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EBS 역사채널e에서는 왕의 이름 묘호(廟號)에 대한 이야기를 방영했습니다.
묘호란 왕이 죽은 뒤 그 공덕을 기려 붙이는 이름을 말하는데, 나라를 세우거나 그에 비견되는
공덕을 세운 왕은 ‘조’(祖)를, 덕이 높은 왕이나 부자간의 왕통을 계승한 왕은 '종’(宗)을 묘호로 썼습니다.
사즉생(死卽生), 즉 죽고자 하면 살고, 생즉사(生卽死), 즉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각오하에
나라와 백성을 구한 이순신 장군의 울돌목 전투를 그린 영화 명량의 기세가 가라앉을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가라앉기는기는커녕 그 불길은 오히려 더욱 더 거세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명량을 보면서 이순신 장군 같은 명장을 의심하고 시기해서 감옥에 가두고
죽음에 이를 만큼 끔찍한 고문까지 하게 만들었던 선조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EBS 역사채널e 왕의 이름 묘호(廟號) - '조’(祖)냐 '종’(宗)이냐! 묘호 속 숨겨진 이야기
그 궁금증 하나는 왜 <선조>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은 역사적으로 <조>라는 묘호는 <종>이라는 묘호보다 업적이 더 뛰어난 왕에게
붙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임진왜란 중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적도 있는 나약한 왕이
어떻게 <선조>라는 묘호를 갖게 되었는지 의아했던 것입니다.
EBS 역사채널e 생전과 사후에 달랐던 왕의 이름
그런데 알고 보니 아니나다를까, 선조의 아들 광해군이 본디 <선종>이었던 것을 아버지의
사후에 그 업적을 크게 기린다는 뜻에서 <선조>로 바꾼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후대에 왕권강화 등을 이유로 선왕의 묘호를 바꾼 예가 더 있었습니다.
그러면 EBS 역사채널e 왕의 이름 묘호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세자 책봉 때 정해지는 왕의 이름은 대체로 외자였습니다.
조선 27대의 왕 중 두 자 이름을 가진 왕은 태조와 정종, 태종, 단종, 선조, 인조, 철종, 고종뿐입니다.
그리고 이 왕들도 단종과 태종 외에는 모두 이후에 외자로 개명했습니다.
왕들이 외자를 쓴 것은 ‘기휘(忌諱)제도’ 때문이었습니다. 유교문화권에서는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글자로 쓰는 것도 금기시했는데,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황제나 임금, 옛 성현의 이름을 피해야 하는 기휘제도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왕들이 피해야 하는 글자를 한 자라도 줄여 백성들의 편의를 봐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묘호는 원래 중국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던 황권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사대정책을 펼치면서도 묘호만큼은 계속 유지했습니다.
<태조>는 개국 임금으로, 천대에 빛을 뿌린 위대한 임금의 묘호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그렇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또한 그렇습니다.
묘호는 창업자군칭조(創業之君稱祖)라 하여 나라를 연 왕에게는 조를 쓰고,
계체지군칭조(繼體之君稱宗)라 하여 부자간에 왕통을 계승한 왕은 종을 썼습니다.
그리고 덕이 높은 왕에게도 종을 썼습니다.
군(君)은 폐위된 왕, 종묘에 들지 못한 임금, 묘호가 없는 왕을 말합니다.
조선역사상 최악의 폭군 왕으로 일컬어지는 연산군이 그렇고, 왕위를 둘러싼
권력다툼과 붕당정치로 혼란이 극에 달하자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으로
점점 난폭해져 갔던 광해군이 그 예입니다.
한편 조카 단종에게서 왕위를 뺏은 세조는 사후 신하들이 신종, 예종, 성종 3가지 묘호를 올렸지만,
아들 예종이 입승왈조(入承曰祖) 계승왈종(繼承曰宗)이라 하여 ‘사직을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을 높여
<세조>라는 묘호를 붙여야 한다고 주장해서 <세조>로 확정됐습니다.
선조도 유공왈조(有功曰祖) 유덕왈종(有德曰宗)이라 하여 아들 광해군이 임진왜란을 다스린
선왕의 공을 조로 세우라고 주장한 끝에 선종에서 <선조>로 바뀌었습니다.
인조도 사후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했다고 하여 조를 썼는데 이로 인해 당시 큰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인종은 아버지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낸 공로가 크다 하여 조를 쓰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영조와 정조는 첫 묘호는 영종과 정종이었지만 백성을 사랑하고 무신란 등을
진압한 업적을 주장하여 고종이 재위 26년과 36년에 조로 바꾸었습니다.
순조도 처음에는 순종이었지만 서학의 침투를 막은 공이 인정돼 <순조>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렇게 묘호를 조로 쓰는 예가 흔해지자 대신들은
"계승하는 임금은 백세에 빛나는 공덕이 있더라도 종이라 하지 조라 하지 아니합니다.
선왕에게 조의 호칭을 올리는 것은 근거가 없는 일이고 예에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라는
충언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를 종보다 높게 본 왕들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유공왈조, 즉 선왕의 공을 조로 빛내라고 명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종보다 조를 더 높게 평가하는 인식이 커서 묘호를 종에서 조로 고친 예가 많습니다.
조선 27대 왕 가운데 조의 묘호를 받은 왕은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모두 일곱 분입니다.
사실 조종(祖宗)을 먼저 쓴 중국은 건국시조만 조를 붙이고, 이후 왕에게는 종을 썼다고 합니다.
조선도 문종 때까지는 이를 지켰는데, 이 원칙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세조 때부터입니다.
아들 예종이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는 나라를 새로이 세운 공덕이 크다”며 조를 쓸 것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사가들은 예종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한 세조의 그늘을 지우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해석합니다.
종에서 조로 묘호가 바뀐 왕을 알아보면, 21대 왕 영종은 고종 26년에 영조로,
22대 정종은 광무 3년에 정조로, 23대 순종은 철종 8년에 순조로 묘호가 바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유교윤리와 국가이념, 통치철학, 역사 등 인간의 사고를 통섭하는
가치판단으로 빚어낸 창조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왕의 이름 묘호 속에는 조선왕조의 역사와
선왕의 이름을 높여 왕권강화를 노린 조선 후기 왕들의 욕망이 깃들어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