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언으로 보는 세상

‘참’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해석뿐

 

 

 

 

우리는 항상 내가 절대로 옳다고 우깁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확인을 얻지 못하고

자신밖에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생각은 주관적으로 옳을지 몰라도 객관적으로는 옳다고 할 수 없지요. 

 

오늘 포스팅은 3천 년 서양사상가들의 지혜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하룻밤에 읽는 서양사상]

저자 토마스 아키나리가 "자신이 옳은지의 여부는 누구도 절대로 알 수 없다"는 니체의 철학을 

바탕으로 <참’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해석뿐>이라고 써나간 글을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혹시 주위에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의 실수를 내가 뒤집어썼다. 사실은 상대방 책임인데.
  하지만 내 일이니, 책임은 내가 전부 져야 한다고 말한다. 어째서?

 

-업무가 산더미 같은데 ‘느리다’고 상사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느린 것은 상사의 지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사정을 모른다. 옆에서 보기에 나는 느림보다.

 

- 새로운 부서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일의 두서를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 회사에는 인재를 육성하려는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이렇게 다들 자신은 옳고 상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상사가 나쁘다, 동료가 나쁘다, 업무가 나쁘다,

회사가 나쁘다 라고 불평하며, 왜 그런 것들이 나쁜지 이치를 따지기 시작한다.

이때도 그런 이치를 따지고자 하는 것은 당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이치를 따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서로의 의견이 부딪치고 논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니체는 이 경우, 어느 한쪽이 옳다거나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상대를 이치나 논리로 이기려고 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과감하게 관점을 달리해 보자. 
즉 ‘진실이란 뭘까“ 하고 묻는 게 아니라 ”왜 그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걸까?“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옳은 건 누구일까?”를 묻는 게 아니라 “어째서 제각각 다른 사고방식을 갖는 걸까?”를 묻는 것이다.
즉 “누가 말하고 있는 걸까?”를 물음으로써 내면에 숨은 ‘권력에의 의지’를 폭로해 보는 것이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란 남보다 우수해지고 남을 지배하려는 의지를 말한다.

즉 타인과의 협동을 무시하고 남을 지배하는 권력을 지향하면서 스스로 강해지려는 강렬한 의지다.

 

 

“그는 승진했지만 사실은 실력으로 한 게 아니었어.”
“나는 실패했지만 사실 가정환경이 나빴기 때문이야.”
“그녀가 선택해야 할 상대는 사실 바로 나였어.”

 

사실(참)이란 어디에 있는 걸까?
그건 어디에도 없다.
있는 것은 자신이 불만이라는 것과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자신을 더 망치고 있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말은 그렇게 해도 다른 사람의 생각과는 관계 없이 참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애당초 ‘참’이니 ‘거짓’ 따위는 우리의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뭔가를 옳다고 판정할 때는 반드시 ‘권력에의 의지’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평을 털어놓고 싶을 때는 그 불평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논리에서 떠나

불평을 말하는 이유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
‘옳다’, ‘그르다’라는 해석을 하는 게 아니라, 

그 해석이 참이라고 확신하게 만드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권력에의 의지’를 충족시킬 만한 이치를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무의식중에 그렇게 믿으면 기분이 안정되는 논리를 선택하는 것

바로 /진실의 정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