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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하류지향] 공부를 혐오하는 아이들 "모르는 것이 있는 게 뭐 어때서?"

 

일본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고등학교에 걸쳐 대다수가 학교 공부를 혐오하고 공부에서

도피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 일본의 청소년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의욕적으로 공부에 열중했지만

지금은 가장 공부를 혐오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 청소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하류지향]의 저자 우치다 타츠루 교수는 1990년대부터 현격하게 학력이 떨어지는 원인을 찾아왔고,

그 결과 학력저하의 원인이 아이들의 나태함이나 교사들의 교육기술이 저하된 데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의 가슴 밑바닥에 노동주체가 아닌 소비주체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주로 공부, 배움이란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기 위한 포스팅입니다.

 

엉뚱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이따금 거리의 신호등에 따라 자동차들이 일제히 멈추거나 출발하고,
또 때로는 예상치 않은 트래픽이 생겨 누군가의 수신호에 따라 자동차들이 오가는 것을 볼 때면

사람들간의 <약속>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만약 파란불엔 차를 출발시키고 빨간불엔 정지하기로 한다는 약속이 없다면,

혹은 그 약속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얼마나 엄청난 혼란과 결과가 발생할지

누구나 충분히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공부나 배움이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함께 살아가기 위해,

나아가서는 예기치 않은 갖가지 사고에서 나 자신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약속들을

끊임없이 익히고 다지는 일의 일환이 아닌가 싶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뽐내며 살고 있지만,

공부나 배움을 통해 얻은 그런 약속들이 서로의 암묵하에 지켜지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동물의 세계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곳이 되리라는 건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공부하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자신만만한 신인류가 출현했다>며

통탄을 금치 못하는 일본인 교수가 있다. [하류지향]의 저자 우치다 타츠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저자가 말하는 ‘신인류’란 “왜 공부를 해야 하나요”라고 외치는 학생들, 그리고 “왜 직장에

다녀야 하나요?”, 즉 "왜 일을 해야만 하나요"라고 당당하게 묻는 젊은이들을 가리킨다.

즉 <공부로부터의 도피, 노동으로부터의 도피>가 이 책의 주제다.

 

 


하류지향

저자
우치다 타츠루 지음
출판사
열음사(주) | 2007-10-2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일본 젊은이들의 선택은 공부와 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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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고등학교에 걸쳐 대다수가 학교 공부를 혐오하고 공부에서

도피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 일본의 청소년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의욕적으로 공부에 열중했지만

지금은 가장 공부를 혐오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 청소년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저자는 1990년대부터 현격하게 학력이 떨어지는 원인을 찾아왔고, 그 결과 학력저하의 원인이

아이들의 나태함이나 교사들의 교육기술이 저하된 데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의 가슴 밑바닥에

노동주체가 아닌 소비주체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냈다.

 

출산율이 현저하게 떨어진 오늘날,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일명 '식스 포켓'((Six Pocket),

즉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라는 여섯 개의 주머니에서 용돈이 끊이지 않고 윤택하게 공급된다.

그래서 서너 살에 벌써 지폐를 들고 물건을 사러 가는 아이들이 있다. 

돈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법이어서 네 살짜리 어린아이가 돈을 쓰는 사람으로

나타났을 때는 아무도 그 사람의 나이나 식견, 사회적 능력 따위는 따지지 않는다.

 

이렇게 소비하는 일부터 사회활동을 시작한 아이들은 극히 인생 초기에 ‘돈의 전능성’을 경험한다.

아이들은 이때부터 어떤 상황에서도 일단 ‘사는 사람’으로 자기 소개를 하고,
무엇보다 상대와 대면하는 상황에서는 자기를 소비주체로 내세울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당연히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교육서비스를 사는 사람’이라는 위치를 무의식중에 선점하고자 한다. 
즉 소비를 하면서 “당신은 뭘 팔 건데? 마음에 들면 사주지”라는 말과

교실에서 “왜 공부를 해야 하나요?”라는 말은 동일한 것이다.

이렇게 “모르는 게 뭐가 문제죠?”라고 천연덕스럽게 되묻는 아이들, ‘온힘을 다해 아무 일도

안 하려고 하는’ 젊은이들은 학교와 직장을 편의점과 동일시하며, 그 결과 마치 상품을 고르듯

공부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선택도, 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한 거부도 당당하게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일본이 겪고 있는

교육과 노동의 문제이지만, 그 동안의 관례로 보면 예전에는 2,30년, 최근에는 3~5년 후,

짧게는 1-2년 만에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에서 나타난 현상과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니

마냥 방치하거나 외면할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저자가 이런 현상을 염려하는 것은 이것이 곧 ‘하류사회’로 하강해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인간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무지한 상태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숲속에서 늑대나 원숭이와 함께 자란 아이의 몸은 여느 아이들과 같지만

지능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인간은 인간 사회에서 길러지고 교육받아야만 참인간이다.
즉 인간 사회에서 살아야만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 사회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는

수십억 인간들이 만들어온 사회이자 장대한 지혜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지혜를 통해 성장하면서 인간이 된다.

즉 그 지혜를 느끼고, 자극을 받고, 대화하면서 인간답게 되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부’다.

 

즉 배움은 선인들이 민주화와 인권확대를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온 결과

어렵게 쟁취해 낸 역사적 성과다. 교육의 의무뿐만 아니라 근로의 의무도 

국민의 의무이자 권리로 헌법에도 규정하고 있다.

'일을 할지 말지는 내가 결정할 문제이지 법으로 규제당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도, 헌법에 규정하고 있는 것은

<노동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노동은 공동체의 존립의 근간이며 공공적인 행위이며,

개인의 결정에 따르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세계적 기업 소니의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의 베스트셀러 <유치원에서는 이미 늦다>에 따르면,

인간의 창조적 두뇌는 세 살까지 대부분의 골격이 정해진다고 한다.

즉 컴퓨터의 IC회로같이 뇌의 기본구조는 유아기에 이미 완성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회로가 채 만들어지기 전에는 아무리 지식을 집어넣으려 해도 소용이 없으므로 일리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컴퓨터는 기본 소프트(OS)만으로는 작동하지 않으며,

그 밖에 각종 어플리케이션 소프트가 필요하다.

즉 IC회로가 잘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수준이 다른 몇 개의 소프트가 있어야 하며,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컴퓨터는 그저 고물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소프트웨어란 공부에 의해 획득된 여러 가지 노하우(지혜나 지식)를 말한다.
즉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세 살까지 만들어진 창조성의 싹을 전혀 키워나갈 수가 없다.
이부카 마사루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공부의 중요성이다.

 

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있게

북쪽을 가리킨다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는 절대로 도착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 교통사고나 소송사건이 있어도 경찰이나 재판관이 무식하니 중재해 줄 수도 없다.
그뿐이 아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 무지한 상태로 있다면 독재정치나 괴상한 신흥종교가

인간을 지배하게 될 위험성도 있다. 실제로 캄보디아 같은 나라에서 국민들에게

되도록 공부를 가르치지 않는 우민정책을 쓰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