선발했다. 그 후 복시(覆試)를 치러 최종 합격자 33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전시(殿試)는 합격자의 순위를 정하는 시험으로 왕이 직접 주관했다.

성적순으로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등급을 나누어 왕이 홍패와 어사주(御賜酒)를 하사했다.

이 중 갑과의 1등은 장원으로 종6품을, 2등 방안과 3등 탐화는 종7품의 직위를 주었고, 

을과는 종8품, 병과는 종9품을 주어 승문원, 성균관 등의 임시 직책을 맡겼다.

 

 

 

 

장원급제자들에게는 나라에서 은영연(恩榮宴)이라는 축하연을 베풀어주었으며,

왕이 축하의 의미로 하사한 종이꽃 어사화(御賜花)를 머리에 꽂고

악대와 광대를 앞세워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렇게 등용된 인재들이 활약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다음은 조선 초기의 신숙주조선 중기의 이이, 그리고 조선 후기의 정약용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세 인물을 간략하게 소개한 것이다.

 

 

 

 

신숙주(申叔舟)는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문신, 외교관으로 훈민정음 창제자의 한 사람이다.

세종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했다.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했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토벌에 여러 번 출정했다.
사육신과 함께 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 편에

가담했다. 단종 복위 운동 실패 후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다.

 

 

 

 

이이(李珥)는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이자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다가 환속한 자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공납(貢納)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분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 뒤 그를 문묘에 제향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조선 후기 정조때 문신이며, 실학자, 저술가, 시인, 철학자, 과학자다.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개혁을 주장하며 조선실학을 집대성했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했다. 문집으로 유배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가 있다.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그 덕분에 현대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생명들을 구했다.

 

▶ 참조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