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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을 살려라 역사채널e 위민정치를 펼쳤던 영조의 최대 국책사업 청계천 준천

 

청계천을 살려라 백성을 위한 위민정책을 펼쳤던

영조의 최대 국책사업, 청계천 준천-역사채널e

 

역사채널e 청계천을 살려라 백성을 위한 위민정책을 펼쳤던 영조의 최대 국책사업  청계천 준천 

 

 

'개천(開川)'이라고도 불렸던 청계천(淸溪川)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서울 도심으로 모인 물길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던 청계천은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피해가 컸기 때문에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시대부터 본격적인 정비가 시작되었습니다.

'개천(開川)은 '내를 파낸다'는 뜻으로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청계천을 '개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포스팅은 EBS 역사채널e에서 조선시대 백성을 위한 위민정책을 펼쳤던 임금 영조의

최대의 국책사업인 청계천 준천에 대해 알아보고 그 의미를 되짚어본 내용입니다. 

 

 

역사채널e 청계천을 살려라 단 57일 만에 청계천 준천사업을 성공시킨 영조의 비법

 

 

1421년(세종 3년) 6월 21일. 큰 비가 와서 서울에 하류가 막히자 집 75채가 떠내려가고

여기저기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붕에 올라가고 나무를 잡아

죽음을 면하기도 했지만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조선의 중심 한양을 관통하며 흐르는 삶의 기반이 된 물길, 개천 청계천.

그런데 한양을 둘러싼 네 개의 산에서 흘러온 물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지지 못하고

개천을 통해 강으로 흐르며 토사가 계속 쌓이자 장마 때면 자주 범람해서 백성의 피해가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홍수 피해를 막고 도시의 안정화를 위해 즉위 초인 1406~07년 청계천의 바닥을 넓히고

둑을 쌓는 등 처음으로 청계천을 정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고 다음해부터 대대적으로 정비했으며 광통교, 혜정교 등 돌다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영조대에 이르러 상업발달로 인구도시화가 심해져 한강인구(17만 2천 명)가 급증한데다

생활하수 및 오물의 증가로 개천의 오염이 심해지고, 무분별한 벌채로 홍수조절 기능을 상실하여

토사가 밀려와 매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자 영조는 크게 걱정을 하게 됩니다.

 

승정원일기에는 혜경궁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이 영조에게 하천 준설(준천)이 매우 시급함을  

고하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만약 홍수를 만나면 개천 주변의 집들이 떠내려가거나 사라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준천을 위한 필요인력은 최소 50만-100만 명, 필요재정 최소 수십만 냥 등 막대한 재정과 인력이

요구되는 대규모 사업이었지만, 1760년(경진년) 2월 18일, 영조는 준천사업을 단행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영조의 준천사업은 예상인력 최소 50만-100만 명이었지만 실제로는 약 22만 명만 

투여되었고, 재정도 최소 수십만 냥이 예상되었지만 약 5만 냥으로 이뤄낸 쾌거였습니다.

 

 


 

단 57일 만에 성공적으로 준천사업을 이끈 임금 영조의 비법은 "백성을 직접 만나 여론을 수집하고

소통한" 데 있었습니다. 1752년부터 준천 시행 전까지 영조는 광통교 주민과 한성부 노인,

유생들에게 "개천을 파는 것을 옳게 여기는 자는 앉고 옳지 않게 여기는 자는 서라"고 하여 

의견을 묻고, 문무관리들에게 계책을 묻는 등 백성에게 준천의 필요성을 알리고 합리적인

공사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무려 7년이라는 소통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한성부민 외에 각 시전의 상인, 승군, 멀리 제주도의 공인과 심지어 맹인까지 자원했고,

부역나온 백성은 모두 기쁜 마음으로 달려왔으며 도청(관료)들 역시 힘을 다하여 일을 추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조는 수시로 공사현장을 찾아가 격려하고 연회를 베풀어 백성의 노고를 치하했으며

준천으로 집이 헐린 백성을 보살폈고 불법가옥에도 보상을 해주어 공사에 따른 민폐를 최소화했습니다.

 

 

 

 

또 실업상태의 백성 5만여 명에게 약 35,000냥과 쌀 2,300석의 품삯(약 8억 원) 지급했습니다.

즉 준천은 빈민구제를 위한 일종의 구휼책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이렇게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실천해 온 서민군주 영조의 준천은 온 백성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협력으로 완성됩니다. 또 영조는 경진지평을 새긴 표석을 세수위를 재는 땅의 경계로 삼아

이후의 홍수 피해를 막을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공사의 전말을 기록한 준천사실을 편찬함으로써 물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지혜를 후대에까지 전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영조의 청계천 준천사업은 백성을 위한 임금의 마음과 이에 화답한 백성이 함께 이룬

진실한 소통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 청계천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중구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하천으로, 한강 수계에 속하며

중랑천의 지류다. 최장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 백운동 계곡이며, 남으로 흐르다가

청계광장 부근에서 중학천을 합치며 몸집을 키운다. 이곳에서 방향을 서쪽으로 틀어

서울의 전통적인 도심지를 가로지르다가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옆에서 중랑천으로 흘러든다.

 

'개천'이라는 이름이 '청계천'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이 시기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된 청계천은 1925년부터 '정비'라는 명목으로

지금의 종로구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 즉 백운동천·옥류동천·사직동천 등이 복개(覆蓋)되었고

1937년에는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 복개되었다. 1950년대 중반 전쟁이 끝난 후

청계천은 여전히 대표적인 낙후지역이었기 때문에 또다시 복개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서울 이곳저곳에서 취수한 물을 중류의 청계광장에서 하루에 40,000세제곱미터씩 인공적으로

방류하는 형태로 하천을 유지하고 있다. 발원지의 계곡은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청계광장에서 중랑천 합수머리까지의 중·하류 8.12km 구간은 서울시설공단의 관리하에 공원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