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 스타일 태도가 차이를 만든다
마크 트웨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자신의 운명을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특히 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에게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었던 그의 태도가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것만을 생각하고, 높은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 부과한 도전을 사랑했기에 처칠은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독일의 작가 헬게 헤세는 [처칠 스타일로 승부하라]에서 위기의 순간에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한 불굴의 승부사 처칠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이 중 [처칠 스타일 태도가 차이를 만든다]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작은 문제 같지만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태도(attitude)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처칠에게는 자신이 지시를 내리고 타인은 그 명령에 따르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어린시절 집에서 하인들을 대할 때부터 그런태도를 익혔는데, 나중에는 거의 당연하다는 듯이 이 태도를 자기 통솔력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날카로운 인물 묘사로 유명한 사회개혁가이자 사회주의자인 비어트리스 웨브는 29세의 처칠과 저녁식사를 한 뒤 일기에 썼다.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끈기있고 차분하게 일할 능력이 없으며,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하고, 오만하고 반동적이면서도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고, 용기와 독창성이 넘치며, 지적이지는 않지만 개성이 있는 사람이다."
당시 처칠은 자체 에너지로 돌아가는 이동식 자가발전소와 다름 없었다. 야심에 불타는 처칠은 수년 전부터 자신의 여러 가지 결함을 성공적으로 극복해 나가던 중이었다. 부족한 교양은 독학으로 어느 정도 메웠고 발음상의 결점도 교정했으며, 공개석상에서 느끼는 무대공포증도 이겨냈다. 어릴때부터 엿보이던 굽히지 않는 그의 의지는 이제 인생의 어떤 문제에도 흔들림 없이 대처하는 태도로 발전해 있었던 것이다.
인생에 대한 처칠의 태도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확신에서도 드러났다. 오로지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면 나쁜 것도 좋은 것으로 상쇄되고 불운도 행운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가 당면한 과제에 임하는 결정적인 태도였다.
처칠 스타일 태도가 차이를 만든다
이러한 처칠의 태도는 때로는 거침없이 표현되는 그의 자의식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확신이 그에게 그릇된 자신감을 심어줄 때도 많았다. 18세 때 처칠은 동생과 사촌동생과 추격놀이를 하던 중 작은 협곡 위에 걸린 다리로 도망치다가 꼼짝없이 갇힌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지나친 과신으로 아래쪽에 있는 나무로 뛰어내렸고, 결국 3일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그 후 그는 3개월 뒤에야 간신히 병실을 떠날 수 있었고, 신장파열과 다른 부상으로 1년을 무기력하게 지내야 했다.
요란한 느낌이 들 정도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처칠의 태도에 대해 당시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극단적인 그에게서 위압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를 향해 공격의 화살을 겨누곤 했으며, 특히 개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처칠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처칠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1893년 학교를 졸업하고 협곡 다리에서 뛰어내린 상처에서 회복한 뒤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전 당시 18세였던 처칠은 영국 정치계에서 행세깨나 한다는 수많은 인사들을 알게 되었다. 모두 아버지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처칠은 이들의 행동에서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이들은 이따금 정치적 숙적 관계일 수밖에 없는데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무척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한 것이다. 반면에 공적인 자리, 즉 정치무대에서는 아주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처칠은 이 지도적 인물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행동규범과 태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완강하게 투쟁했고, 정치적 반대자가 퍼붓는 개인적 모욕까지도 의도적으로 감수했다. 하지만 논쟁이 끝나고 나면 서로 화해하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영국인들의 기질 속에 숨어 있는 페어플레이 정신도 처칠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다. 즉 일단 싸움이 붙었다 하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냉혹하게 싸우지만, 싸움이 끝나 승리를 거두었으면 아량을, 패배했으면 깨끗한 승복과 마땅한 존경심을 보이는 그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처칠에게 싸움은 경험을 축적하고 강인함을 얻는 것을 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개선하고 발전시키고 성장시켜 나갈 기회를 의미했다. 또 싸움은 최선의 것, 최고의 아이디어, 최선의 해결책을 찾기 위한 분투였다. 정치적 영역이든 군사적 영역이든 상관 없이 처칠은 싸우는 것을 좋아했다. 의외의 논쟁에서 자신의 입장을 밀어붙일 때도 그랬고, 히틀러의 공격에 맞서 국가에 총동원령을 내릴 때도 그랬으며, 말년에 뇌졸중의 후유증을 극복할 때도 그랬다. 싸움은 그에게 일종의 모험이자 끈기와 저항력을 시험하는 도전이었다.
그러니 싸움의 진창에 빠진 자신에 대한 연민은 딴 세상 이야기였다. 싸움에 대한 그의 태도에도 특정한 기본 입장이 있었다. "나는 싸울 때 비웃듯이 웃는 사람을 좋아한다." 물론 꾸민 비웃음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그대로 드러내는 비웃음일 경우에만 그렇다는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처칠은 타인의 성과를 진심으로 인정했으며, 그것으로 이익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1899년 전쟁 특파원으로 참전한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에서 잘 드러났는데, 당시 처칠이 타고 가던 장갑열차가 보어인들이 만들어둔 함정에 빠지자 얼굴에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던 기관사는 당장이라도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자 처칠은 이 난국만 타개하면 용맹함에 대한 대가로 표창을 받게 될 것이라며 설득했다. 결국 기관사는 다시 열차를 움직였고, 수많은 부상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 후 10년이 지나도록 군 당국에서 그 기관사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그 사이 내무장관이 된 처칠은 예전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나섰다. 당시의 기관사와 화부에게 용감한 시민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앨버트 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강력하게 힘을 쓴 것이다.
샤를 드골은 처칠을 보고 어떤 험한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일이 훌륭한 일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드골의 이 말은 처칠의 태도에 대한 강점과 약점을 잘 함축한다. 처칠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만 겨냥함으로써 자신의 위대한에 대한 발판을 스스로 마련했다.
처칠의 친구로서 입이 걸걸한 것으로 유명한 버컨헤드 경은 오직 위대한 것만을 생각하기에 처칠이 빠질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그가 제대로 판단했을 때는 더없이 훌륭하지만, 만일 그 판단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오, 하느님 맙소사!'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처칠을 오직 위대한 것만 생각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틀에 박힌 행정적 요구가 비록 식상하기는 하지만 위대한 행위에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았다. 전시(戰時) 총리로서 일할 당시 그의 일상업무는 문서교환과 끊임없는 공문서 작성, 엄격한 규율이 특징었다.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마음에 드는 일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처칠은 자신의 품행과 관련한 공개적인 공격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비치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폭음으로 세상을 떠난 버컨헤드 경처럼 평판이 좋지 않은 친구들에 관한 소문을 들어도 시큰둥해했고, 또 다른 친구 비버브룩 경의 치부 과정에 대해 의심스러운 말들이 무성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친구로서 남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 브렌던 브랙컨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껄껄거리며 즐거워하기까지 했다. 아내 클레멘타인이 이 소문을 추궁하자 그는 날짜를 헤아려보더니 자신이 아버지가 될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대답했다. 알려진 바로는 처칠은 단 한 번도 바람을 피운 적이 없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선의의 농담을 위해 아내의 의심까지 감수한 것이다.
이상, 처칠 스타일 태도가 차이를 만든다였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