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눈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진 조선의 법궁 그 아픔과 파괴의 역사
EBS 역사채널e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의 대표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어떻게 훼철되었는지를 되돌아본 내용입입니다.
경복궁의 눈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진 조선의 법궁 그 아픔과 파괴의 역사
문화재청 경복궁 홈페이지에 따르면 경복궁은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으로, 북으로는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했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하여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습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시설,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공간이 조성되었고,,
또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 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습니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했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습니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부분은
궁궐의 핵심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돼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습니다.
경복궁의 눈물 총 509동이 40여 동으로, 무려 469동이나 사라져버렸다
19세기 말 경복공의 북궐도형(北闕圖形)에 도시된 건물 수는 총 509동, 6,806칸이었다고 합니다.
북궐도형이란 경복궁과 후원을 배치도 형식으로 표현한 도본을 말합니다.
이 복궐도형은 최근 경복궁을 복원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고증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남은 건물 수 총 40여 동, 857칸에 불과합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진 무려 469동이나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1395년(태조 4년) 9월 조선 창건과 함께 왕조의 위엄을 높이고 태평성대를 위해 새로운 도성을
계획한 태조는 도성의 중심에 조선 최초의 법궁인 경복궁을 세웁니다.
그러나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약 270년간 폐허로 남겨져 있다가
1865년 왕권 강화를 중시한 흥선대원군에 의해 더 크고 웅장하게 중건됩니다.
하지만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불운의 장소로서 방치되었으며,
주인을 잃은 경복궁은 많은 외국인의 관람지로 전락해 버립니다.
일요일 하루 동안 경복궁을 구경한 사람은 2,118명에 이르러 매일 수백 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915년 시정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 1925년 조선가금공진회,
1926년 조선박람회 등 1910년 일제강점 이후 경복궁에서 개최된 대규모 행사 속에서
일제의 계략이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즉 일본 문명의 우월성과 국권침탈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동시에 조선왕조의 권위와 전통을 부정함으로써
조선을 온전히 파괴하기 위해 일제가 그 제물로 삼은 것이 바로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이었던 것입니다.
1910년 전각 총 6,806칸 중 4,000여 칸이 경매, 1914년 자선당(資善堂), 비현각(丕顯閣) 등 15동,
문 9개소 등 경매 혹은 매각을 통해 훼손된 경복궁을 식민통치 성과의 전시장으로 사용했습니다.
홍문관(옛 집현전), 세자의 집무실인 비현각은 각각 남산 ‘화월병장’과 장충동 ‘남산장’으로 팔려
일본 기생집으로 이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기생집에 있는 크고 장대한 조선식 건물들은
경복궁에서 옮겨세운 것이 많다고 합니다.
문무의 과거장이었던 융문당(隆文堂), 융무당(隆武堂)은 각각 ‘법당’, ‘객전’ 등 일본계 사찰로 변용되었고,
선대 임금의 어진(御眞)을 모시던 선원전(璿源殿 )은 이토 히로부미 사찰, 박문사의 일부로 쓰였습니다.
어진은 임금의 얼굴을 그린 그림과 사진을 말하고, 선원전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을 말합니다.
특히 동궁 자선당은 오쿠라 키하치의 일본 집으로 반출되어 사설 미술관 조선관으로 잔존해 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그을린 석축만 남은 채 1996년 경복궁 뒤뜰로 돌아왔습니다.
경복궁 파괴로 노린 일본의 최종 목표는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건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일제의 조선통치권 권력의 상징으로,
만인이 볼 수 있는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철거를 계획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민예운동을 일으킨 사상가이자 연구가, 미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없애버리려는 한 조선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통해 "조선건축의 대표이며 규법이며 정신이 아닌가.
예술, 도시, 이 민족을 위해 경복궁을 구하고 세우라"고 일갈합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1924년 서울에 조선 민속미술관을 세우고 이조 도자기 전람회를 개최했으며
한국의 전통미술과 공예품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이에 대해 평론도 하고 수집도 하면서
한국의 미와 더불어 한국 민족의 특성을 심도있게 분석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광화문은 조선인과 일부 일본인 등의 반발로 경복궁 동문 옆으로 이건하고,
광화문이 있었던 자리는 조선총독부 광장으로써 각종 통치행사의 장이 됩니다.
철거, 매각, 변용, 반출 등 끊임없이 자행된 일제의 경복궁 파괴는
우리 민족의 혼을 뿌리부터 말살시키기 위한 음모였습니다.
경복궁 복원사업은 1차는 1990년-2010년에 이루어졌고, 2차는 2011년-2030년에 완료될 예정입니다.
1990년부터 5단계로 진행된 경복궁 복원사업사에 따라 광화문 등 고종 당시에
지어진 건물의 40퍼센트가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됐습니다. 역사와 선조들의 숨결이
담겨 있는 경북궁의 관람시간은 9월 1일부터 10월까지는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입장마감은
오후 5시까지입니다. 그리고 11월과 12월은 관람시간이 오후 5시이고 입장마감은 4시입니다.
야간개장은 저녁 7시부터 밤 10시까지이며,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야간개장 시간 동안은
관람 인원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개방구역은 근정전, 경회루 권역이며, 야간개장을 하는 동안은
고궁 박물관도 밤 10시까지 무료로 개방합니다. 정기휴뮤일은 매주 화요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