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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존더코만도..사울의 아들 / 그레이 존

존더코만도..사울의 아들 / 그레이 존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는 유대인들이 끌려간 강제수용소에서 가스실로 가는 유대인들을 안심시키거나 가스실에서 타죽은 시신을 강에 버리는 일을 한 사람들로, 일명 '시체처리반'으로 불렸습니다. 등에 붉은 ‘X’가 그려진 옷을 입은 그들은 여느 여느 유대인들과 달리 자유롭게 수용소 안을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은 불과 4개월, 즉 동족인 유대인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대가로 겨우 넉 달의 삶을 유예받을 뿐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는 꽤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울의 아들][그레이 존]은 이 존더코만도에 관한 스토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어서 간략한 줄거리와 후기를 포스팅해 보았습니다.

 

존더코만도..사울의 아들 / 그레이 존

 

사울의 아들(2016년 개봉) 라즐로 네메스 감독/게자 뢰리히/라벤테 몰나르  

 

시체처리반으로 일하던 남자 앞에 아들의 주검이 도착했다. 나치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시체들을 처리하기 위한 비밀 작업반이 있었는데, ‘존더코만도’라고 불리던 이들은 X자 표시가 된 작업복을 입고 묵묵히 나치가 시키는 대로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존더코만도인 사울(게자 뢰리히)은 어린 아들의 주검을 맞게 된다. 처리해야 할 산더미 같은 시체들 속에서 아들을 빼낸 그는 랍비를 찾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기로 결심한다.

 

존더코만도..사울의 아들 / 그레이 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관련 영화나 책을 읽을 때마다 늘 드는 생각은, 대체 히틀러는 무슨 생각으로 유대인이라는 민족을 남김없이 말살시키려 했을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스스로 아리안족이 우수한 인종이라고 생각했다 한들, 단지 그 이유로 다른 인종을 그토록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서다. 역사를 초월해 반드시 처단해야 할 사람이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히틀러다. 세기의 싸이코패스.

 

 

참으로 비인간적인 나치들. 자신들이 죽인 유대인들의 시체를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처리하도록 시키다니.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다.

 

존더코만도. 일명 시체처리반. 지금은 시체처리반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질긴 목숨으로 동족들의 시체를 처리하지만, 그들 또한 이윽고는 다른 시체처리반이 그 뒤처리를 해줄 시체로 변할 게 뻔하다. 

 

그래서였을까? 존더코만도 사울은 갑자기 유대법에 따른 장례를 고집한다. 아들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실은 그의 아들인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 그럼에도 그가 랍비가 이끄는 제대로 된 장례를 고집했던 것은 자신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어서였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렇게 개돼지처럼 죽어갈 수는 없다고, 죽음 이후에라도 예를 갖추어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는 아주 작은 소망이었을까? 그래서 그 아주 작은 소망이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자 했던 것일까?

 

유대인 관련 영화는 보고 나면 늘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버린다..

 

 

그레이 존(2011년) 팀 브레이크 넬슨 감독/데이빗 아퀘트/다니엘 벤잘리/데이빗 챈들러

 

1944년 가을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존더코만도 슐러머(다니엘 벤잘리)와 로젠탈(데이빗 챈들러), 호프만(데이빗 아퀘트)은 유태인들이 호송돼 오면 그들의 옷을 벗겨 가스실에 넣고 죽어서 나오는 사람들의 시체를 태우는 작업을 하는 대신 살 수 있는 특권을 받는다. 하지만 존더코만도는 4개월에 한 번씩 새로운 집단으로 바뀌고 그 전의 집단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반란을 준비한다.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몰아넣고 가스를 뿜어 대량학살을 하면서 그 시체들 처리를 같은 유대인들에게 맡기는 독일 나치들의 뻔뻔함을 넘어선 철면피함은 이 영화 [그레이 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게다가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너 좀더 살자고 어찌 동족을 불태워 죽이고 그 유골을 처리할 수 있느냐고 존더코만도들을 경멸하기까지 하는 나치들이다.

 

동족의 시체들을 처리한 대가로 일정기간 목숨을 더 연장한 존더코만도들. 하지만 며칠, 몇 주, 몇 달 더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조만간 죽을 목숨들인걸.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동안 수동적인 모습만 보여왔던 유대인들이 저항에 나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결국엔 죽을 목숨이라면 나치에 피해라도 주고 죽자고 마음먹은 존더코만도들. 그리하여 13개의 가스실 중 12개를 화약으로 폭파시키는 용기를 낸다.

 

 

가스실에서 죽이고, 밀고를 하지 않는다고 마치 장난감 총을 쏘듯 빵빵 총을 쏘아 죽이고.. 나치들에겐 유대인들이 개미나 지렁이 만도 못한 존재로 보였으리라.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어렵게 용기를 낸 존더코만도들에게 큰 격려와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그런데 왜 [그레이 존]이란 제목을 붙였을까? 유대인들의 수용소는 회색지대라고 할 수 없는데, 존더코만도들의 존재가 불분명한 것을 가리킨 걸까?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그레이 존(gray zone)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일단 어느 세력권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하고, 정치에서는 중동과 같이 어느 강대국의 세력권에 속해 있는지 분명치 않은 지역을 뜻하며, 경제에서는 기업의 신규 사업이 기존 제도에 규칙으로 정해져 있지 않아 규제의 범위 안에서 불명확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아마도 유대인이면서 스스로 유대인이 아니라고 생각해야만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낼 수 있었던 존더코만도들의불투명한 정체성을 표현한 제목일 수도 있겠다.

 

이상, 존더코만도..사울의 아들 / 그레이 존입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