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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으로 보는 세상

물 긷는 사람들과 내가 모르고 있을 소중한 것

 

며칠 전 카톡으로 <내가 모르고 있을 소중한 것>이라는 글을 받았습니다.

어느 해 겨울, 험한 산을 오르던 어느 등산가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

작은 초가집을 발견하고는 무조건 들어가 쓰러지고 말았는데,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정신을 차려보니 어떤 할머니가 자신을 간호하고 있더랍니다.
할머니는 고맙게도 궁색한 살림인데도 그에게 겨울양식을 꺼내주며

정성껏 보살폈고, 덕분에 그는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실은 그는 대기업의 회장이었는데, 며칠 후 산을 내려가기 전에 생명의 은인인

할머니에게 어떤 보답을 해드릴까 궁리하다가 그 집이 벽이며 문이며

온통 구멍이 나서 차가운 바람이 숭숭 불어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할머니가 따뜻하게 사실 수 있는 집을 사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거액의 수표가 든 봉투를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그 후 몇 년이 흐르고 그는 다시 그 산에 가게 되었는데, 그 할머니 집이

예전 그대로인 것을 보고 뛰어들어가보니 할머니는 홀로 죽어 계시더랍니다.

아마 겨울 양식도 없고 너무 추워서 동사한 듯 보였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내가 그렇게 큰돈을 드렸는데!"
그 순간 그는 자신이 할머니에게 드렸던 수표가 문의 구멍난 곳에

문풍지 대신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뿔사!" 그때서야 그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크게 후회하며

할머니를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드렸다고 합니다.

여느사람들이라면 더없이 소중하게 여길 거액의 수표도 차가운 바람을

막는 것이 더 시급한 할머니에게는 문풍지보다 나을 게 없었던 것입니다.

 

 

 

 

배가 고플 때는 한 끼의 식사가, 목이 마를 때는 한모금의 물이,

몸이 아플 때는 잠시의 휴식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필요합니다.

목이 마른데 밥을 주거나, 배가 고픈데 물을 주거나,

몸이 아픈데 경치좋은 곳이 있다며 여행을 떠나자고 하는 것은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힌 이기심이지 결코 상대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마찬가지로 따뜻한 감사의 말 한마디나 위로의 말이 필요할 때

돈을 내미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무지의 소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음 글은 지난 주보에 <물 긷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이명찬 신부님의 글입니다. 종교를 떠나서 지금 곁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바로 이 순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진정한 도움을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글이어서 올려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참 공허하게 들리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유명인사를 소개할 때 ‘전(前) 국회의원’, ‘전(前) 모 대학 학장’ 하는 식의

소개법은 그 사람의 ‘현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오직 그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갔던 ‘과거’만을 회상하게 합니다.

과거의 영광을 찬양하느라 정작 지금의 삶에 소홀한 것 같은 느낌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지방 ‘시카르’라는 고을에 있는 우물은 쉽게 볼 수 있는 보통 우물이 아니었습니다.

존경하는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천이백 년 전에 파놓은 우물로

오랜 전통뿐 아니라 대대로 많은 사람들의 목마름을 쉬지 않고 채워주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만큼 많은 사연과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쌓여 있는

‘위대한 우물’, ‘자부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랑스럽고 위대한 우물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곳을 매일 찾아오는 한 사람, 삶에 지치고 방황하는 한 여인의 삶을

새롭게 바꿔주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예수님은 꿰뚫었던 것입니다.

“그래, 이 마을 사람들이 천 년이 넘도록 마셔온 이 물이

지금 그대의 갈증을 근본적으로 풀어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이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드라마 대사가 한때 유행했습니다.

이 대사처럼 정말 요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합니다.

또 “안녕들 하십니까?”란 질문에 “난 안녕하지 못하다”고 아우성들입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아픔과 갈증의 현상에 때마침 ‘힐링 열풍’이 불면서

모 교수님은 ‘청춘은 당연히 아픈 것’이라 하고,

또 어떤 구도자는 ‘잠시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멘토링과 위로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갈증과 아픔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신앙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의 전통은 2천 년의 역사 동안 세월의 풍파를 거쳐왔고,

그것의 깊이와 수량의 풍족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물가의 예수님이 던진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신앙의 우물이 우리들의 영혼에 진정한 위로와 기쁨이 되고 있는지,

이런 전통의 힘을 바탕으로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신앙인으로서 자신있게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지 말입니다.

 

자랑만 해왔지 그것이 나의 목마름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다면,

전해져 내려오는 이 오래된 신앙의 우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훌륭한 전통을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젠 그 물을 직접 길어 올려 목말라하는 세상을 적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물가에서 물 긷는 자들입니다.

아마 세상이 목이 타서 이렇게 방황하는 것은, 우리의 무관심과 게으름 때문에

물 긷는 수고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반성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