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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으로 보는 세상

[엿보기와 엿듣기] 남의 집 불구경은 클수록 재미있다?

 

세월호 침몰사고가 발생한 지 열흘째. 구조작업이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도 실종자들이 100명이 넘어 가족들은 물론 온 국민이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려스러운 것은 언론사와 방송사들의 지나친 경쟁으로 오보가 나오고,

사고현장과 피해자 등의 모습도 여과없이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방송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누구할 것 없이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극적인 특종 보도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사고를 수습하는 데 여념이 없는 구조대원들의

생생한 현장보도를 통해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위로해 주는 일일 것입니다.

 

<우왕좌왕하지 않고 세상사는 지혜>의 저자 도야마 시게히코는 언론사며 방송사들이

당사자들에 대한 배려를 도외시한 채 이렇게 연일 경쟁적인 보도를 하는 밑바탕에는 

엿보기와 엿듣기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의 심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연극은 재미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끔찍스러운 살인도 무대 위에서 비극적인 연기로 그려지면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카타르시스’(淨化)라는 이론으로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해로운 감정이나 에너지가 축적되게 마련이며,

때로는 이것이 폭발해서 끔찍스러운 짓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이때 연극 같은 픽션을 통해 무섭고 두려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면 마음속에 쌓여 있던

우울감이나 걱정, 불만불평 등이 배출된다고 합니다.

독을 독으로 다스리는 수단으로 생각해도 좋고,

'픽션'이라는 해독제를 투여해 현실의 해악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겠지요.

 

즉 연극이 재미있는 것은 관객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허구인데다 자기가 당하는 일은 아니니까요.

“남의 집 불구경과 싸움구경은 재미있다”는 말도 그런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 집이 불타고 있거나 자기 가족이 타인과 싸우고 있다면 절대로 재미있을 리 없을 테니까요.

 

 

  

 

 

커뮤니케이션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있으면 성립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보거나 들을 때 성립되는 커뮤니케이션,

즉 ‘엿보기’ ‘엿듣기’입니다.

엿보기는 흔히 큰 쾌감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당사자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엿듣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엿보기와 엿듣기도 허구적인 예술의 세계에서는 허용됩니다.

이것이 픽션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연극 무대와 관객이 떨어져 있는 공간이 벽인 셈입니다.

이러한 구조하에서 엿보기와 엿듣기를 허용받은 관객들은 그리 재미없는 이야기도 재미있게 느낍니다.

연극만이 아니라 소설이나 편지, 일기 등도 엿보기와 엿듣기를 하는

제3자적인 입장에서  읽기 때문에 재미있습니다.

 

 

 

 

뉴스 보도도 일종의 엿보기와 엿듣기 입니다.

연극이나 소설 등이 픽션으로 관객과 독자들에게 엿보기와 엿듣기를 경험시킨다면,

저널리즘은 사실 보도로 같은 효과를 거둡니다.

이것이 뉴스의 가치입니다.

뉴스(news), 즉 새로운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단, 그 새로운 것(news)에는 타인의 일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습니다.

당사자인 자신의 일 뉴스의 가치가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중대하고 심각한 일일수록 뉴스의 가치가 더 큽니다.

 

"남의 집 불구경과 싸움구경은 클수록 재미있다"는 것은 뉴스에서도 통하는 말입니다.

어느 나라에서 전쟁이 나거나 큰 지진이라도 발생하면 신문이나 방송은 굉장한 활약상을 펼칩니다.

이러한 피해 보도가 뉴스의 가치를 갖는 것은 시청자들이 엿보기와 엿듣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같은 것을 보도하면 뉴스의 가치가 없어지는데도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엿보기와 엿듣기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피해자들이 연일 밤낮으로 이어지는 보도에 제발 좀 그만둬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