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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갑(甲) 양반

 

조선시대의 갑(甲) 양반

 

 

양반(兩班)은 본래 조정에서의 의식(儀式) 등이 치러질 때 참석하는 현직 관료들을 총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국왕은 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를 모방하여 의식 등에서 남쪽을 보고 관료들을 대했는데, 국왕을 향해 오른쪽, 즉 동쪽에 문관(文官)이 늘어서고 왼쪽, 즉 서쪽에 무관(武官)이 늘어서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양반의 반(班)은 열(列)의 의미이고, 양반은 두 가지 열, 즉 문관이 늘어서는 동반(東班)과 무관이 늘어서는 서반(西班)의 총칭인 것입니다. 한편 사회계층상으로 볼 때 양반은 수도 서울이나 그 주변에 대대로 거주하는 사람, 그리고 지방의 농촌에 거주하는 사람, 이렇게 두 유형이 있었는데, 전자를 재경양반(宰卿兩班) 혹은 경반(京班), 후자를 재지양반(在地兩班) 혹은 향반(鄕班)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사회적/정치적 특권을 장악했던 양반이 조선 초기에는 약 7퍼센트 정도였지만 조선 후기에는 거의 70퍼센트까지 증가했는데, EBS 역사채널e에서는 [조선시대의 갑(甲) 양반]을 통해 그 과정과 이유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양반이 아닌 자는 가죽신이나 도포를 입을 수 없었고, 양반집 앞에서는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가야 했다. 

 

 

또 길에서 양반을 만나면 길 가장자리로 비켜 고개를 조아리고 인사를 올려야 했다. 조선왕조 500년 임금 아래 가장 높은 신분이 바로 조선의 갑 양반이었던 것이다.

 

 

14세기 후반 신흥 무인세력과 함께 조선을 건국한 고려의 신진사대부들은 대부분 지방 중소지주 출신이자 성리학을 신봉하는 학자들로서 새나라 조선의 주요관직을 차지하게 된다. 각각 문반과 무반으로 구분되는 이들 관리를 통틀어 양반이라 불렀으며, 이들은 법적으로 양인에 속했다. 당시 조선의 신분제도는 법적으로 양인과 천인만을 구분하는 양천제(良賤制 )로 양인에는 양반과 중인, 상민(평민), 천인에는 노비와 백정 등이 포함되었다.

  

 

범죄자의 아들, 재혼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의 아들과 손자 그리고 천인을 제외하고 양인이라면 누구나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경제력을 갖추고 있는 양반가 자제들은 아무 걱정 없이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지만 농사꾼들은 양반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하루하루 생계를 잇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즉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양인들은 과거를 위해 공부할 여건을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지주나 관료가문의 자제들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양반들이 모두 부유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고 또 경제적 여유가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절대적 조건은 아니었지만 양인 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한 상민(평민)에 비해 양반 자제들의 합격률이 높은 것은 당연했고, 특히 4대조 안에 벼슬한 이가 없으면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양반들은 학문을 수양하여 관료가 되는 일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자연히 양반들은 생산활동보다 학업에 종사하며 관직과 토지를 독점해 갔고 '양반'은 관직을 뜻하기보다 '지배신분'을 의미하는 말로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자 신분제가 동요하기 시작했는데,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는 "사대부가 혹 평민이 되고 평민이 혹 사대부가 된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 국가 재정은 무너져 내렸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전쟁 중 공을 세우거나 곡식을 바친 평민과 천민에게 관직과 품계를 주어 양반으로 행세할 수 있게 하는 공명첩(免役帖)과 납속첩(納粟帖)이 등장했으며 오랜 세월 신분의 굴레에 얽매였던 중인과 서얼들이 관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한다.

 

 

박지원의 [양반전] 중에 "나는 아무리 부자라도 항상 비천(卑賤)하지 않느냐. 내가 장차 그의 양반을 사서 가져보겠다"는 글이 나오는 것처럼 돈을 주고서라도 양반을 사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반면에 권력다툼에서 밀리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일부 양반들은 '잔반'(殘班)으로 몰리기도 했다. 

 

잔반들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일반 농민층이나 천민층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허덕이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처럼 직접 농사를 짓거나, 서당의 훈장을 지내거나 풍수꾼으로 생계를 잇기도 했다. 잔반의 일부는 자신들을 소외시킨 정권에 대해 강력한 불만을 갖고 괘서를 내걸기도 했으며, 전봉준(全琫準) 같은 잔반은 농민층과 이해를 일치해서 정치적 변혁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일부 양반들은 여전히 권력과 재력을 독식했고 부역과 세금을 면제받으며 계속해서 재산을 축적해 갔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는 평민들은 계속 늘어갔다.

 

 

결국 조선 초 약 7퍼센트였던 양반의 비율은 조선 후기에는 약 70퍼센트까지 치솟게 된다.

 

 

제한된 소수가 권력과 재력을 독점하여 특혜를 세습하는 양반의 모습은 비단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이른바 '갑질'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존재한다. 

 

이상, 조선시대의 갑(甲) 양반에 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