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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인턴 앤 해서웨이 로버트 드 니로가 만든 디지로그 세상

 

인턴 앤 해서웨이 로버트 드 니로가 만든 디지로그 세상

 

 

올가을에는 블친님들이 포스팅해 준 꽃무릇을 원없이 보았습니다. 꽃무릇의 빛깔은 영화 [인턴]의 아름답고 젊은 여성 CEO 줄스 오스틴, 즉 앤 해서웨이가 입은 저 빨강 원피스와 꼭 닮았습니다. 몇 년 전 바람에 살랑이는 붉은 양귀비꽃이 가득한 들판을 보고는 그 매혹적인 자태에 푹 빠져든 적이 있었는데, 꽃무릇의 매력도 아름다움의 대명사인 양귀비 못지않은 듯합니다. 눈길 닿는 데까지 펼쳐진 붉은 꽃무릇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들 정도니까요.

 

추석 연휴 동안에 본 낸시 마이어스 감독의 [인턴]도 딱 그랬습니다. 낸시 마이어스는 왓 위민 원트, 로맨틱 홀리데이, 사랑은 너무 복잡해 등 말랑말랑한 멜로와 유쾌한 로코를 제작한 감독이기도 한데, [인턴]에서도 줄스와 함께 70세의 인턴 벤 휘태커, 즉 로버트 드니로가 훈훈한 인간미로 따스하고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밝기만 한 영화 속 세상이 요즘처럼 팍팍하고 각박한 삶의 현장에 두 발을 간신히 딛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추위에 언 손으로 간신히 성냥을 켜서 피워낸 환상의 세계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왜 좋은 영화를 보고 나서 비틀린 심사로 딴지를 거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영화 속 사람들이 보여주는 세상이 제겐 배부른 자들의 푸념쯤으로 여겨진 것만은 사실입니다. 

 

인턴 앤 해서웨이 로버트 드 니로가 만드는 디지로그 세상

 

'편도족'을 아시나요? 저도 얼마 전에야 알았는데, 실업 등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도시락으로 한 끼를 때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신조어라고 합니다. 예전에 파리를 여행하면서 어디든 발길 닿는 데마다 크고 작은 공원이 있고, 더욱이 그 공원 벤치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샌드위치며 바게트를 먹는 모습이 참 여유롭고 낭만적으로 보여서 부러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이드는 속모르는 소리 말라며, 프랑스도 불황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데다 물가가 너무 비싸서 제대로 된 점심식사를 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저렇게 음식점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공원 벤치에 앉아 간단히 점심을 때우는 경우가 많다는 거였습니다. 물론 공원에 나와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역시 무슨 일이든 내막도 모른 채 겉으로 잠깐 본 것만 가지고 함부로 말할 일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새삼 실감했었습니다.

 

모르면 몰라도, 저 영화 속 넓고 밝은 사무실도 직업이 없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꿔보는 그림의 떡일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더 저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러니까 골치아픈 일이 생겼다며 고민하는 모습들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망중한을 즐기는 신선놀음처럼 보였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민이라는 것이 <회사가 너무 잘나가 개인생활을 누릴 여유가 없어졌다>거나 퇴직 후 놀 만큼 놀고 쉴 만큼 쉬고 나니 뭔가 허전하고 무료해져서 <인턴이라도 해볼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사운영이 어려워져서 밤잠을 설치거나, 정리해고를 당한 후 재취업을 못해 거리를 방황하거나,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인턴도 감지덕지인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고민이라는 것이지요.

 

 

게다가 조금 더 심각한 사건이라고 해봐야 늙어가는 친정엄마의 잔소리가 너무 심한 것을 비난하는 메일을 잘못해서 직접 엄마에게 보내게 되고, 그 메일을 받아본 엄마가 충격을 받을까봐 염려한다거나, 잘나가는 아내 대신 주부 역할을 맡게 된 남편이 바쁜 아내와 함께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핑계삼아 다른 여자와 잠깐 한눈을 파는 일입니다. 하지만 친정엄마의 잔소리는 아무리 귀가 따갑다 해도 근본적으로 딸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복에 겨운 투정일 뿐입니다. 또 남편도 아내가 자신의 외도를 눈치채고는 남편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 CEO직을 내놓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회사까지 달려와 자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그만두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며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일단락지어집니다. 그러니 이런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들을 가지고 고민하는 모습들이 오늘이 불안하고 내일을 예측할 길 없는 사람들에겐 아이들 실소를 자아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삐딱선을 타고 들여다본 영화 [인턴]에 대한 감상입니다. 하지만 [인턴]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따로 있습니다. 아무리 삐딱한 시선으로 본다 한들 앤 해서웨이와 로버트 드 니로가 자신들을 보러 온 관객들에게 던져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모른 척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누설의 염려가 있으니 [인턴]의 홈피에 올라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앤 해서웨이 로버트 드 니로가 만든 디지로그 세상

 

 

잘나도 너무 잘났고, 잘나가도 너무 잘나가는 여성 CEO 줄스 오스틴 역의 앤 해서웨이입니다. 창업한 지 불과 1년 반 만에 직원이 무려 220명으로 증가할 만큼 성공한 줄스는 뛰어난 패션감각에 야근하는 직원까지 살뜰히 챙겨주는 따뜻한 마음, 그리고 불만을 터뜨리는 고객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박스포장까지 직접 해서 보내는 열정에 넘치는 아름다운 여성 경영자입니다. 

 

 

얼마나 잘나가는지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 줄스는 잠시도 쉴 틈이 없어서 분 단위로 미팅을 잡고 회의를 진행하며, 체력관리를 위한 시간을 따로 마련할 길이 없자 수평조직을 표방하며 한 층을 모두 개방해 버린 사무실 안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가며 보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나 인품으로나 여유로움과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는 벤 휘태커, 로버트 드니로가 등장합니다. 퇴직 후 요가, 요리, 화초 재배뿐 아니라 중국어도 배우러 다니는 등 아무튼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다 해봤는데도 왠지 삶에 구멍이 난 듯한 허전함이 느껴지자 그는 단지 그 구멍을 최대한 빨리 메우기 위한 목적으로 줄스의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갑니다. 특유의 친화력과 그 동안 축적해 온 연륜으로 그는 젊은 사람들의 크고 작은 고민을 대화나 지혜로 해결해 주면서 곧 여러 직원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는 인기남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줄스 역시 벤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자잘한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결국 인턴은 앤 해서웨이와 로버트 드 니로가 만들어내는 디지로그(Digilog) 세상입니다. 디지로그란 디지털(digital)과 아날로그(analog)의 합성어로 아날로그 사회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과도기, 혹은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첨단기술을 의미하는 말이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이화여대 명예교수 이어령 박사의 책 제목으로 더 유명해진 용어이기도 합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세상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긴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디지털 기술만으로는 21세기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나아가 디지털 기술의 더 큰 발전을 위해서라도 아날로그가 존중되고 풍부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장 좋은 디지털이란 감성적이고 따뜻하며 인간적인 것이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드 니로가 아날로그 세계를 대표하는 세대라면 앤 해서웨이는 디지털 세계를 대표하는 세대입니다. 처음에는 전혀 어울리기 힘들 것 같던 두 사람은 각자가 가진 강점을 서로에게 내어놓고 빈 구석을 채워나가면서 조화롭고 균형잡힌 삶을 만들어갑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디지털 세대와 나이들어 가는 아날로그 세대가 힘을 합쳐야만 조화와 균형이 잡히고, 그 속에서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채울 길 없는 행복과 평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날이 갈수록 좁혀들기는커녕 점점 더 넓어져만 가고 있는 간극으로 인해 소 닭 보듯하는 젊은 세대와 노년층이 함께 이 영화를 본다면 각자가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상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을 자극하는 단 하나의 사랑의 명약,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배려다"라는 메난드로스의 말을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언제 봐도 맑은 산소 같은 앤 해서웨이의 상큼한 미소와 나이가 들어서 오히려 더 중후한 멋을 풍기는 로버트 드 니로의 푸근한 미소를 본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자기 몫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로버트 드 니로처럼만 멋지게 늙어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도 슬쩍 곁들여봅니다. 

 

이상, 인턴 앤 해서웨이 로버트 드 니로가 만든 디지로그 세상이었습니다. 재미있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