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단 호크 줄리 델피 비포 선라이즈 / 비포 선셋 / 비포 미드나잇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주연의 비포 시리즈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세 편의 영화로 이루어져 있다. 굳이 순서를 지키지 않아도 좋지만, 각각 1994년, 2004년, 2014년에 제작되어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있으니 차례대로 보는 게 아무래도 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비포 미드나잇]이 2013년에 재개봉되고 [비포 선라이즈]가 2016년 4월에, [비포 선셋]은 2016년 8월에 재개봉되었다.
주무대는 [비포 선라이즈]는 비엔나, [비포 선셋]은 파리, [비포 미드나잇]은 그리스다. 19세에 만나 애틋한 마음을 간직한 채 헤어진 후 9년 후에 다시 만나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9년 후 만나 길고 긴 삶과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비포 시리즈다. 같은 주인공이 세 편의 영화 속에서 18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이들어 가면서 풋풋함은 덜해지지만 지혜와 원숙미가 더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색다른 묘미다. 또한 각 나라 도시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할 수 있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영화 속에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와 처음 만나 첫 [비포 선라이즈]를 만들고 그 후 9년마다 만나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을 연출하면서 18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한 미국 독립영화계 대표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비포 선라이즈]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했으며, 비포 시리즈 모두 베를린영화제 초청을 받았다.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비포 선라이즈 / 비포 선셋 / 비포 미드나잇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기차 안에서 시끄럽게 부부싸움을 하는 독일 부부를 피하려고 자리를 옮기다가 인사를 나누게 된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덧 어린시절 이야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둘은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친밀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제시는 셀린느보다 먼저 비엔나에서 내려야 할 처지다. 셀린느와의 헤어짐이 못내 아쉬운 제시는 그녀에게 기차에서 하루 동안 비엔나를 여행하자고 제안한다.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비포 선라이즈 / 비포 선셋 / 비포 미드나잇
생각과 관점이 달라도 서로를 수용하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은 더없는 행복이다. 거기에 덧붙여, 젊음으로 더없이 빛나는 두 남녀는 점점 더 상대에게 빠져들고, 그들 앞에는 예술의 도시 비엔나 거리가 펼쳐져 있는데다 단 하룻밤이라는 시간 제약까지 있다. 어찌 애달픈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있으랴.
서로를 알고 서로를 알리기 위해 대화에서 대화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풋풋한 사랑의 감정은 순수 그 자체다. 그리하여 귀여운 미소년 분위기의 에단 호크와 선악이 그 얼굴에 함께 공존하는 듯한 묘한 매력의 보티첼리의 천사 줄리 델피가 씨실과 날실로 한 올 한 올 빚어나가듯 주고받는 대화의 향연은 참으로 충만하고 풍요롭다. 하룻밤에 몇 년을 함께 해도 못 나눌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비엔나. 그곳에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비엔나 곳곳을 걸으며 각자의 인생관이며 사랑관, 미래에 대한 가치관 등 진지한 대화를 이어나간 두 사람은 이윽고 아침이 되자 다시 비엔나역으로 돌아온다. 둘은 6개월 뒤 다시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서로를 떠나보낸다.
헤어짐이 아쉬운 두 사람. 이 두 사람의 애틋한 작별의 장면이이야말로 [비포 선라이즈]를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아름다운 영화로 완성시켜 준다. 또한 이어지는 비포 시리즈 중 [비포 선셋]과 [비포 비드나잇]을 계속 봐야 할 이유도 제공해 준다.
낭독회가 끝난 후 제시는 곧 뉴욕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파리에서 살고 있는 셀린느는 8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카페에서 제시와 함께 커피를 마신 후 파리 거리를 거닐며 그 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숨쉴 틈도 이어나간다.
6개월 후가 아니라 9년 만에 다시 만난 제시와 셀린느. 제시는 약속을 지켜 6개월 후 약속장소에 갔지만, 셀린느는 그 즈음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 그곳에 가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약속은 이미 어긋났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9년 전 그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아는 두 사람. 하지만 둘에겐 저마다 연인이 있고, 세월의 흐름 속에서 주변상황이 변해버린 만큼 서로 더 다가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더 멀리 가지도 못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금기의 선을 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역력하다.
[비포 선라이즈]에서도 그랬지만, [비포 선셋]에서도 가슴속 격렬한 감정을 이토록 잘 절제하는 두 사람이라니.. 남녀간이 아니라 제시와 셀린느, 두 사람이 서로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 갖는 크나큰 사랑이 아닌가 싶다. 소통과 공감이 잘되는 사람에게 저절로 이끌리는 마음이리라. 하긴 이런 사랑이라면, 그리고 이런 사람이라면 순간적인 열정을 불태움으로써 소중한 사람을 잃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이제 다시 헤어짐을 앞둔 두 사람, 엔딩에서 셀린느는 기타를 치며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부르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제시의 시선이 애처롭다. 두 사람은 과연 이대로 헤어질 수 있을까? 그리하여 서로에게 잊혀진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까?
두 사람의 낭만적인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지만, 이제 현실의 무게에 조금은 짓눌린 듯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공감하고 대화로 서로의 마음을 소통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제시와 셀린느의 내공이 놀랍다.
다시 9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시는 이혼을 하고 아들은 전아내에게 맡긴 채 셀린느와 결혼한 상태다. 두 사람 사이엔 인형처럼 귀여운 쌍둥이 딸이 있다. 평생을 함께해도 늘 사랑이 넘칠 것 같던 두 사람이지만 어느덧 현실의 더께가 쌓인 모습으로 여느 부부와 다를 바 없이 다투고 화해하면서 살아간다. 마치 [비포 선라이즈]에서 기차 안에서 말다툼을 심하게 벌이는 바람에 두 사람의 만남의 계기가 되었던 그 부부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부부간에 친밀감이 깊어지다 못해 익숙함에 사로잡히게 되면 서로에 대한 배려심이 없어질 뿐 아니라 말도 가리지 않고 함부로 내뱉게 되곤 한다. 그래도 제시는 아직 정도를 지키고 있지만, 셀린느는 점점 현실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데 거침이 없다.
하지만 서로의 사소한 말, 하찮은 행동에 상처를 받는 건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다. 현실적인 힘겨움을 털어놓는 건 좋지만, 그 문제를 오로지 상대를 통해 해소하려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을 갉아먹는 짓일 뿐이다. 그렇게 자꾸 상처를 내면 더 이상 상대를 배려해 주고 감사줄 힘이 없어져 가기 때문이다. 말 안 하고 쌓아두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함겨운 삶을 상대 탓으로 돌리고 공격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시와 셀린느의 사랑이 현실적으로 무르익어가는 것으로 보이기보다는 독설로 상대를 찔러 피를 내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공연한 노파심일까? 젊은시절의 열정은 서서히 사드라들어 가더라도 상대에 대한 존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제시는 가능한 한 셀린느를 존중해 주려고 노력하지만, 셀린느는 제시에 대한 존중심이 그에 못 미치는 듯하다.
부부로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사랑이 아니라 배려, 신뢰, 그리고 존종하는 마음이다. 사랑은 부부로 살아가는 여정에 감히 첫 발을 내딛게 해주는 구동장치일 뿐이다. 두 사람의 깊디깊은 사랑에 별걱정을 다 한다 싶으면서도 왠지 자꾸 아슬아슬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아마도 그만큼 [비포 선라이즈]의 그 순수한 사랑과 열정으로 두 사람이 남은 여생도 아름답게 수놓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고 간절하기 때문이리라.
이상,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비포 선라이즈 / 비포 선셋 / 비포 미드나잇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