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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비밀의 문 영조(한석규)의 맹의와 선위파동..평생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던 영조의 두 얼굴

 

비밀의 문 의궤살인사건

영조(한석규)의 맹의선위파동 그리고 평생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던 영조의 두 얼굴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다룬 비밀의 문 의궤살인사건에서는 

초반에 영조의 맹의와 선위파동에 대해 큰 관심이 쏠렸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비밀의 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맹의와 선위파동, 그리고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음으로 몰아넣은 영조가 

왜 그런 비정한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본 내용입니다.

비밀의 문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 비밀의 문 의궤살인사건..비운의 사도세자와 비정한 영조, 청사에 남을 왕비를 꿈꾼 혜경궁 홍씨

 

 

 

 맹의

드라마 비밀의 문에 등장하는 맹의란 영조(한석규)가 왕이 되기 전인 왕세제(왕의 아우) 시절

이복형 경종을 밀어내기 위해 노론의 영수 김택(김창완)과 결탁하겠다고 서약한 비밀문서를 말한다.

 

 

비밀의 문 의궤살인사건 맹의 영조(한석규)와 김택(김창완)의 결탁을 서약한 비밀문서

 

영조는 왕세제 시절 한밤중에 괴한의 침입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비밀의 문 의궤살인사건 왕세제였던 영조는 노회한 김택의 협박에 못 이겨 서명을 한다

 

그리고 뒤이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영조 앞에 노론의 영수 김택이 나타나 맹의를 내밀며 서약을 하라고 종용한다.

 

 

 

 

하지만 이 맹의는 역사적 배경에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상의 문서다. 비밀의 문 제작진이

맹의에 관해 설명한 말에 따르면 "영조가 경종을 물리치고 노론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는데,

노론과 영조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을까 했다"며 "맹의는 그들 사이에 오간 일종의 계약서다.

소론의 손에 들어가서도, 세자가 봐서도 안 되는 것이다. 노론 입장에서는 영조를 얽어매두는 족쇄이고

영조에게는 제발 없어졌으면 하는 물건"이었던 셈이다.

 

 

 

 

맹의 덕분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즉위 이후 줄곧 왕권강화를 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맹의가 알려지면 자신의 정통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을 알고 늘 불안해한다.

그리고 맹의 때문에 노론의 영수 김택에게 덜미를 잡혀 옴쭉달싹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곤 한다.

 

 

 

 

결국 영조는 어떻게 하면 이 맹의를 없애버릴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맹의가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승정원을 아예 불태워버린다.

 

 

 

 

그 후 영조는 맹의를 불태웠으니 이제 김택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사실 맹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온전히 보존돼 있었다. 그리고 이 맹의로 인해 피를 부르는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것으로 드라마가 전개되어 나간다.  

 

 

 선위파동

선위란 왕이 살아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뜻한다. 이 선위파동은

일시적으로 왕권을 강화해 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함부로 대리청정에 찬성하거나

반대에 소홀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숙청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선위는 왕 아래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의도가 강하며, 특히 영조에게 있어 선위파동은 정치적

책략의 의미가 컸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마음과 영의정 김택을 시험하기 위해 툭하면  선위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리고 사도세자 이선은 그때마다 석고대죄를 하며 선위를 거둬달라고 청한다.

 

 

 

 

영조가 처음 선위를 하겠다고 한 것은 사도세자 이선이 채 다섯 살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자다 말고 상궁에 업혀나온 이선은 영문도 모른 채 겁먹은 얼굴로 영조의 대전 밖에서 울을을 터뜨렸다.

드라마에서는 그 후 영조가 선위파동을 일으킬 때마다 성장해 가는 이선이 석고대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이선은 한겨울 눈밭에 덜덜 떨면서도 석고대죄를 해야 했다.

 

 

 

 

비밀의 문은 영조(한석규)와 노론의 영수 김택(김창완), 그리고 사도세자(이제훈)이 펼치는 한판승부다.

여기에 혜경궁 홍씨(박은빈)와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김명국)이 가세하고,

맹의를 숨겨가지고 가다가 살해당하는 신흥복(서진영)의 죽음을 쫓는 우참찬 박문수(이원종),

검계 나철주(김민종)과 세책방 주인이며 사설포교인 서지담(김유정)이 등장하면서 흥미를 더해가고 있다.

 

믿고 보는 명품배우 한석규의 광기마저 느껴지는 비정함과 비열함, 그리고 아비로서의 다정함과 

온화함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연기야 말할 것도 없지만, 전문배우가 아닌데도 늘 일품연기를 보여주는

김창완은 이 드라마에서도 '영조의 용상을 지배하는 군주 위의 권력. 가차없고 냉혹하며 비정한 성품.

그러나 이 모든 성정을 온후한 미소 뒤에 철저히 은폐해 도무지 속을 가늠할 수 없는 음흉하고 노회한 자'라는

인물평으로 소개된 노론의 영수 김택을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어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김택도 사실은 영조와 대립각을 세우는 흥미를 더하기 위한 가상인물이라고 한다.

영조의 머리 위에서 영조를 가지고 노는 듯한 김택의 냉혈동물을 연상케 하는 악랄함이

어떻게 빛을 발할지 자못 흥미롭다.  

 


 

 영조의 두 얼굴

 

과연 영조는 경종을 독살한 잔인한 왕이었을까?

아니면 당쟁에 휘말려 죄를 덮어쓴 불행한 왕이었을까?

 

영조는 붕당정치의 폐해를 막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고, 민생을 위해 개혁조치를 단행하는 등

학문과 문화의 부흥에 힘썼던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훌륭한 업적과 달리 한평생 두 가지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다음 글은 드라마 비밀의 문을 시청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알아본 것이다. (MBC신비한TV서프라이즈 참조) 

 

 

(이미지 캡처 MBC신비한TV서프라이즈)

 

 

영조의 두 가지 콤플렉스 중 하나는 어머니 숙빈 최씨 때문이었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는

궁궐의 나인 가운데에서도 가장 천한 무수리 신분이었는데, 왕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큰 결함이었다. 강고한 신분제 사회에서 왕으로서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신하들이 숙빈 최씨와 자신을 우습게 여긴다는 콤플렉스에 사로잡혔고, 

그 때문에 숙빈 최씨의 추존사업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영조를 옭아맨 또 하나의 콤플렉스는 이복형 경종의 불가사의한 죽음이었다.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어린시절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불운한 왕이었다.

영조는 숙종의 또 다른 후궁인 숙빈 최씨의 아들이었지만 경종과 영조는 우애가 깊었다.

아들이 없었던 경종이 사망한 후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훗날 영조는 수시로 자신과

경종과의 우애가 깊었음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

 

 

그런데 경종이 사망에 이른 것은 영조 때문이라는충격적인 주장이 제기되었다.

당시 영조는 병약한 경종의 병구완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경종의 식욕을

돋구기 위해 게장과 생감을 올렸다. 다행히 경종은 게장과 생감을 맛보고 식욕을 되찾았고

평소보다 많은 식사를 했다. 그런데 그날 밤 경종의 병세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가슴과 배가 조이듯이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한 것이다.

 

당황한 어의들이 약을 지어 올렸지만 복통과 설사는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그러자 영조는 또 다른 처방을 내놓았고,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먹인 그날 밤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결국 다음날 경종은 사망하고 말았다.
병석에 누운 지 20여 일 만의 일이었고 왕위에 오른 지 고작 4년 만의 일이었다.

 

 

조선 제20대 왕 경종

 

 

경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영조에게 의심의 눈길이 쏟아졌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었다.

 

게다가 독살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근거는 당시 첨예했던 정치적 상황이었다.
경종과 영조의 아버지 숙종이 재위했을 당시 조선은 심각한 당쟁을 겪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당쟁이 심화된 것은 장희빈의 사사 문제 때문이었다.

숙종이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겠다고 하자 당시 세자인 경종은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

세자의 간청을 외면하고 장희빈을 죽일 것을 주장했던 노론과 후일 왕위에 오른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소론으로 갈리게 된 것이다.


장희빈이 사사되고 숙종마저 사망하자 노론은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소론의 지지를 얻은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의 위기감은 극대화되었다. 장희빈의 사사를 주장했던 노론에게 경종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수세에 몰린 노론은 1721년 경종에 재위한 지 1년밖에 안 된 시점에

후계자 문제를 거론했다. 그런데 아들이 없었던 경종에게 왕위를 이을 사람은 영조뿐이었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

 

 

결국 노론은 당시 노론 측이었던 대비(인원왕후)를 통해 후계자를 정하라는 상소를 올린 지

하루 만에 파격적으로 영조의 왕세제 책봉을 성사시켰다. 즉 노론은 장희빈과 대립했던

숙빈 최씨의 아들 영조가 왕위를 잇게 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영조의 재위기간 내내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영조의 해명과 부인에도 불구하고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과연 영조는 경종을 독살한 잔인한 왕이었을까? 아니면 당쟁에 휘말려 죄를 덮어쓴 불행한 왕이었을까?

경종의 죽음은 현재까지도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