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전략으로 살아남은 나라 룩셈부르크 산마리노 베네치아
인류는 무리를 지어 살기 시작한 때부터 늘 주변세력과 경쟁에 시달렸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방어수단이었습니다. 가장 전통적이면서 보편적인 방어수단은 성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유럽에는 지형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산을 골라 성을 쌓고 공동체를 만들어 살았던 흔적이 많습니다.
중세와 근대를 거쳐 수많은 공동체들은 대부분 대국에 흡수되었습니다. 오늘날 독일이라는 나라는 소국들을 하나하나 병합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남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 벨기에에 둘러싸여 있는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산악지역에 있는 소국 산마리노 등이 그곳입니다. 수도이름이 따로 없는 이 나라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독립국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인문병법]의 저자 안계환이 들려줍니다. [방어전략으로 살아남은 나라 룩셈부르크 산마리노 베네치아]입니다. [약자의 방어막 만리장성]도 함께 올립니다.
방어전략으로 살아남은 나라 룩셈부르크 산마리노 베네치아
작은 성을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된 룩셈부르크는 전략상 위치로 인해 그 어느 곳보다 지역 열강들이 차지하려고 애썼으며, 역대 통치자들은 자치를 유지하기 위해 요새 기능을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북쪽의 지브롤터’라고 불릴 만큼 요새도시로서의 풍경을 간직하게 되었다.
전설 같은 이야기에 의하면 5세기 게르만족 이동과 함께 프랑크족이 동방으로부터 침입해 그들의 땅이 되었고, 10세기에 룩셈부르크가 선조인 아르덴 지방 지그프리드 백작이 바위산 위에 성을 세웠다. 룩셈부르크라는 이름은 당시 이 성을 ‘루실린부르크(작은 성)’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전략상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에 작지만 독립적인 요새도시로 살아갈 수 있었다.
14세기에 보헤미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룩셈부르크 백작가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나왔고 덕분에 룩셈부르크는 공국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가와 프랑스왕국의 끊임 없는 영토분쟁 등 수 없이 많은 외세 침략이 있었지만 룩셈부르크는 요새도시로서의 경쟁력 덕분에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1867년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영세 중립을 선언했고, 당시 네덜란드와 프러시아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군의 침략에 점령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모든 게 잘 갖추어져 살기 편한 곳에 있으면 평화시에는 괜찮지만 외세가 침략하면 이를 막아내기 어렵고 때로는 독립을 잃기도 한다. 독일지역에 존재했던 수많은 국가들이 근대에 와서 이웃나라에 흡수되어 없어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바위투성이 요새였던 룩셈부르크는 이웃나라들이 굳이 점령해서 병합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덕분에 룩셈부르크 국민들은 불편하고 어렵지만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고 국가를 지켜나갈 수 있었다.
■ 산마리노 산에 세워 살아남은 종교 공화국
산마리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며, 바티칸 시국과 함께 이탈리아에 유이하게 남은 도시국가다. 덕분에 민주주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곳이다. 산마리노는 달마치아 지방 석공이었던 성 마리누스(마리노)가 종교적 박해를 피해 4세기경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 세웠다고 한다.
이곳뿐만 아니라 중세유럽에는 수백 개 국가가 수립되었고, 이탈리아 내에만 해도 만토바,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많은 도시국가가 있었지만 모두 외적의 침입과 이탈리아 통일운동 과정에서 병합되었다. 중세 국가들은 독립된 정체를 가지고 있기는 해도 황제와 교황이라는 구심점이 있었기에 독립인 듯 아닌 듯한 모습을 유지했던게 특징이다.
하지만 산마리노는 근세를 지나 현재까지도 그 독립적인 정체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들이 독립국가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정치체제가 공화국이면서 종교국가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며, 둘째 그들이 세운 요새가 방어에 탁월하면서도 존재한 위치가 절묘한 상호균형이 필요한 곳이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기록상으로 산마리노는 885년에 이미 국가가 형성돼 있었으며 1263년에 공화정이 수립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인접지역으로부터 잦은 침입을 받자 로마 교황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16세기에는 체사레 보르자에게 점령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력간 균형이 이루어지는 절묘한 위치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 침입해 베네치아를 소멸시켰던 나폴레옹 역시 산마리노는 독립을 유지시켰다. 어쩌면 그 이후에도 이탈리아로 통일될 수 있었겠지만 그대로 살아남은 것은 종교적인 특성과 나라를 없애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 베네치아 석호에 의지해 방어했던 나라
베네치아는 롬바르디아 평원을 흐르는 포 강(Po river)이 아드리아해로 접어드는 석호 안에 있다. 그곳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어떻게 이렇듯 아름다운 도시를 바닷가에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베네치아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독립국가로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바로 그 위치에 있었다.
외부인이 침략하려 해도 육군은 불가능하고 해군을 동원한다고 해도 지형이 복잡해 공격이 쉽지 않았다. 썰물 때가 되면 조금씩 드러나는 갯벌, 밀물이 되어 갯벌이 사라지면 베네치아인만이 아는 복잡한 수로를 외부인이 통행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외부 침
략에 대한 걱정을 덜고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 강력한 해상국가로 힘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마제국 말기에 접어들자 수시로 침입하는 야만족에 의해 국경이 무너지고 있었다. 5세기 중반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지방 사람들은 지역의 큰 도시 아퀼레이아가 훈족 족장 아틸라에 의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디로 피난가야 할까,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피해를 입을 텐데.” 문득 그들은 어부들이 고기잡으러 나갔다가 잠시 들르던 바닷가 모래톱을 떠올렸다. 그곳은 집을 지을 만큼 여유있는 공간도 없고 안개가 많이 끼고 습도도 높았지만 외적이 침입해 가진 것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선택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모두가 사제를 선두로 해서 그 땅으로 옮겨갔다. 그들은 아틸라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피난 떠났던 사람들과는 지니고 갔던 물건들이 달랐다. 가재도구와 살림살이를 챙겨가는 대신 집을 지을 수 있는 목재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썰물이 되어 물 위로 드러나는 얕은 모래밭과 먹을것이라고는 물고기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소중한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나는 동안 이탈리아어로 ‘라구나’라고 부르는 개펄지대 또는 석호 안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비교적 평온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육지에는 롬바르드족을 비롯한 야만족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그 사이에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안전하게 살 터전을 잡은 베네치아인들은 물고기를 잡고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했고 그 소금은 육지 사람들에게 건네져 곡식, 채소 등 식료품과 교환할 수 있었다. 점차 선박 숫자가 많아지고 선원의 숙련도가 높아졌다. 처음에는 소금과 생활필수품을 교환하기 위해 시작된 상업도 점차 전문적인 생업으로 변해갔다. 또 몇 차례에 걸쳐 본토로부터 사람들이 이주해 와 사제를 중심으로 교구마다 공동체가 탄생했다. 그것이 그들 특유의 공화정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인들에게 외부 위협이 닥친 것은 서기 800년 프랑크족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서였다. 당시 베네치아는 형식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속국으로 있었는데, 샤를마뉴 대제는 이탈리아 전체가 프랑크족 땅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베네치아인에게 자기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오라고 명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이를 거절했고 프랑크족과의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베네치아 사람들은 외부인이 라구나에 와서 제대로 싸움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랑크족 군대가 공격하자 베네치아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똘똘 뭉쳤고 육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바다 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바닷속 물길을 표시하고 있던 말뚝을 모두 뽑았다. 이후 썰물 때가 되자 베네치아인을 쫒아 멋모르고 이동했던 프랑크족 배들은 얕은 육지에 걸려 움직일 수 없었다. 베네치아인들은 움직이지 않는 목표물에 화살세례를 퍼부었고 프랑크군 가운데 살아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후미에 있어 썰물 때임을 알고 외해로 나갈 수 있었던 몇 척뿐이었다.
베네치아가 이후 외부 세력의 공격을 받은 것은 1379년 제노아 함대로부터였다. 하지만 그때에도 베네치아를 보호해 준 것은 석호 내 복잡한 물길이었다. 제노아 함대는 우세한 병력과 해상세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베네치아를 직접 공격하지 못했고, 장기적으로 봉쇄하는 작전을 썼다. 하지만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힘을 합친 베네치아는 제노아의 공격을 물리쳤고 아드리아해 해상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베네치아에는 동방무역 강자라는 위대한 칭호가 붙여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네치아는 1897년 나폴레옹에게 항복했는데, 당시 베네치아는 바다를 그들의 안방으로 하던 해상국가가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세상이 바뀌어 무역을 통한 국가부흥시대가 지났고 정치 귀족들은 육지에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강력한 해상무역 국가에서 농업국가로 바뀌었던 베네치아는 육지 쪽에서 공격해 오는 나폴레옹 세력에 굴복했는데, 그들을 전통적으로 지켜주었던 바다에서 제대로 힘을 써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 만리장성 약자의 방어막
만리장성은 전국시대 때부터 건축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지는데 전적으로 방어 목적이 있을 때 의미가 있었다. 적의 침략을 방어해야 할 때 병사들이 배치되고 성이 보수되었는데 용도가 없어 방치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만리장성이 경계를 이루는 성 안쪽과 바깥쪽의 지리적 특성에 기인한다.
성의 안쪽 즉, 중원지역은 주로 농업경제를 이루는 지역이었으므로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했다. 반면 만리장성 북쪽은 유목민의 세계였다. 그들은 양과 말을 기르고 계절에 따라 이동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곳은 물질적으로 빈곤한 땅이었다. 가축을 길러 가죽과 젖을 만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풍족한 삶을 영위하기가 어려웠다. 탄수화물 섭취를 위한 곡물이 필요했고 사냥을 위한 화살촉, 그리고 귀족들에게 필요한 사치품도 있어야 했다. 따라서 유목민들은 농업지역과 교역을 통해 문물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교역은 불안한 평화가 유지될 때에만 가능했을 뿐, 수시로 약탈을 통한 물자조달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북방 유목민이 군사적으로 강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장성은 산 위에 성을 쌓아 말을 타고 넘기 어렵게 만들고 중간중간 군사들을 배치하여 유목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방해했다. 만약 장성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중원에 있는 수없이 많은 인명과 재산이 피해를 입을 터였다. 따라서 진시황 시절에는 정권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을 만큼 무리해서라도 장성을 개축하고 보수할 필요가 있었다.
진나라 이후 장성 개축과 보수에 정성을 기울인 왕조는 농업을 기초로 중원 정권이 세워졌던 한나라와 명나라 시절이었다. 한나라는 문제 때 오르도스 부근 장성을 수축했고 무제 때 보수했다. 그리고 흉노와의 굴욕적인 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반복했다. 북위는 일찍이 흉노에 눌려 지내던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데도 북쪽 유연과 동북쪽 거란에 대비하여 2천리 장성을 신축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도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규모 장성 수축을 단행했는데, 유목민이었던 그들도 더 강한 상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보호막이 필요한 터였다.
뭐니뭐니 해도 장성의 최고 백미는 명나라 때 만들어져 지금까지 볼수 있는 만리장성이다. 몽골족 원나라를 북방으로 쫒아내고 중원을 지켜야 했던 명나라는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를 적에 대비해 막대한 재물과 인명을 투입해 성을 쌓았다. 반면 농업제국 송나라는 국가가 세워졌을 당시 이미 화북평원 북쪽지역을 잃은 상태였기에 만리장성을 수비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막대한 재물을 금나라에 제공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썼다.
반면에 몽골족 원나라, 만주족 청나라 시절 만리장성은 불필요한 존재였다. 그들은 주도세력이 장성 밖 유목민이었고 농업지역과 유목지역을 통합한 제국을 세웠기에 두 지역이 분리될 필요가 없었다. 이때 이전제국에서 쌓았던 만리장성은 용도가 없어 버려졌고 군인들도 배치하지 않았다. 수비적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 [방어전략으로 살아남은 나라 룩셈부르크 산마리노 베네치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