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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마르코 폴로 신대륙 탐험의 포문을 연 이탈리아 탐험가..동방견문록(세계 경이의 서)

 

마르코 폴로 신대륙 탐험의 포문을 연 이탈리아 탐험가 동방견문록(세계 경이의 서)

 

마르코폴로

 

 

지난달 영국 텔레그래프 등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동방견문록의 저자인 마르코 폴로

13세기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에 관한

14개의 양피지에서 알래스카 해안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지도가 발견됐는데, 미 의회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이 양피지 문서는 폴로의 딸  베렐라가 아버지의 편지를 토대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마르코 폴로가 아시아 대륙 동쪽 끝 캄차카반도에서 시리아 상인을 만났고, 베링해협을

항해하여 알래스카로 건너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문서가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면 폴로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보다 훨씬 먼저 신대륙을 발견한 셈이며 

베링해협도 덴마크 탐험가 비투스 베링보다 400여 년 앞서 발견한 셈이 됩니다.

 

오늘 포스팅은 아무도 해보려고 하지 않은 일에 맨 먼저 뛰어듦으로써 탐험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마르코 폴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르코폴로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년)는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동방견문록을 쓴 작가다.

그는 1271년 보석상인인 아버지 니콜로와 숙부 마테오를 따라 동방여행을 떠났다.

육로를 통해 중국 원나라에까지 간 후 1295년 베네치아로 돌아왔지만, 베네치아와 제노바 전쟁 때

포로로 잡혀 제노바 감옥에 투옥됐다.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 아시아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들려 주었는데, 이때 작가 루스티첼로가 자신의 여행담을 기록한 것이 바로

<세계 경이(驚異)의 서(書)>, 즉 동방견문록이다.

 

인쇄술이 도입된 후 서양에서는 한때 동방견문록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기도 했다.
대항해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는 동방에 가면 황금이 쌓여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그의 책은 서양인들에게 미지의 세계를 알려주는 지식의 보고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중국을 여행한 첫 유럽인은 아니었지만 글로 남긴 첫번째 인물이었다.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베니스에서 태어난 폴로는 15세 때 중국에서 돌아온 보석상인인

아버지가 전해준 동방의 신비로운 이야기와 몽골제국의 5대 대칸이자 원나라 초대 황제이며

칭기즈칸의 손자이기도 한 쿠빌라이 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단번에 반해버렸다.

 

 

쿠빌라이 칸 몽골제국의 제5대 대칸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

 

 

2년 후 폴로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행 배에 올랐다. 베니스에서 중국에 가는 데 무려 3년이나 걸렸다.

그들은 배를 타고 터키의 지중해연안 해변을 지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사막과 산, 강을 지나 어렵사리 도착했다. 쿠빌라이 칸은 어린 폴로를 좋아해서

반갑게 맞아줬을 뿐 아니라 중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렇게 폴로는 17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는 해군함장의 고문관으로 참전했다가 패했고 결국 제노바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

이 감옥에서 만난 사람이 모험소설 작가인 루스티첼로였다.

 

그는 중국에어 지낸 경험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중국에 오래 산 탓에 

글을 쓰는 데 그리 능숙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을 작가에게 쓰게 했고 

그 결과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은 동방견문록이 탄생했다. 이 책에는 그가 본 중국의 도시들과 동물들,

식물들, 만났던 사람들과 그들이 사용했던 화폐와 화약, 도자기 들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루스티첼로 모험소설 작가 

 

 

하지만 아직 동양에 가보지 못한 유렵 사람들은 폴로의 이야기를 믿고 싶어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폴로의 별명이 '백만'(일 밀리오네, il milione)이 되었을까.

그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백만'이라는 단어를 잘 썼기 때문에 부풀려서

이야기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별명이었다. 물론 과장된 측면이 있겠지만, 

그가 경험했던 세계의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채 쓰지 못햇다."

 

폴로는 눈을 감을 때까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억울할지도 모르겠지만 동방견문록에 대한 진위 여부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폴로가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탐험가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겪지도 않은 일을

떠벌린 허풍쟁이에 불과다하고 말해 왔다. 하지만 그가 남들이 보지도, 듣지도, 경험해 보지도 못한

세계에서 17년을 살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려 했던 노력만큼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폴로는 무려 7백여 년 전 인물이다. 그는 동방견문록에 개인적인 문제나 자신의 성격 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에 그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웅으로 미화시켰기에 더욱 그렇다. 실제로 마르코 폴로의 신화는 몇 세기 동안 널리 퍼졌고, 

소설가와 영화 제작자 및 극작가들에게 주제를 제공한 적도 많았다.


반면에 좀더 냉정한  비평가들은 당시의 중국 기록에 폴로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16~17세기에 활동한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리 마터우(利瑪竇)라는 이름으로,

19세기의 화가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는 랑시닝(郎世寧)으로 각각 이름이 남아 있지만 

폴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을 여행했으면서도 만리장성과 차,

극동지방의 표의문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점도 지적했다.


 

마르코 폴로가 팍스 몽골리카 때 동방을 여행한 것을 묘사한 카탈로냐 아틀라스를 확대한 것(위키백과)

 

 

그러나 논란의 여부를 떠나 폴로는 후대 사람들이 신대륙 탐험의 꿈을 갖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아무도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기지 않았을 때 여행기를 책으로 써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조차 폴로의 영향을 받았을 정도니 말이다.
또한 처음에는 무조건 비난했던 사람들도 세월이 흐른 뒤 중국에 가보고 나서야 그를 믿기 시작했다.

 

어떤 발전이나 성장을 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언제나 스스로 한계를 정하는 일이다.

마르코 폴로가 여러 가지 논란 속에서도 인정을 받는 이유는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을

맨 먼저 시작했다는 데 있다. 동방견문록의 일부 내용이 부풀려지고 과장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개발한 항로는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고, 자신이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얼마든지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 참조도서 내 인생을 바꿔준 위대한 명언(진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