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임진왜란과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鳥銃)
징비록..임진왜란과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鳥銃)
징비록..임진왜란과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鳥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조총(鳥銃)은 하늘을 나는 새도 능히 쏘아 맞혀 떨어뜨릴 수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조총은 초기에는 성능이 뛰어나지 못해서 한 발 쏘고 난 후 다시 발사하기 위한 장전시간이 10분여나 필요했습니다. 더욱이 화력도 강하지 않아 갑옷도 뚫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 지속적인 개선이 이루어지고 전투에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뛰어난 성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직전이었는데 당시 우수한 활과 대포를 보유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조총의 성능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마도 영주가 선물한 조총은 그대로 사장돼 있었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총의 장점을 깨닫고 1593년 이순신 장군이 제작하여 보급했다고 합니다. 드라마 징비록을 시청하면서 조총 발사 시연을 하는 장면을 보고 조총에 관해 좀더 정확한 사실을 알고 싶어 책을 읽어보았는데, 역사를 소재로 한 문학창작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도현신님의 [임진왜란, 잘못 알려진 상식 깨부수기]에 따르면 일본군의 조총의 위력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된 부분도 있는 것 같아 간략하게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징비록..임진왜란과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鳥銃)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기 2,3년 전인 1589년 일본의 사신으로 조선의 왕을 알현하러 온 대마도 영주 평의지와 승려 현소는 선조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진상한다.
그 중 하나가 일본군의 조총이었다.
그 후 선조는 조총을 사격해 보이는 자리를 갖는다. 그리고 조총의 총알이 날아가 화살도 뚫지 못했던 과녁을 뚫는 것을 보고 "저것이 왜놈들의 무기냐"며 몹시 놀란다.
그러자 동지사 신립(김형일)이 나서서 조총을 쏘라고 한 후 자신은 활을 쏘아 날린다. 여진족 토벌로 용맹을 떨친 신립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패전하고 자결한 무장이다.
신립이 쏜 화살이 세 발이나 날아가 과녁을 맞추기까지 화약을 재느라 조총을 쏘지 못하고 있자 신립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선조를 향해 "이곳이 전장터였다면 저 화살 중 하나가 저 포수의 숨통을 끊어놨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조총은 화약을 재고 발사하는 데까지 시간이 한참 걸리기 때문에 눈깜짝할 사이에 생과 사가 갈리는 곳이 전쟁터에서 사용하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초기의 조총은 그 위력이 화살보다 뛰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화살의 사거리는 평균 50미터에서 150미터였지만 조총은 겨우 50미터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살은 숙련된 궁수의 경우 1분에 수십 발도 가능한데 조총은 장전시간이 필요한 조총은 1분에 10발밖에 쏘지 못했다고 한다.
선조(김태우)는 신립의 말에 "동지사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다"면서 치하한다.
그러자 조총 발사 시연 자리에 함께 있던 류성룡(김상중)은 "조총은 일단 장전만 되면 어떤 과녁도 뚫을 수 있는 무서운 살상력을 가지고 있으니 결코 얕봐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한다. 류성룡의 말대로 조총의 가장 큰 장점은 관통력이었다.
하지만 신립은 그 말도 맞지만, 그렇다고 지레 겁먹을 것도 없다고 큰소리친다. 조총에 불을 붙이고 쏘는 데까지 한참이 걸리니 적이 조총을 쏴보기도 전에 자신이 이끄는 기마무대가 저들의 코앞에서 적장의 목을 칠 것이라는 호언장담이었다.
그러나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의 조총부대는 이런 단점을 보완한 뛰어난 전투능력을 갖춘 정예부대였다.
그들은 조총의 발사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는데, 병사들을 횡렬종대로 대형을 짜게 한 후 첫번째 줄이 조준해서 총을 쏘고 나면 그 다음 줄이 달려나가 총을 쏘고, 다시 그 다음 줄이 달려나가 총을 쏘는 발사방식으로 화약에 불을 붙이는 시간을 절약한 것이다.
그렇긴 해도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고자 하는 도현신님에 따르면 일본군 전체가 조총으로 무장한 것은 아니었기에 임진왜란 때 조선이 오직 조총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는 것은 과장된 면이 있는 듯하다.
■ 일본군 중 10퍼센트만이 조총으로 무장했다
조총
임진왜란을 다룬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일본군들 중 대부분이 조총으로 무장한 것처럼 묘사되고, 16세기의 화기인 조총이 마치 현대의 기관총처럼 1분에 수십 발의 총탄을 쏘아대는가 하면, 심지어는 조총을 가진 일본군이 조선군의 대열 속으로 뛰어들어가 개머리판을 휘둘러 조선군을 때려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하는데, 이런 설정들은 사실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조총은 '아퀴버스'(Arquebus)라고 불리는 것으로, 총에 부착된 심지에 불을 붙이고 둥그런 총탄을 총구에 직접 넣고 사격하는 식이었다. 이때 사용한 총탄은 오늘날처럼 뾰족한 형태가 아니라 콩알 같은 원형이어서 사정거리도 100미터밖에 안 되었다. 더군다나 조총은 탄환을 장전해서 발사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으며, 아무리 숙련된 사수라 해도 1분에 2발을 쏘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 이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총기는 비가 내리거나 강풍이 불면 총의 심지가 젖어버려서 사격을 할 수가 없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활동했던 일본군들은 비가 오면 조총을 쓸 수가 없어 당황했던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또한 일본군 전체 중 조총을 가진 비율은 10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일례로 1575년 다케다 가쓰요리 군을 맞아 조총을 사용해 승리를 거둔 오다 노부나가는 전 병력 3만 명 중 3천 명만이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국시대 영주들 중 가장 부유하다는 오다 노부나가조차도 3천 가량의 조총을 보유했을 뿐이다. 일본 전국의 총기 수가 3만 정이었으니 전체 비율로 보아도 10퍼센트 정도였다.
■ 유럽제 총기가 일본제 총기보다 훨씬 강력했다
또 한 가지 일본 조총과 관련해서 굳어진 상식이 있는데, 바로 '일본에서 제조한 조총이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유럽의 영주들은 일본제 조총을 앞다투어 비싼값에 사들였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이 세계 최고의 공업국이고 일본제품의 우수한 성능을 현실에서 체감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주장을 쉽게 믿어버린다.
하지만 애초에 일본의 조총은 자체적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었다. 1543년, 일본에 표류한 포르투갈인 선원이 남기고 간 조총 두 자루를 일본인들이 분해해서 다시 조립하고 이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조총을 전투에 도입하게 된 것이다. 16세기의 일본은 전국시대여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때이지만, 그런 사정은 유럽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은 일본이 평화기에 접어든 막부시대에도 끝없이 전쟁에 휩싸인 상태였다. 포르투갈인이 일본에 전해준 총기는 아퀴버스였다. 이후에도 막부시대까지 아퀴버스는 일본 총기의 주력이었다.
아퀴버스
하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아퀴버스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진 '머스킷'(Musket)이 널리 사용되었다. 머스킷은 최대 중량이 9킬로에 달하는 중화기로 5.5킬로인 아퀴버스보다 무거웠다. 머스킷의 주용도는 아퀴버스의 총탄을 막기 위해 당시 유럽에서 쓰이던 두꺼운 방탄갑옷인 아퀴버스 아머(Arquebus Armor)를 관통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머스킷은 아퀴버스보다 더 강력한 파괴력과 긴 사정거리를 가졌으며, 총기의 무게를 견디고 사격시에 반동으로 사수가 넘어지지 않도록 넓은 개머리판과 총의 받침대를 갖추었다.
머스킷
반대로 아퀴버스는 머스킷보다 관통력과 사정거리가 뒤떨어졌다. 물론 아퀴버스는 머스킷보다 가볍고 내구성과 휴대성이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머스킷보다 위력이 떨어져 우수한 병기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니 아퀴버스보다 훨씬 강력한 머스킷을 이미 대량으로 운용하고 있었던 유럽인들이 일본제 아퀴버스를 수입해서 썼을 리가 없다.
이상, 징비록..임진왜란과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鳥銃)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