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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사도 아버지 영조(송강호)에게 죽어서도 홀대받은 사도세자(유아인)

 

사도 아버지 영조(송강호)에게 죽어서도 홀대받은 사도세자(유아인)  

 

 

아버지와 아들은 흔히 적대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세상 많은 아버지들에게는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아들에게 가장 좋은 아버지는 요절한 아버지라는 말이 있듯이 남자들의 세계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혈연관계도 무색케 할 만큼 독립적이고 자립적이기 때문인 듯합니다.

 

아버지는 점점 더 성장해 가면서 자신을 치고 올라오는 아들을 경계하게 되고, 아들은 언제나 자기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아버지를 뒤쫓으면서 무시당하는 굴욕을 참다가 어느 순간 독립적인 정체성을 갖추었다 싶으면 드디어 때가 왔다 하는 심정으로 아버지에게 저항을 합니다. 다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그나마 아버지가 잘 다독여주면서 따뜻한 시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었으면 이 알력도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미움과 증오가 쌓일 대로 쌓이게 되면 결국 남보다도 못한 증오의 대상이 되어 둘 중 하나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게임에 돌입하게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역사적으로도 얼마 전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왕의 얼굴]에서 선조와 광해군의 관계가 그렇고, [화정]에서 인조와 소현세자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개봉한 송강호, 유아인 주연의 이준익 감독 영화 [사도]에서 비극적인 운명의 아버지와 아들로 만나 서로를 삼킬 듯한 증오심을 뿜어내는 영조와 사도세자가 또한 그렇습니다.

 

사도 아버지 영조(송강호)에게 죽어서도 홀대받은 사도세자(유아인)   

 

아들이 저지르고 다니는 잘못으로 인해 행여나 자신에게 누가 끼칠까봐 전전긍긍하던 영조는 그 아들이 사라져야만 자신의 어좌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들에게 자결하라고 명령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영조 같은 아버지 밑에서라면 어떤 아들도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을 만큼 가혹한 삶을 살아야 했던 사도세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미움이 극에 달했다 할지라도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게 하고, 마침내 숨을 거두자 개선가를 울리며 환궁하는 비정함의 끝판왕인 영조 같은 아버지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영조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터입니다. 하지만 부모에게서만 받을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에 들어야만 인정해 주는 조건적인 사랑의 결과는 늘 그렇듯이 상상을 뛰어넘는 충격적인  파멸을 부릅니다. 영화는 사도세자의 시선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따라가기 때문인 듯 사도세자가 광인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안타까움을 줍니다. 그리고 역사에 미치광이 세자로 기록된 사도세자가 미친 게 아니라, 기어이 아들이 죽는 꼴을 봐야만 두 발 뻗고 살겠다는 듯이 몽니를 부리는 영조야말로 미쳐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폐세자시켰던 아들이 죽은 후 다시 세자로 복위시키고,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思)>, 슬퍼하며 생각한다는 의미의 사도(思悼)라는 시호(諡號)를 주었다 한들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히려 왕이 될 운명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했을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만 했던 왕관의 무게가 그에게 얼마나 큰 짐으로 다가왔을까 안타깝기도 했구요.      

 

 

영화 [사도]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줄거리에 따르면, 재위기간 내내 왕위계승 정통성 논란에 시달린 영조는 학문과 예법에 있어 완벽한 왕이 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 세자만은 모두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길 바라지만, 기대와 달리 자꾸 어긋나는 세자에게 실망을 합니다. 어린시절 남다른 총명함으로 아버지 영조의 기쁨이 된 아들. 그 아들을 위해 책까지 만들어주던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예술과 무예에 뛰어나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닌 사도는 영조의 바람대로 완벽한 세자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다그치기만 하는 아버지를 점점 원망하게 됩니다.

 

 

조선 최초의 궁중광대 이야기를 다룬 [왕의 남자]로 천만관객을 동원했던 이준익 감독과 영조 역을 맡은 송강호, 사도세자 유아인, 혜경궁 홍씨 문근영, 사도세자의 어머니 전혜진, 대왕대비 김해숙 등 총동원된 일급배우들은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시종일관 무게감 있게 풀어내어 마치 새로운 사건을 보듯 진지함을 잃지 않고 스토리를 따라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약 250년 전 조선왕조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임오화변’에 대해 그 어떤 비극보다도 더 참혹한 실화”라며 ‘사도’ 이야기를 재조명한 이준익 감독은 ‘영조’와 ‘사도’, 그리고 ‘정조’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인과관계를 그려내고 싶었다고 합니다. 특히 남다른 총명함으로 영조를 기쁘게 한 사도의 어린시절부터 서로의 진심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대리청정과 두 사람의 갈등이 첨예해지는 ‘양위파동’,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가족들의 엇갈린 이해관계를 밀도있게 보여줌으로써 극적인 긴장감과 감성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고 했는데, 그 의도를 전혀 모자람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이준익 감독과 처음 작품을 함께 하게 된 송강호는 “[사도]의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 속 실재했던 비극이지만, 이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더해져 새롭게 재탄생했다”고 말했으며, 유아인은 “이준익 감독은 배우의 눈높이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배려심과 칼날같이 매서운 통찰력을 지닌 분이어서 신뢰를 바탕으로 온전히 촬영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온몸을 던져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송강호, 유아인 등 배우분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다음 글은 작가  임채영의 [조선의 추악한 배신자들]과 서울대 국문과 교수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을 참조해서 좀더 자세히 정리한 사도 아버지 영조의 희생양..살아서도 죽어서도 홀대받은 사도세자입니다. 사도세자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비행을 일삼던 광인으로 기록된 비운의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특별한 관심과 애정 속에서 성장했다. 특히 정성왕후 서씨의 총애가 컸다. 사도세자보다 훨씬 나이가 어렸던 정순왕후 김씨와 훨씬 나이가 많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와는 처음부터 사이가 좋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나이 차가 나는 어른을 모시기란 세자 내외로서도 곤욕이 아닐 수 없었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소론에 동정적이었다. 하지만 소론은 영조의 즉위를 끝까지 반대한 집단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노론 세상이었다. 사도세자는 무난히 대리청정을 하면서도 정치적인 선택에서 당대의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과 척을 지는 우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세자가 그대로 왕위를 계승할 경우 소론의 득세는 불보듯 뻔했다. 따라서 노론 입장에서 사도세자는 절대로 왕위에 올라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한 지 4년이 되어가던 무렵 모든 노론은 사도세자의 행적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문제는 어떻게 사도세자를 제거하느냐에 있었다.

 


이때 전면에 등장한 것이 경주김씨 일가였다. 노록벽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경주김씨는 풍산홍씨 집안과 함께 사도세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앞장섰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였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침소에 들 때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에 대해 있지도 않은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이간질했다. 처음에는 사도세자의 올곧은 충정을 믿던 영조도 자꾸 같은 말을 듣다 보니 사조세자를 의심하게 되었다.


사도세자 제거에는 정순왕후 김씨만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숙의 문씨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사도세자를 모함했고, 여기에 화완옹주까지 나서서 사도세자를 모함했다. 이들은 모두 친정이나 시댁이 노론벽파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하물며 혜경궁 홍씨의 부친, 사도세자에게는 장인이 되는 풍산홍씨 홍봉한까지 나서서 사도세자를 공격해 대니 사도세자로서는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이미 노인이 되어 새로운 계비를 얻은 영조는 정순왕후의 침소를 찾는 일이 많았다. 정순왕후는 그때마다 이른바 베갯머리송사를 했고, 그렇지 않아도 소론에 우호적인 세자의 행적이 못마땅하던 영조는 정순왕후의 거듭되는 간언에 마음을 흔들었다. 사도세자 폐위 작전은 완벽하게 진행되었고, 영조는 쌓이고 쌓인 분노를 터뜨리며 마침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말았다.

 

 

 왜 하필 뒤주인가?

 

사도세자 사건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것만으로도 충격적이지만,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는 점에서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도대체 왜 이런 가혹한 방법을 썼을까? 휘령전에 온 영조는 세자의 죄상을 밝힌 후 자결을 요구했다. 그래도 '작은 임금'이라 일반 죄수처런 처형할 수는 없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것이었다. 세자는 한동안 변명을 하기도 하고 죽지 못하겠다면 저항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영조의 굳은 뜻을 꺾지는 못했다. 

 

마침내 세자는 칼을 받아들고 목숨을 끊으려 고 했다. 그러나 호위군사를 뚫고 온 신하들이 칼을 빼앗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세자는 이번에는 옷을 찢어 목을 매려고 했지만 이 역시 곁에 있던 신하들이 묶은 것을 풀어 실패했다. 돌계단에 머리를 찧어 죽으려고도 했지만 죽을 수 없었고, 영조 역시 죽이려고 해도 죽일 길이 없었다. 누구도 감히 세자 몸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어쨌거나 명목상으로는 국정을 대리하는 조선 최고의 권력자였다. 비록 반역죄로 처벌받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더욱이 그의 아들(정조)은 이미 다음다음 왕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만큼 세자에 대한 충성심이 어떻든 신하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세자의 자결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뒤주 아이디어는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어영청의 뒤주가 오자 영조는 세자에게 그 안에 들어가라고 했다. 처음엔 들어가지 않겠다고 저항했지만 영조가 계속 강요하자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스스로 몸을 던져 뒤주로 들어가는 세자를 말릴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뒤주에 들어간 세자는 밤이 깊어지자 답답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뚱뚱한 체구에 원래부터 더위를 많이 탔던 터이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세자는 급기야 뒤주판을 차고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밖으로 나온 세자는 궁궐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나왔으니 안절부절 못한 것이다. 한편 세자가 뒤주 밖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다시 세자를 잡아 뒤주에 들게 했다. 그리고 다시는 판을 깨고 나오지 못하도록 두꺼운 널판을 덧대어 큰 못을 치고 뒤주를 동앗줄로 꽁꽁 묶은 다음 승문원으로 옮겼다. 마침내 뒤주는 세자의 관이 되어버렸다.

 

 

 죽어서도 홀대받은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제기되는 '놀라운 사실'은 영조가 아들을 죽일 뜻이 없었다는 것이다. 영조는 그저 가볍게 벌이나 주려고 세자를 뒤주에 가두었는데 세자가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자가 죽었다는 보고를 들은 영조는 몹시 슬퍼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러나 영조는 휘령전에 있던 뒤주를 꽁꽁 봉해서 승문원으로 옮겨놓고 백 명 남짓의 군사들에게 지키게 했다. 그러고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자신의 처소인 경희궁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매일 뒤주를 감시하게 했다. 그러다가 19일 세자가 거의 죽음에 이른 시점에서야 환궁을 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20일에 죽었다고 보는데, 죽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21일(1762년 7월 12일. 음력 윤 5월 21일)에야 뒤주를 열었다고 한다. 어쩌면 세자는 19일에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 즉 영조는 세자가 죽음에 다다른 것을 보고서야 자기 처소로 돌아간 것이다. 이런 전후사정을 볼때 영조가 세자를 죽일 뜻이 없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이 쓴 [이재난고(頤齋亂藁)] 등에 의하면 영조는 환궁하면서 개선가를 연주하게 했다고 한다. 자식을 죽여놓고는 마치 적국을 평정한 것처럼 승전가를 연주하게 한 것이다. 신하들이 극구 말리는데도 영조는 듣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향한 영조의 분노는 사후의 상례(喪禮)과정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사도세자의 발상이 있었던 21일 영조는 폐서자한 사도세자를 다시 세자의 지위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빈소를 세자시강원으로 하게 했다. 세자 대접을 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상례과정에서는 제대로 된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신하들에게 상복으로 옥색 천담복 (淺淡服)을 입게 했을 뿐 아니라 상복을 입는 달수도 크게 줄였다. 옥색 천담복은 3년상 후에 입는 옷으로 특별히 상복이라고 할 수 없는 옷이다. 십수년 대리청정을 한 세자의 상례에 신하들에게 그런 상복 같지 않은 상복을 입게 한 것이다.

 

더욱이 발인하는 날 어린 정조가 대궐 문 밖에서 아버지를 영결하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못하게 했다. 죄인인 아버지와 정조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시키려고 한 것이다. 영조의 가혹한 처사에 대해서는 영조실록에서 사관조차 그 부당함을 지적할 정도다. 기왕 복위를 시켰으면 상례도 지위에 맞게 해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조의 조치에 아무런 간언도 올리지 않은 대신들도 비판했다.

 

영조는 생전의 세자에게 그랫듯이 사후의 세자에게도 가혹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자식을 죽인 자신의 판단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일이 없다. 그럼에도 여기저기 소문에서는 후회가 언급되는 것은, 세자를 죽인 데 대해서는 후회가 없다 할지라도 죽음의 책임에서는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적어도 군주로서 신하들 앞에서는 아비로서 괴로운 척, 불편한 척, 안타까운 척이라도 해야 했을 터이니 말이다.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소지섭)다. 정조는 열한살 때 죄인이 되어 아버지께 비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졸지에 대역죄인의 아들이 된 그 날의 충격과 공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정조는 등극 초기에 대대적인 숙청을 벌인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개입했던 죽은 권신 김상로와 홍계희에게서는 그 명예와 지위를 빼앗았고, 영조의 총애를 받은 후궁 문녀 등에게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책임을 물었으며,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오만방자에게 행동했다 하여 흑산도로 유배를 보냈고, 외가의 작은할아버지 홍인환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은 등극을 저해했다고 해서 사사했다. 그리고 홍계희 후손 등이 주축이 된 역모사건을 적발하면셔 영조 때의 권세가를 완전히 재기불능읠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렇게 정조는 즉위 1년 만에 종전의 기듣득층을 모두 무너뜨리고 홍국영 등 동궁의 궁료를 중심으로 한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역사가 어김없이 되풀이된 것이다.

 

이상, 사도 아버지 영조(송강호)에게 죽어서도 홀대받은 사도세자(유아인)였습니다. 흥미롭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