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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떻게 회피하는 습관에서 벗어났을까?

미야자키 하야오 어떻게 회피하는 습관에서 벗어났을까?

 

미야자키 하야오, 에릭 호퍼, 키에르케고르, 헤르만 헤세, 조앤 롤링, 융, 톨킨 등은 모두 회피형 인간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저마다 자신만의 노력으로 회피에서 벗어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정신과 의사 오카다 다카시는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에서 회피형 인간들의 심리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자세히 들려주고 있는데, 이 중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떻게 회피에서 벗어났는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떻게 회피하는 습관에서 벗어났을까?]입니다. 오늘날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회피형 인간들의 감정이나 행동방식, 세계관과 인생관을 알고 그들과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좋은 지침이 될 것입니다. 회피형 인간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소극적이고 신경이 과민했던 소년 미야자키 

 

[이웃집 토토로],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천공의 라퓨타] 같은 걸작 애니메이션으로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어린시절 아주 소극적이고 신경이 과민한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책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그는 날마다 옷을 바꿔 입는 것에도 예민해서 늘 똑같은 옷을 입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미야자키의 불안한 성향을 더욱 강하게 만든 것은 어머니의 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척추가 결핵균에 감영되어 생기는 질병인 척추카리에스로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직후부텨 9년이나 요양생활을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그는 언제나 착한 아이로 행동해야만 했기에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천공의 라퓨타]에 등장하는 하늘해적 여대장 도라는 미야자키의 어머니가 모델이라고 합니다. 도라는 늘 큰 소리로 부하들을 질책만 존재인데, 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랬습니다. 병에 걸린 상태였지만 존재감이 매우 강한 여장부였던 어머니에게 그는 칭찬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오랜 기간 부재상태였기에 그에게 그리 좋은 '안전기지'가 되어주지도 못했습니다.

 

 

 늘 불안해하는 미야자키 곁을 지켜준 것은 형 아리타와 후미오 선생님이었다

 

불안감이 강한 소극적인 기질로 인해 청년기까지의 미야자키는 자기 의사를 주장하는 게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고교시절에는 만화가가 되겠다는 뜻을 품었지만, 그림으로는 밥 먹고 살기 힘들다는 아버지의 말에 예술계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포기하고 가큐슈인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다만, 대학에 다니는 동안은 만화가가 되기 위한 '모라토리엄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미야자키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준 것은 형 아리타와 중학교 시절 은사인 사토 후미오 선생님이었습니다. 기쿠슈인대학을 선택한 것도 형이 다니는 학교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형은 어릴적부터 미야자키를 지켜주는 존재였습니다. 허약하기 그지 없었던 그의 '보호자'였던 것입니다. 한편 가족 이외에 그가 고민이 있을 때마다 상담을 해준 사람은 사토 후미오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는 후미오 선생님에게서 자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유화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당시 가쿠슈인대학에는 만화동호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아동문학연구회에 드나들었습니다.

 

 

 학생운동에 참가한 일이 미야자키의 회피하는 습관을 바꿔주었다

 

미야자키의 회피하는 습관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되는 것은 바로 그가 학생운동에 참가했던 일입니다. 당시는 아직 좌우이념이 대립하던 시기였는데, 대학가에는 좌익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미야자키도 서서히 그러한 시대의 흐름에 젖어들어갔습니다. 그의 경우에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죄책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친가는 전쟁 중 군수공장을 운영하며 큰돈을 벌었기 때문입니다.

 

미야자키는 그 점을 몹시 부끄러워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말을 하곤 했습니다. 좀 늦게 반항기가 시작되었던 셈입니다. 그때까지 어머니에게 반항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그는 어머니와 정치적인 문제로 토론을 벌였고, 자신의 주장을 어머니가 도저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 분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비로소 어머니를 조심스러워하며 그 지배 아래 있었던 자신의 존재를 밖으로 내걸고 자신만의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타인과의 유대감과 인간적인 온기로 회피하는 습관에서 벗어난 미야자키 

 

대학졸업 후 도에이 동화에 취직한 미야자키는 춘투기간에 일어난 사내 노동운동에서도 선두에 나서서 깃발을 휘둘렀습니다. 그 후 정치적 활동에서는 손을 뗐지만 연대감을 가지고 약자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마음은 그의 작품세계에 큰 기조를 이루게 됩니다.

 

약자 중에서도 특히 미야자키가 주제로 다룬 것은 어린이입니다. 당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가 중 한 사람은 생텍쥐페리였습니다. 어린이가 가진 순수함과 밝은 빛이 어른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슬픔이라는 주제는 생텍쥐페리 작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는데, 그는 거기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주제는 훌륭한 형태로 계승되어 독자적인 전개를 펼치게 됩니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회피적이고 스스로 바깥무대에 서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허약한 소년은 자신 이외의 존재를 위해 싸우는 공동체 정신으로 스스로를 일체화시켜 가면서 회피와 책임에서 도피하는 행동을 중단하게 됩니다. 그 동안 결혼을 해서 아이가 태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굴레에 속박당해 자유를 잃어버린 측면도 있지만, 책임을 떠맡은 이상 그의 내부에 결핍돼 있던 타인과의 유대감인간적인 온기라는 요소가 새롭게 주입되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감독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떻게 회피하는 습관에서 벗어났을까?입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