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로 보는 세상

[따뜻한 말 한마디]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을 구해야 되는 거냐구?

 

 

“내 아들이다. 밖에서 보니까 더 잘생겼다.

나이 잘 드는 남자 섹시한 건 20대 남자들 못 따라온다.
이걸 어떻게 젊은 남자애들이 흉내내니.

넌 좋겠다. 저런 남자가 네 남편이라서. 도대체 너 같은 팔자가 되려면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을 구해야 되는 거냐?”

 

위 대사는 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아들 재학(지진희)이 불륜을 저지른 것을

뻔히 알고도 같은 여자로서 며느리 미경(김지수)의 마음을 헤아려주지는 못할망정

제대로 염장을 지르는 시어머니 추여사(박정수)의 말이다.

 


 

<막>이란 말은 왠지 거부감이 느껴지는 단어다. 부사로 쓰이는 <막>이라는 단어도

<앞뒤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지하탄광의 막다른 곳이라는

뜻을 가진 <막장>에도 <막>이란 단어가 들어가 특정한 상황의 마지막 장에 다다른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그리고 인생을 갈 때까지 간 사람 또는 그러한 행위를 꾸며줄 때도 <막장>이란

말이 쓰이며, 요즘 흔히 말하는 <막장드라마>란 오직 시청률만을 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언행을 대놓고 하는 사람들을 떼거리로

출연시켜 욕하면서 보게 만드는 드라마를 말한다. 개콘의 <시청률의 제왕>이라는

코너에서도 보아서 알 수 있듯이 할 수 있는껏 막장 짓을 벌일수록 시청률이 쑥쑥 잘도 올라간다.

 

욕하면서 보는 건 싫어서 막장드라마로 불리는 드라마는 잘 안 보려고 하지만,

그래도 한 발 양보해서 막장드라마에도 순기능이 있다고 한다면,

등장인물들의 막장 짓을 보면서 “정말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혹은 행여나 저런 인간 비스무레한 짓이라도 절대 하지 말아야지” 하는

깨달음을 깊이 준다는 것이고, 그런 막가는 사람들이 곁에 없다는

행복 또한 새삼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통상 막장 짓은 못 배우고, 못 살고, 못났거나 못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인간 자체가 몹쓸사람이라기보다는 남달리 신산한 삶을

살아온 탓에 그런 막장 짓을 해도 왠지 이해를 해줘야 될 것 같은 사연이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가엾기도 해서 동정표를 사기도 한다.

 

반면에 잘 배우고 잘 살고 높은 교양을 코에 걸고 사는 듯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막장 짓은

동정할 여지가 없어서 그런지 몹시 불쾌하고, 대외적으로 저만 못한 사람들을 한꾸러미로 엮어

모욕을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모멸감마저 느껴진다.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추여사는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오는 시어머니를 마중나온

며느리 미경을 보자 대뜸 ‘사흘 굶은 씨엄씨 같은 얼굴’로 “날씨 더럽게 춥네”라고 말한다.
마치 날씨 추운 것조차 며느리 탓이라는 듯이 말이다.

 

 

‘사흘 굶은 씨엄씨 같은 얼굴’이 뭔가 하니, 날씨가 잔뜩 흐리고 우중충한 것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라고 하는데, 옛부터 고부갈등으로 조용할 날이 없던 우리나라의 대가족제도 아래에서

끼니 잇기도 어려운 살림에 시어머니가 사흘이나 굶었다면 그 얼굴이 어떠할지 안 봐도

가히 짐작이 가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어머니 추여사의 표정이 딱 그 뽄새다. 그리고는 자기가 씹던 껌을 뱉겠다고

입을 내밀고, 미경이 시어머니가 뱉은 껌을 손바닥으로 받아 휴지에 싸서 외투 주머니에 넣자 

작은 백조차 “무거워!” 하며 며느리에 맡긴다.

   

 

요즘 막장드라마 중의 막장드라마로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고,

그 막장 인물들 중에서도 단연코 막장인물로 선두를 달리는 <왕가네 식구들>의

이앙금 여사(김해숙)도 감히 발벗고 따라올 수 없는 막장시어머니의 갑질이다.

 

아무리 스스로 갑이라 여기고 있고 또 갑질을 하고 싶어서 못 견딜 것 같은

시어머니라 한들, 나 교양인입네 하고 뻐기는 듯 저렇듯 고상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어떻게

저런 막장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지 나도 모르게 몸에 전율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
이건 차라리 이앙금 여사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험한 말을 입에 담고, 

심지어 얼굴이고 몸이고 가리지 않고 마구 주먹질을 해대는 것보다 더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행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마중나온 아들 재학을 보는 순간 추여사의 얼굴은

사흘 굶은 씨엄씨상에서 환한 미소를 띤 천사의 얼굴로 변한다.

  

 

그리고는 “밖에서 보니까 더 잘생겼다. 나이 잘 드는 남자 섹시한 건 20대 남자들 못 따라온다.

이걸 어떻게 젊은 남자애들이 흉내내니”라는 말로 며느리의 부아를 지르는 것도 모자라

아들 뒤를 따라가면서 “넌 좋겠다. 저런 남자가 네 남편이라서. 도대체 너 같은 팔자가

되려면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을 구해야 되는 거냐?”며 속을 있는 대로 긁어놓는다.

 

이런 오만방자한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었다.

정말로 자신이 상대방의 자존심을 짓밟는 끔찍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난 내가 할 수 있는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야”라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상대방이 자신을 위해 스스로 알아서 해주는 거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사실 그런 사고방식이야말로 배우고 못 배우고와 상관 없는,

그리고 잘살고 못살고와 상관 없는 인간적인 무지의 소치에서

나오는 생각이고 행동인데 말이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이 타인에게 입힌 상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도, 반대로 상대방이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유야 여하간에 그런 <진짜 막장 시어머니>를 조용하고 차분한 태도로

수용하는 며느리 미경이 그저 놀라울 뿐이고, 그 속이 속일까 싶어 가슴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