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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강하늘 김무열의 기억의 밤 기억과 망각,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강하늘 김무열의 기억의 밤 기억과 망각,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 나 자신이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는 것을 말한다. 내 위주로만 생각하고, 내 몫만 따질 때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일도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면 한 걸음 뒤로 물러서거나 상대를 이해하게 되는 신비의 사자성어다. 국가나 회사, 가정에서 예기지 못한 큰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자신에게 직접 닥친 일이 아니어도 발을 동동 구르는 심정으로 안타까워하는 것도 역지사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남의 불행 앞에서 어이없게도 "무슨 그깟 일로 그리 호들갑을 떠느냐"며 코웃음치는 사람들도 있는 게 사실이다. 이렇듯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애초에 그런 성향을 타고난 사람도 있지만, 권력의 구조상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아랫사람들의 희로애락에 대해서는 전혀 유념치 않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른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가해자의 사전적 뜻은 "신체적/정신적/물질적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말하지만, 꼭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범죄행위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인간관계망에서는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시어머니와 며느리 혹은 장인장모와 사위, 선생님과 학생, 상사와 부하직원, 고용주와 고용인 등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부모, 남편, 시어머니 혹은 장인장모, 선생, 상사, 고용주가 가해자가 되고, 자식, 아내, 며느리와 사위, 학생, 부하직원, 고용인이 피해자가 되어 숱한 유형의 갑질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국가 또한 국민들에 대한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면 강하늘 김무열 주연의 [기억의 밤]에서처럼 1997년에 발생했던 사상 초유의 IMF 위기는 수많은 국민들을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아픔과 고통은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누군가에게는 벗어날 길 없는 현재진행형이다. 미스터리를 표방했지만, [기억의 밤]의 바탕에는 이러한 가해자 국가와 피해자 국민이라는 서글픈 드라마가 존재해 있다.  

 

 

그런데 가해자들의 놀라운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거나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가 훗날에라도 예전의 상처를 끄집어내어 그 억울함을 호소해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여 미안하다거나 용서를 비는 일은 절대 없다. 아니, 오히려 언제 그랬느냐며 발뺌을 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 피해자의 분노와 절망에 찬물을 끼얹을 뿐이다. 고용주나 상사에게 모욕을 당했던 일을 잊지 못하고 몇 년 후 찾아가 살해를 하거나, 학창시절에 받았던 차별과 학대를 꾹꾹 억누르고 있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당사자인 선생을 찾아가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일 등이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런 자발적 가해자가 아니라 본의 아니게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 그 가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한 고통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어 기억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해리성 기억상실증'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너무도 끔찍하고 두려워 손쉬운 방법으로 기억을 놓아버리는, 즉 완전한 망각을 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자신이 저지른 짓을 잊은 가해자는 속편할지 몰라도, 망각에 사로잡힌 상대에게는 단죄를 할 수가 없으니 피해자는 더 억울할 수밖에 없다. 죄를 묻고 싶어도, 나아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한다 할지라도 가해자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어야만 그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죽이고 싶어도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지도 모르는 사람을 죽인들 무슨 소용이랴.    

 

 

장항준 감독의 [기억의 밤]은 이처럼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을 기억하는 피해자와 그 기억을 하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어 차라리 망각을 택한 가해자와의 불행한 대립을 그린 영화다. 미스터리와 공포, 드라마가 혼합된 스토리는 쫄깃한 긴장감과 더불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을 한 번 돌아보게 하는 메시지도 준다.

 

특히 스포일러의 염려가 있는 영화인 만큼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면, 새 집으로 이사 온 날 밤, 형 유석(김무열)은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된다. 그리고 동생 진석(강하늘)은 형이 납치된 후 매일 밤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며 불안해한다. 납치된 지 19일째 되는 날 돌아온 형 유석은 그 동안의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돌아온 뒤로 어딘가 변해버린 형을 의심하던 진석은 매일 밤 사라지는 형을 쫓던 중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두 남자의 엇갈린 기억 속 감춰진 살인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데... 

 

 

강하늘과 김무열의 연기가 돋보인다. 특히 누구보다 형과 가족을 사랑하는 순수한 동생이지만 신경쇠약으로 꿈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강하늘의 감정연기는 영화를 보는 내내 함께 그 고통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강하늘이 뒤쫓는 씬도 나오고 또 뒤쫓기는 씬도 나오는데,  항상 예상 가능한 선을 한 걸음 더 나아감으로써 공포감과 현실감을 극대화시킨 것도 좋았다.

 

감정에 충실한 연기가 필수적이었기에 장항준 감독은 "[동주]를 보고 감각적이면서도 본능이 살아 있는 배우, ‘진석’의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배우였다”며 강하늘을 캐스팅한 이유를 밝혔는데, 강하늘 역시 앉은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다 읽을 만큼 몰입도가 높은 작품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납치당한 후 모든 기억을 잃고 낯설게 변해버린 형 유석 역을 맡은 김무열은 착하고 다정한 형의 모습부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서늘한 눈빛을 오가며 야누스적인 매력을 보여주었다. 한없이 선해 보이는 미소가 사라지는 순간 바로 섬뜩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변하는 모습으로 서늘한 공포를 잘 표현해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선의 얼굴과 악의 얼굴 중 악의 얼굴을 연기하는 김무열이 더 좋았다. 피해자로서 가해자를 벌하고 싶어도 기억을 잃은 가해자를 오랜 세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절망감과 무기력함도 온몸으로 절절하게 잘 보여주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격언이 있다. 피해를 입은 일을 한시바삐 훌훌 털어내 잊어버리는 게 좋고, 고마운 일은 두고 두고 잊지 말라는 의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 때문에 정작 기억해야 할 일은 까맣게 잊고 살면서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마음속에 단단히 쟁여두었다가 복수의 칼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리하여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고, 그 가해자는 다시 피해자가 되는 불행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누구도 불행에서 헤어나올 수 없기에, 과연 어디서 그 고리를 끊어 불행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더불어 나 자신은 피해자인 줄로만 알고 살고 있는데,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돌아보게 만드는 [기억의 밤]이었다.

 

이상, 강하늘 김무열의 기억의 밤 기억과 망각,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