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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보는 세상

마음의 벽 천양희 마음의 벽을 쌓는 사람들의 4가지 타입 / 죄수생활 게임

 

이 세상 최고의 일은 벽에다 문을 내는 것이다.

-비노바 바베

 

오늘 소개하는 시는 천양희님의 <마음의 벽>이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벽은 저 혼자 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며, 다 사람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마음을 탁 튼다면, 마음이 만든 벽쯤이야 허물기 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불어 벽창호(壁窓戶)와 벽창호(碧昌牛)의 차이, 그리고 공문선님의 [통쾌한 대화법] 중 

마음의 벽을 쌓는 사람들의 4가지 타입과 죄수생활 게임에 대한 글도 흥미로워서 함께 올립니다.

 


 

침묵의 소리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곧고 단단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나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한 가지가 되지 못하고
자꾸 나누어지는 걸까
말로는 함께 살자면서 살기는 따로따로다

 

사람의 에고(ego)가 은행 열매보다 더 단단한 것일까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다
그 단단함이 사람 사이의 벽을 만든다

벽이 있는 한, 한가지로 함께 잘 살기란 더 어려워지는 법이다

 

나무도 가을 나무껍질이 두꺼우면 겨울이 더 춥다고 한다
사람 사이의 벽도 너무 높고 두터우면
그곳은 늘 그늘이 지고 추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벽은 저 혼자 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 사람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을 탁 튼다면 마음이 만든 벽쯤이야
허물기 쉽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천양희 <마음의 벽>, [사람이 되어야지 뭐가 중요해] 중에서 

 

 

 

 

벽창호 아시지요?

미련하고 고집만 들입다 센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좀 의아해했던 게 있습니다.

벽창호라면 벽에 낸 창문을 말하는 것인데, 벽이라면 모를까,

벽에 창문을 낸 거라면 그렇게 앞뒤 꽉 막힌 사람은 아닐 텐데

왜 고집퉁이를 벽창호라고 할까 싶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최근 우연히 제가 알고 있던 벽창호가 사실은 벽창호(壁窓戶)가 아니라

벽창호(碧昌牛)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벽창호는 원래 벽창호(碧昌牛)입니다.

벽창우는 평안북도 벽동(碧潼)과 창성(昌城) 지방의 크고 억센 소를 가리키는데,

이 소가 어찌나 힘이 세고 고집불퉁인지 주인도 여간해서는 다루기가 쉽지 않아 생긴 말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벽창우라는 말이 생기게 된 진짜 이유는 벽동과 창성의 소가 성질이

워낙 거칠고 억센 탓도 있지만, 사실은 지역마다 소를 부르는 말이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소를 끌면서 '이랴이랴', '워워'하는 말들이 지방에 따라 조금씩 그 억양과 어투가 다른데,

다른 지방 사람이 소를 끌면 소가 제대로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해 버티면서 말을 듣지 않습니다.

따라서 남쪽지방에 사는 사람이 와서 벽동과 창성지방의 소를 끌고 가려면

당연히 고생스럽고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사람과 소 사이에 세워진 벽을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사람과 소 사이든, 아니면 사람과 사람 사이든 벽이 가로막혀 있으면

벽창호가 되는 건 시간문제일 듯합니다.

 

 

 

 

[통쾌한 대화법]의 저자 공문선님은 벽을 쌓고 그 속에 숨어버리는 사람들의 타입을

네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마음의 벽을 쌓는 사람들의 4가지 타입

 

첫째는 벽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타입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벽은 허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벽을 허물라고 요구합니다.
흔히 아이들이 싸우면 어른들은 억지로라도 화해를 시키고 악수를 하라고 강요하지만,
그러한 제스처는 겉모습일 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벽이없어 보이지만, 안으로는 더욱 더 두꺼운 벽이 쌓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권위나 지위의 벽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타입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나이가 몇이냐? 어른에게 이렇게 대들어도 되느냐”는 식으로 말합니다.

여성과 싸우다가 “여자가 왜 이래?”라며 윽박지르는 남자들은 대부분 이 타입에 속합니다.
특히 이들은 아예 벽을 허물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셋째는 자신의 벽을 다른 사람에게 열어달라고 호소하는 타입입니다.
이 사람들은 가짜 벽을 먼저 열어보압니다. 그런 다음 상대가 벽을 열면 철저히

이용하는 다중인격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으므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넷째는 자기주관에 따른 이분법적 사고가 강한 유형으로 타인의 벽만 탓하는 타입입니다.

흔히 자식이 마음을 안 열기 때문에 대화가 안 된다고 말하는 부모들이 이 유형에 속하며,

아이가 마음의 벽을 열고 자신을 내보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야단을 치는 부모들도 이 유형입니다.

 

 

 

 

어떤 타입이든 벽 안에 숨어든 사람들은 자신의 벽은 열지 않고 상대의 벽만

열어달라고 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조직사회에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기준이나 규졍 때문에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커뮤니케이션 벽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계급에 의해 전달되는 커뮤니케이션은 옳고 그름과 잘잘못이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단지 일방적인 전달과 상사가 원하는 반응만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직사회에서의 이러한 문제를 파헤치기 위해 ‘죄수생활 게임’ 이라는 실험이 행해졌는데,
이 실험은 2001년 독일의 올리버 히르쉬비겔 감독에 의헤 <익스페리먼트>(Das Experiment라는

영화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죄수생활 게임

실험을 위해 20명의 대학생들이 죄수생활 게임에 참가했다.
실험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학생들은 죄수와 간수의 두 가지 역할 중

하나를 무작위로 선택해야 했다.
죄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체포되어 학교에 마련된

모의경찰서로 호송된 다음 나체로 수색을 당하고 지문을 찍고

방역을 실시한 후 지하실 독방에 감금되었다.

 

실험참가자들은 자기가 맡은 역할에 대해 어떻게게 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고,

단지 간수들만 물리적 폭력 없이 법과 질서를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처음에는 간수 역할과 죄수 역할을 하는 사람들 모두 장난스럽게 실험에 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간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포악하고 거만하고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그들은 모든 죄수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규칙에 맹목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소한 불복종에도 맨손으로 화장실 청소하기 같은 치욕적인 처벌을 내리거나,

먹고 잠자고 씻는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는 치사한 벌로 죄수들을 다스렸다.

간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모두 권위적으로 변하고

권력남용에 몰입했으며 그 자체를 즐겼던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죄수들은 처음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간수들의 규칙을 수용했지만,

서서히 규칙이 많아지고 학대가 시작되자

점점 심리적으로 쇠약해지면서 수동적으로 변해 갔다.

그 중에서 네 명의 죄수는 4일 만에 흐느껴 울거나 분노를 삭이지 못했고

심각한 의시소침과 심리적 전신발진으로 실험을 포기해야 했다.

 

이 실험은 원래 2주일간 계속되는 것으로 계획되었지만,

참가자들의 심리적인 변화 징후 때문에 6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벽은 어쩌면 스스로 모든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편견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진실일까?

 

또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판단하고 그 판단을 신뢰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올바른 것일까?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도 있을 것이라며 

쉽게 결론짓고 마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진실을 파고들다 보면 이런 물음에 망설여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벽이 생깁니다.

그 벽은 유리창처럼 속이 다 보이는 것 같지만, 실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벽입니다.
보이지 않는 벽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 벽을 허물어야 가까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