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은 과연 실제로 존재했을까..위대한 바빌론
구약성서 창세기에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건설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전설의 탑인 바벨탑은 하늘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과 도전의 상징으로 여겨져 부정적인 신화로 그려져 왔습니다. EBS 다큐프라임에서는 [바벨탑 위대한 바빌론]을 통해 이 바벨탑이 고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또 과연 실제로 존재했는지 그 비밀을 알아보았습니다. 내용이 꽤 긴데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이야기들이어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올려봅니다. 전반부는 바벨탑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알아본 것입니다.
바벨탑은 과연 실제로 존재했을까..위대한 바빌론
기원전 597년 지중해 연안 예루살렘에 갑자기 수만 명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거대한 투석기까지 준비한 당시로서는 최고의 정예병들이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병사들은 높이 12미터의 성벽 위에서 강렬하게 저항했지만 결코 이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인구 9만의 예루살렘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유대인들의 성소인 솔로몬 성전도 무참히 파괴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난 2600년 동안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민족수난사의 첫장면이다.
이른바 바빌론 유수는 전쟁에 패한 유대 왕 여호아킴을 비롯해 수많은 귀족과 관료들이 바빌론으로 압송돼 간 사건이다. 이때 포로들을 끌고 간 신바빌론의 왕은 성경에 느브갓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네부카드네자르 2세였다.
수십 일 후 압송돼 간 유대인들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 왕이 건설한 어머어마한 도시를 보고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빌론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 건설된 유대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도시였다. 도시를 둘러싼 18미터 높이의 성벽과 신의 상징들로 채워진 성문, 도시 내부를 관통하는 대로와 15만 명의 시민을 품고 있는 크고 작은 주택들, 거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조성된 정원도 있었고 하늘이 닿을 듯 뻗어 있는 거대한 탑도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이 마천루의 도시가 좋아보일 리 없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최악의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성전을 파괴하고 동족을 포로로 끌고 간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바빌론에 관한 이야기들이 성경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벨, 즉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다. 성경에서 바벨탑은 신에 대적하려는 인간의 오만함을 상징한다. 그래서 완성될 수 없는 탑, 징벌받아야 마땅한 탑으로 묘사된다.
위 그림은 바벨탑의 교훈을 가장 잘 담고 있는 피테르 브뤼헬의 작품이다. 브뤼헬의 작품은 후기 중세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에 묘사된 바벨탑의 전형적인 예다. 물론 작품의 영감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기록되기 한참 전인 기원전 400년대 이곳을 방문햇던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것은 아직도 존재한다. 탑의 높이는 91미터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바벨탑은 중세 유럽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모험가들이 이 미지의 탑을 찾아 사막을 건너 바빌론이 있다는 오늘날의 이라크로 향했다. 그리고는 각기 자신이 본 것을 바벨탑이라고 전하면서 유럽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즉 18세기까지 여행자들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벽돌탑들을 성서 속의 바벨탑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바벨탑은 실제로 존재했을까? 다큐프라임 제작팀은 이라크 공군의 도움을 받아 그 진실을 추적해 보았는데, 아부다비를 출발한 지 약 30여 분 후 눈앞에 거대한 흙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라크 북부 사마라에 있는 이 탑은 탑 주위로 다섯 번이나 감아올려진 독특한 계단 때문에 흔히 달팽이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높이만 무려 52미터에 달한다. 그러나 이 탑은 바벨탑이 아니다. 지난 9세기 이슬람 압바스 왕조 때 건설된 말위야(Malwiya) 탑, 즉 이슬람 사원탑이다. 그런데도 과거 유럽의 모험가들은 종종 사마라에 있는 이 탑이 바벨탑일 것이라고 주장했고 유럽의 화가들은 그들의 주장과 성경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한때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번성했던 이라크 지역에는 수많은 석탑들이 존재하며 밝혀진 거대한 흙탑만 무려 58개다.
이곳은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 근처에 있는 초가잔빌(Choga Zanbil)에 있는 또 하나의 지구라트(Ziggurat)다. 기원전 1200년대에 지어진 엘람왕국의 신전탑니다. 지구라트란 고대 메소포타미어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집>이라는 뜻으로, 즉 하늘에 있는 신의 가르침을 받아내는 아주 성스러운 신전을 의미한다. 때문에 다른 어떤 건축물보다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최고의 기술력들이 동원되었다. 아치는 물론 출입을 통제하는문도 설치되고 그 내부에는 건설자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다.
이라크에 있는 58개의 지구라트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바그다드 외곽의 아칼쿠프(Aqur Quf) 지구라트는 기원전 1500년경에 건설되었다. 3000년 넘게 비바람에 풍화가 되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높이만도 57미터에 이르는데, 이로 인해 이 탑 역시 사마라에 있는 말위야 탑처럼 유럽인들에게 종종 바벨탑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이라크 바빌론 네부카드네자르박물관장 팔라 알주바위 박사는 “과거에는 독일의 유적발굴단이 이 아칼쿠프 지구라트가 바벨탑의 자리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었다. 그러나 독일 동방학회는 과학적 유적 발굴 이후 정확한 바벨탑의 위치는 우르, 아칼쿠프, 보르시파 지구라트가 아니라 바빌론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바벨탑이 바빌론에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당연함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 독일의 고고학자였던 로베르트 콜드웨이 박사다. 지하 20미터에 묻혀 있던 바빌론의 역사는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의 제자를 통해 지상으로 올라왔다.
1899년 이곳에 도착한 콜데바이는 13년 동안 발굴을 했고 바빌론의 성문이었던 이슈타르(Ishtar) 문과 왕궁, 성벽 등을 발굴해 냈다. 그 동안 전설로만 내려오던 바빌론을 실제 역사 속으로 불러낸 것이다. 이곳이 바로 땅속 22미터 속에서 발굴해 낸 이슈타르 문이다. 전쟁의 신 이슈타르 신의 이름을 딴 이 관문은 바빌론으로 들어가는 가장 큰 진입로였다.
당시 청색 벽돌 위에 수많은 신상(神像)들이 새겨져 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콜데바이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바벨탑만큼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된다. 주민들이 땅속에서 끊임없이 벽돌을 채취해 가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콜데바이는 이곳이 바벨탑의 자리일 거라고 직감했다. 콜데바이가 바벨탑의 자리라고 확신했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제작자들이 기대를 안고 찾아간 그곳은 곳곳에 잡풀만 무성한 작은 웅덩이에 불과했다. 도저히 바벨탑의 자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곳, 더구나 이곳은 이슈타르 문이나 왕궁이 있는 바빌론 중심지와도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다보자 전혀 달랐다. 거대한 사각형 모양의 건물터가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팔라 알주바위 박사는 "독일의 유적발굴단은 제1차 세계대전 초까지 바벨탑이 있던 자리를 발굴했는데 바벨탑의 기단은 네모난 형태의 것으로 확인됐다. 너비와 높이는 각각 91.5미터였다. 이들이 복원한 바벨탑 그림은 실제에 가장 가까웠고 이전의 유럽인들이 그린 그림들과는 매우 달랐다"고 말했다.
일찍이 그리스의 학자 헤로도토스는 바벨탑의 크기에 대해 가로와 세로 그리고 높이가 각각 180큐빗이라고 했다. 이것을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각각 90미터가 된다. 이는 콜데바위가 주장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크기가 불과 1.5미터밖에 나지 않는다.
콜데바이가 자신이 발견한 유물을 가지고 돌아온 독일 베를린 페르가몬박물관 소장고에는 지금도 콜데바이의 발굴 연구기록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온갖 신상들로 채워진 바빌론 이슈타르 문에 대한 각종 기록은 물론 여전히 미스터리 건축물로 알려져 있는 공중정원, 성벽과 왕궁, 신전을 비롯해 바벨탑에 대한 크기와 모양에 대한 기록도 있다. 위 그림이 콜데바이의 기록을 근거로 복원해 낸 바벨탑이다.
그런데 바벨탑에 대한 또 다른 근거가 프랑스에 있다. 에사길 타블렛이다. 바벨탑의 상세한 크기가 기록된 이 점토판은 바빌론에 있던 신전 에사길에서 발굴해 낸 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든 교과서였다. 고고학자이자 프랑스 아시리아학회 에르베르 르퀴롤 박사는 “에사길 타블렛은 공식적인 발굴을 통해 발견된 것이 아니라 19세기에 도굴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영국학자들이 이것을 봤는데 그 뒤로 다시 사라졌다가 이후 한 프랑스 개인 수집가가 이 타블렛을 수집했고, 1913년 프랑스 학자들이 이것을 발견해 루브르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종이가 없던 바빌론 시대 모든 교과서는 점토판이었다. 그런데 이 교과서에 바벨탑에 대한 크기가 문제로 출제돼 있었다. 그 밑면과 높이가 각각 91미터였다. 이로써 콜데바이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발굴지와 헤로도토스의 기록, 그리고 에사길 점토판의 기록이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확신하기에는 이르다. 이것이 언제 건설됐으며 정말로 바벨탑인지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의문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근거가 최근 영국 런던대학의 한 교수로부터 제기되었다. 고고학자인 런던대학 앤드류 조지 교수에 따르면 “15년 전에 발견된 또 다른 비석이 있다. 이것의 하단부는 많이 손생돼 있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관한 내용이 있고 지금은 노르웨이에 있다. 이 비석은 많이 손생됐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관한 진짜 기록임은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한다.
바벨탑의 의문을 풀어줄 결정적 증거인 이 석비에는 놀랍게도 탑의 모양은 물론 건설시기와 왕의 이름까지 들어 있었다. 폭 25센티미터, 높이 47센티미터의 작은 현무암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자세히 보면 수많은 문양과 글씨들이 돋을새김으로 빼곡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좌측 상단에 그려진 그림은 누가 봐도 탑의 문양이고 정면에 나 있는 계단을 비롯하여 모두 7층으로 구성된 석탑임이 분명하다.
이를 그 동안 에사길 타블렛을 근거로 상상해 본 탑과 비교해 보면 그 형태에서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석비에 들어 있는 탑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 정체가 역시 그 석비 좌측 상단에 영문으로 짧게 새겨져 있다.
에 테맨 앙키(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 이것은 당시 바빌론의 신 마르득이 거주하는 신전을 의미한다. 에 테멘 앙키는 수메르어이며 바빌론 사람들이 바빌론의 신전탑에 붙인 이름이다. 수메르어로 이름을 붙인 이유는 당시 수메르어가 고급언어였기 때문이다. 그 아래에는 지쿠라트라고 새겨져 있고 맨 하단에 있는 카 딩기 라키는 수메르어로 바빌루라고 읽는다. 즉 이것이 바로 바빌론에 있던 거대한 신전탑, 즉 바벨탑임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 석비에는 바벨탑의 건설자도 우측 상단에 그려져 있다. 바빌론의 왕을 상징하는 원뿔 모양의 왕관을 쓰고 서 있는 이 사람은 바로 네부카드네자르 2세다. 이 비석을 통해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벨탑을 만들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상, 바벨탑은 과연 실제로 존재했을까..위대한 바빌론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셧나요? 후반부에서는 그 거대한 바벨탑이 과연 어떻게 건설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