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독립운동가 박열과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가 선택한 길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은 이제훈이 주인공 박열 역을 맡았습니다. 이준익 감독도 그렇고, 배우 이제훈도 그렇고 모두 한껏 기대를 해도 좋을 만한 분들이기에 다음주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박열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미리 검색을 해보니, 마침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에서 관련 내용을 방송한 것이 있어 이를 바탕으로 박열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음 사진에서 보듯 실제인물 박열과 박열 역을 맡은 이제훈의 싱크로율이 꽤나 높아보입니다. 그리고 박열에게는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라는 일본인 아내가 있었는데, 자신으 조국인 일본을 향해 항일운동을 펼친 조선인 남자 박열을 사랑했던 가네코의 가슴아픈 사랑의 스토리도 함께 올립니다.
조선인 독립운동가 박열과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가 선택한 길
박열은 전통적인 양반 가문의 후손이었지만 경술국치 이후 가세가 기울어 매우 궁핍하게 살았다. 7세 때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고, 10세에는 함창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현재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것은 치욕이라며 학교를 뛰쳐나왔다.
고향 문경으로 돌아온 그는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적지 한가운데에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도쿄로 가서 신문배달이며 공장 직공,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등 궂은일을 전전하며 고학을 시작한다.
1926년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조선인 박열과 일본인 가네코는 옥중 혼인신고서를 작성한다. 가네코는 1903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고 어린시절을 조선에서 보낸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그녀는 결혼을 하지만 실패하고, 이후 학업에 뜻을 품고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원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특히 조선인 유학생들과 신분을 쌓았다.
어느 날 가네코는 조선인 유학생인 정우영의 하숙집에서 우연히 [조선청년]이라는 잡지를 보게 되고 거기에 실려 있는 많은 작품들 중 한 조선인이 쓴 시에 푹 빠지게 된다. 그 시를 쓴 사람은 바로 박열이었고 그 시의 제목은 <개새끼>였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 <개새끼>
이 시에 대한 감동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가네코는 정우영의 하숙집에서 박열을 만난다. 그리고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기성의 가치관에 저항하는 박열에게 깊은 신뢰와 사랑을 느낀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데, 이렇게 조선인 남자와 일본인 여자의 사랑이 시작된다.
하지만 박열은 가네코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흑도회, 흑우회 등의 조직을 결성해 항일운동을 했고, 일본 내 차별받는 조선인의 현실을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이렇듯 박열은 연인 가네코의 나라 일본에 대항하는 독립운동가였지만, 가네코는 박열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자신의 조국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이후 두 사람은 일본 경시청의 감시를 피해 항일운동을 계속해 나간다.
박열은 1923년 또 다른 항일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활동을 해나갔는데, 그해 9월 박열과 가네코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이 두 사람이 체포되기 직전 일본 관동지방에서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남긴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두 사람이 체포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일본 정부는 지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조선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는데,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집어넣었다!”는 끔찍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일본인들로 하여금 조선인들에게 강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했고, 이는 조선인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이것이 6천 명이 넘는 조선인이 억울하게 죽어간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이었다.
무자비한 대학살이 벌어지자 세계 곳곳에서는 무고한 조선인들을 죽인 데 격렬한 항의가 이어졌는데, 이에 난처해진 일본 정부는 이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야만 했고 그 희생양이 바로 박열과 가네코였다. 그들은 그 동안 항일단체 조직원이었던 박열과 가네코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일본 정부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두 사람을 잡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불령사 조직원을 취조하던 일본 경찰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조직원은 박열이 폭탄을 구입하려고 했다는 것을 밀고한 것이다. 그들은 박열이 단지 폭탄을 구입하려고 했다는 것만으로 그가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운다. 하지만 박열은 오히려 더 당당하게 취조에 응했고, 결국 일왕 암살 시도범으로 몰린다. 그리고 가네코 역시 박열에 대한 사랑으로 함께 계획했다고 진술함으로써 두 사람은 일왕 암살 시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다.
놀랍게도 박열은 재판 내내 조선의 예복을 입고 등장했고 조선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아내 가네코마저 하얀 비단저고리에 한복 치마를 입었는데, 이는 박열과 조선민족의 투쟁을 함께한다는 의지의 표명었다.
결국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맞섰던 두 사람은 1926년 2월 26일 사형선고를 받고 이치가와 형무소에 수용된다. 그 후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려 한다는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일본 정부는 일왕의 은총이라는 명목으로 두 사람을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려고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일왕을 인정하는의미라고 생각하고 이를 거부한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형무소로 이감되며 헤어지게 되었는데, 이감된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박열은 가네코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형무소가 발표한 가네코의 공식적인 사인은 자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체검안서에는 자살 수단이 표기돼 있지 않아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형무소 당국은 끝까지 가네코의 사망 상황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가네코가 세상을 떠난 후 22년 2개월을 더 복역한 박열은 1945년 해방이 된 후에야 석방된다. 1949년 한국으로 돌아온 박열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고, 안타깝게도 고향으로 돌아오지도 못한 채 1974년 70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는 매년 가네코의 기일이면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먹지도 않은 채 그녀의 넋을 기렸다고 한다. 이후 박열은 독립운동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남과 북에서 모두 훈장을 받았다.
조선인 박열을 사랑해 조선에 뼈를 묻고 바람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인 가네코는 이후 바라던 대로 조선에 있는 박열 가계의 선산에 묻힌다. 사랑하는 남자와 끝까지 뜻을 함께한 가네코를 회유하려 했던 일본인 형사가 재판에서 “왜 일본인인 당신이 조선인 편을 드느냐?”는 묻자 그녀는 “나는 박열을 사랑한다. 나는 그와 함께 죽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희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상, 조선인 독립운동가 박열과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가 선택한 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