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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화정 영창대군 비운의 왕자의 예정된 죽음

 

화정 영창대군 비운의 왕자의 예정된 죽음 

  

 

선조의 딸 정명공주의 기구한 일생을 다룬 드라마 화정에서 광해군(차승원)이 왕위에 오른 후 광해군의 형 임해군(최종환)은 원인 모를 죽음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자 인목대비(신은정)는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 언제 대군 처소에 들이닥칠까" 하며 선조의 적장자이자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영창대군(전진서)도 목숨이 위태롭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초조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래서 정명공주(정찬비)와 영창대군이 궐 안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정월 대보름날 몰래 궐 밖을 구경하러 나가 처소를 비우자 인목대비는 대뜸 광해군과 서인들이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에게 어떤 위해를 가한 게 아닌가 의심합니다. 그리고 지난날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광해군에게 그렇듯 쉽게 옥새를 넘겨주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합니다. 인목대비 자신과 정명공주, 영창대군을 잘 지켜줄 거라고  믿고 광해군이 보위에 오르도록 도왔던 것인데, 막상 왕좌에 앉은 광해군도 그렇고 서인세력과 대북파가 맞서고 있는 주변상황도 계속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화정 비운의 왕자 영창대군의 예정된 죽음

 

한편 여덟 살이 되기까지 궐 밖 세상을 본 적이 없었던 영창대군은 또다시 재미있고 흥미진진했던 궐 밖에서의 하루가 생각나 궁을 지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높은 담으로 올라가 바깥을 내다보다가 자칫 발을 헛디뎌 떨어질 뻔합니다. 그 순간 다행히 광해군이 나타나 영창대군을 붙잡아준 덕분에 가까스로 담에서 떨어질 뻔한 참사는 면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광해군인 것을 알고 영창대군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뒷걸음질치자 광해군은 "위험한 곳에 서려고 했구나. 너한텐 너무 높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그리고 겁에 질린 영창대군을 안타까움과 슬픔이 담긴 눈길로 바라보면서 "내가 무서우냐"며 "그래, 나도 그렇단다. 이렇게 작고 어린 네가 무섭다"고 덧붙입니다. 어렵사리 오른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서차자(庶次子) 광해군이 결국은 적장자(嫡長子) 영창대군을 사지로 몰아넣게 되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섬뜩한 장면입니다.

 

 

그 예고는 조만간 사실로 드러나 이이첨(정웅인)은 서인세력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날조된 박응서(朴應犀)의 고변서(告變書)를 광해군에게 올리며 영창대군과 서인세력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권합니다.

 

 

박응서의 고변서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담긴 서찰을 읽고 중신들이 자신을 몰아낼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을 알게 광해군은 살벌한 눈빛으로 이이첨의 권유를 받아들입니다. 곧이어 이이첨은 정명공주의 최종 부마 간택 당일 부원군 김제남을 위시한 서인세력들과 영창대군을 모조리 추포하며 비운의 왕자 영창대군의 예정된 죽음을 둘러싼 비극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아직 여덟 살밖에 안 된 어린 동생이 역모로 몰려 붙잡혀간 것을 알게 된 정명공주는 광해군에게로 달려가 영창을 살려달라면서 "그 아이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에요"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왕실에 어린아이는 없다. 죄없는 이도 없고. 허니 영창은 그 죄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차갑게 대답합니다.  

 

 

그리고 결국 영창대군은 "나도 안다 모두 들었어. 궐 문밖을 나서면 나를 죽일 것이라 하더라. 칼을 든 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하더라"하며 본능적으로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듯 서럽게 눈물을 쏟으며 강제로 유배길에 나서게 됩니다. 역사에 따르면, 이렇게 끌려간 영창대군은 강화 교동에 감금되어 있다가 다음해인 광해군 6년(1614)에 참혹하게 증살(蒸殺)당합니다. 방에 불길이 번지자 영창대군은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창살을 부여잡고 울부짖다가 기운이 다해 죽었고, 이이첨은 영창대군이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합니다. 단종과 더불어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참혹하게 생을 마감한 영창대군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이런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왕실에는 영창대군 외에도 조선왕조를 세운 후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다지기 위해 태종이 구축한 '적서(嫡庶)차별'과 '장자(長子)계승의 원칙' 때문에 폐위되어 불운한 삶을 살거나 목숨을 잃은 왕자들이 있습니다. <조선왕실 적장자 수난>을 다룬 역사학자 이준호의 [비운의 조선 프린스]에는 지나친 억압과 감시로 무너진 양녕대군, 성종과 운명이 뒤바뀐 월선대군과 제안대군, 부친의 견제로 불운을 맞은 소현세자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 중 <결코 왕이 될 수 없었던 적장자 영창대군>을 요약정리해 보았습니다. 비운의 왕자 영창대군을 둘러싼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드라마를 보면 좀더 몰입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드라마 화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준비된 비극의 주인공

 

선조 39년(1606) 3월 6일 이른 아침부터 조정에서는 느닷없는 대군 진하(進賀)의식의 거행 문제로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다. 영의정 유영경이 이끄는 소북파들이 세종대왕 때 평원대군(平原大君) 이임(李琳)과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의 탄생시 진하를 거행한 적이 있음을 내세우며 진하를 건의한 것이었더. 갓 태어난 대군에게 신하들이 진하의식을 행한 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군이 태어날 때마다 하던 의례도 아니었다. 게다가 진하의식의 예로 거론한 평원대군과 영응대군은 적장자인 왕세자(문종)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친동생(7남, 8남)에게 백관들이 올리는 하례였기에 왕세자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지만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후궁 소생인데다 장자도 아닌 광해군이 이미 왕세자로 책봉돼 있는 마당에 광해군보다 아홉 살 적은 계모 인목왕후에게서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났던 것이다. 적장자의 왕위승계 여부가 국왕의 정통성에 큰 흠집을 낼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상황을 고려하면 왕세자가 되지 못하는 적장자 대군이 태어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파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서차자인 왕세자 광해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정 백관들이 적장자인 영창대군에게 하례를 올리겠다고 하니 이는 왕세자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자 위협이었다. 더욱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선조마저 이를 지켜보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일말의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사태 수습에 나선 중신들의 반대로 논의가 흐지부지되면서 며칠을 끈 뒤 결국 날짜를 늦추어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고 간소하게 치르는 권정례(權停例)로 간신히 봉합이 되었다.


한편 광해군에게 이날 조정에서의 논쟁은 그간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갓난아기 영창대군이 언제든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처럼 영창대군 이의(李(㼁)는 탯줄에 묻은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조정 분란의 한가운데로 내몰리면서 왕세자 광해군의 강력한 정적이 되는 운명에 처한다. 적서차별이 엄격했던 조선왕실에 왕위계승 서열 1위인 적장자 영창대군이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제든 왕위 장자승계 시비의 불씨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폭풍 전야의 나날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광해군은 보좌에 올랐음에도 영창대군을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건강하게 커가는 영창대군이 광해군에게는 마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공포감 그 자체였을 것이다. 영창대군 또한 광해군 못지않게 지울 길 없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태어나서 두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은 영창대군으로서는 아버지 대신 응석을 부리고 싶은 큰형님 광해군의 매몰찬 태도에 슬퍼했으며 광해군이 친누나 정명공주에게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절망했다.

 

영창대군의 외가인 연암 김씨 집안 또한 언제 닥칠지 모를 멸문지화의 공포 속에 초조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중압감을 견디면서 어떻게든 이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흔적이 민인백(閔仁伯)이 쓴 [태천집(苔泉集)]에 나온다.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 사위인 서경주가 부원군 김제남에게 편지를 보내 “영창대군이 천연두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심하게 역병을 앓는 아이에게 어느 혈에다 침을 놓으면 죽지 않고 소경이 된다고 하니 반드시 그에 따라 침을 놓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제남은 아무 죄도 없는 대군을 어찌 장님으로 만들 수 있겠느냐며 끝내 따르지 않았다. 광해군의 반대를 뿌리치고 김제남과 사돈이 된 서경주가 김제남 못지않게 영창대군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자 후환이 걱정되어 짜낸 궁여지책이었는데, 만약 서경주의 제안대로 영창대군이 장님이 되었더라면 더 이상 왕위승계와 관련된 시비에 휘말리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모함으로 인해 생을 마친 영창대군


 

광해군 5년(1613) 4월 문경새재에서 일어난 강도살해사건의 범인 박응서 외 일곱 명이 체포되었다. 보고를 접한 이이첨은 즉시 한희길과 정항을 조용히 불러 일을 꾸밀 것을 사주했고 이에 한희길이 먼저 잡힌 박응서를 회유, “김제남의 주도하에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거짓고변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고 서양갑으로부터 거짓자백을 받아내 광해군의 친국까지 마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역모에 연루되었다고는 해도 이제 여덟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에게 죄를 묻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었던데다 여론도 전국적으로 들끓었던지라 광해군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칠 게 없었던 이이첨은 집요하게 광해군을 다그쳐 마침내 광해군 5년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궁궐 밖 민가에 구금시키는 데 성공했다. 광해군이 일단 한 발 양보하자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광해군 또한 영창대군이 역모사건과 무관한 것은 잘 알지만 그 사건을 기화로 돌이킬 수 없는 악연을 맺게 되었으니 장차 영창대군이 세상물정을 알게 될 때가 되면 앙심을 품고 무슨 일을 꾸밀지 장담하지 못하게 된 이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듬해 영창대군은 불에 타죽는 잔혹한 죽음을 당하고, 이이첨으로부터 병사했다는 거짓보고를 받은 광해군은 무참하게 살해당했을 어린 막내동생에 대한 연민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지시했다.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 겨우 아홉 살이었다. 그 후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영창대군은 관작이 복구되었다.

 

이상, 화정 영창대군 비운의 왕자의 예정된 죽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