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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좋은친구들 잘못된 의리와 빗나간 우정 그리고 의심

 

좋은친구들 잘못된 의리와 빗나간 우정 그리고 의심

 

 

"신부는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위 글은 미당 서정주님의 [신부]라는 산문시다. 짧은 시에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 중에는 한  번 맺은 혼약은 평생을 두고 지키도록 강요받은 옛 여인들의 애달픈 삶도 깃들어 있다. 자신을 오해하고 달아나버린 신랑을 4, 50년이 넘도록 기다리면서 신부는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을까? 아니, 자신이 오해받은 줄 알기는 했을까? 신랑이 뭐라고 말을 하고 떠난 것도 아니니, 필시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신랑이 돌아오길 기다렸을 신부가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인간들이 쉽사리 행하는 섣부른 오해가 한 여인을 너무나도 큰 불행에 빠뜨린 것이다. 아마 신부는 숱한 날들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는 신랑을 기다리면서 지옥을 경험했을 것이다.

 

개봉 당시 놓쳤던 지성, 주지훈, 이광수 주연의 영화 [좋은친구들]을 뒤늦게 보면서 머릿속에 내내 맴돌았던 것은 뜻밖에도 바로 이 서정주의 [신부]였다. 포스터의 카피처럼 "친구를 의심한 순간 지옥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맞는다면, 자신을 버리고 간 신랑 때문에 신부도 지옥을 경험했겠지만 반대로 신부를 의심한 신랑의 가슴속에서도 지옥의 문이 열렸을 게 분명하다. 애먼 의심을 받는 사람도 괴롭지만, 보통은 확실치도 않은 일로 상대를 의심하는 쪽이 더 고통받는 법이니 말이다.

 

좋은친구들 잘못된 의리와 빗나간 우정 그리고 의심

 

우발적인 사건으로 친구들간의 의리와 우정, 그리고 의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세 남자를 그린 범죄드라마 [좋은 친구들]은 기존의 범죄드라마에서 등장하게 마련인 조폭들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범죄에 연루되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이도윤 감독은 "개인의 선의가 상대방에게 최악의 상황을 초래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 개인의 선의라는 것이 범법행위를 동반했을 때 어떤 끔찍한 방향으로 치달아가는지 이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 

 

현태(지성), 인철(주지훈), 민수(이광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끈끈한 우정을 다져온 친구들이다. 특히 초등학교 졸업 무렵 뜻밖의 사고로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긴 사이이기에 여느 친구들보다 더 남다른 의리와 우정으로 똘똘뭉친 친구들로 살아간다. 이 중 소방관이 된 현태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각장애인 아내와 결혼해 귀여운 딸과 함께 성실한 삶을 꾸려가고 있고, 인철은 보험회사 직원이다. 그리고 민수는 세탁소를 운영하며 제 밥벌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위 이미지에서처럼 셋이 모여 파안대소하고 있는 이들의 이면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인철은 보험금을 노리는 가짜환자들을 만들어 뒷돈을 챙기는 짓을 줄곧 저지르고 있고 민수는 삶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흐르는 세월에 몸을 맡긴 채 좀비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생각도 못한 사건이 벌어지자 <모든 것을 의심하며 진실을 쫓는 남자 현태>는 친구 인철을 의심하게 되면서 지옥이 시작되는 경험을 한다. 사실 이 의심의 뿌리는 무려 17년 전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현태, 인철, 민수 세 친구는 산으로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다가 민수가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진다. 다리를 다친 민수를 데리고 산을 내려오던 중 폭설까지 내리기 시작해 오도가도 못할 위기에 처하지만, 다행히 오두막을 발견한 이들은 폭설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 몸을 누인다. 그리고 친구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눈속을 뚫고 달려내려간 인철 덕분에 현태와 민수는 자칫 잃었렸을지도 모를 소중한 목숨을 구한다. 말하자면 현태와 민수는 인철에게 목숨을 빚진 셈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사실 그때 현태는 자신과 민수가 잠든 사이에 급히 구조 요청을 하러 갔던 인철을 혼자만 살려고 달아난 것으로 의심하고는 민수를 데리고 죽을 힘을 다해 산을 내려오던 참이었다. 이때부터였던 것이다, 현태의 가슴속에 친구 인철을 의심하는 씨앗이 뿌려진 것은. 그리고 그 씨앗은 언제든 때가 되면 발아할 날만 기다리는 불행을 현태에게 안겨준다. 의심받는 사람보다 의심하는 사람 쪽이 더 고통받는 불행 말이다. 물론 절체절명의 순간이어서 판단이 흐려진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친구를 의심부터 먼저 한 것은 결코 <좋은 친구>라고는 할 수 없으니 스스로 선택한 불행이요 고통이지만 말이다.    

 

 

한편 <친구와의 의리도 자신의 야망도 지키고 싶었던 남자 인철>의 의리와 야망은 완전히 길을 잘못 짚은 의리와 야망이다. 불법도 불사하고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구렁텅이로 자신은 물론 친구를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도 정당해야 하는 법이건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자 하는 인철의 착각은 섶을 지고 불속을 뛰어드는 불나방 같다.

 

아무리 친구를 위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불법 성인오락실을 운영하는 친구(현태) 어머니와 화재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범죄를 공모할 생각을 하다니, 그 비뚤어진 인성 자체가 도무지 미덥질 못하다. 아들 친구와 범법행위를 도모하는 현태 어머니도 도저히 제정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철 역시 친구로부터 애먼 의심을 받는다 해도 달리 변명할 말도, 억울해할 자격도 없는 친구다. 현태가 인철에 대한 뿌리깊은 의심을 거두지 못한 것도 상당부분은 올바른 방법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인철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닐까. 

 

 

또 한 친구 <친구를 위해 모든 것을 건 남자 민수>는 일이 터지고 난 후 친구 인철을 위해 목숨을 걸 게 아니라 일이 터지기 전에 목숨을 걸고 친구의 범죄를 막았어야 옳았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화재사건을 일으키는 친구를 돕는 것을 의리와 우정으로 믿는 어리석음을 택한 민수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는 결국 의도치 않게 친구의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짓을 저지르고는 그 상황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아무리 친구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고 의리라 할지라도, 그것이 범죄행위일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그의 죽음을 마냥 동정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며 진실을 쫓는 남자 ‘현태’ 역은 다양한 장르를 통해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혀온 지성이 맡았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인 현태가 부모를 잃고 믿었던 친구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극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보여줄 수 있는 감정을 깊이있게 연기해 보고 싶었다”고 밝혔는데, 그 말처럼 한층 더 깊어진 연기력으로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의리도 야망도 지키고 싶었던 ‘인철’ 역을 맡은 주지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사회에 대한 열등감이나 성공에 대한 욕망을 인철을 통해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했는데, 실제로 이제까지 보여왔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극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고 몰입도를 높이는 입체적 인물을 잘 보여주었다, 주지훈이 연기를 아주 잘하는 배우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준 멋진 연기였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모든 것을 건 남자 ‘민수’ 역을 맡은 이광수는 기존에 보여졌던 유머러스한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밑바닥까지 내려간 민수의 감정을 여과없이 잘 표현해 냈다. 잘못된 의리와 빗나간 우정을 구분하지 못할 때 어떤 불행의 구렁텅이로 자신과 친구를 몰아갈 수 있는지를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로 잘 보여주었다. 특히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하루하루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피폐해져 가는 모습을 리얼하게 잘 표현해 주어서 그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느낌이었다.   

 

 

"서로가 전부였던 우린 친구였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진정한 친구의 의리와 우정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더불어 친구를 함부로 의심하는 마음의 지옥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 나아가 범죄의 길을 함께 걷는 것을 의리니 우정이니 하는 말로 호도하지 말라는 메시지도 마음깊이 새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불행은 누가 진정한 친구가 아닌지를 보여준다"는 명언을 통해 친구의 불행을 외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했지만, 친구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 범죄행위를 함께 도모해도 좋다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잘못된 의리와 빗나간 우정 그리고 의심은 영원히 함께해도 좋을 <좋은 친구들>을 잃게 할 뿐이다.

 

이상, 좋은친구들 잘못된 의리와 빗나간 우정 그리고 의심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