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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링컨 사사로운 이해관계보다 대의를 앞세운 정직한 에이브

 

링컨 사사로운 이해관계보다 대의를 앞세운 정직한 에이브

 

거의 무명의 길을 걸어온 링컨이 1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선후보로 결정되었을 때 공화당은 일대 혼란에 빠집니다. 그들은 ‘링컨’이라는 성을 가진 대선후보자의 이름이 ‘아브람’인지 ‘에이브러햄’인지조차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반면 민주당은 링컨을 두고 ‘서쪽 변경지역 출신의 삼류 변호사’라며 내놓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사실상의 무학(無學)경력은 물론 세련돼 보이지 않는 그의 외모까지 언급하며 공화당을 조롱하기에 바빴습니다. 또 남부의 한 신문은 “앞으로 점잖은 백인이라면 아무도 대통령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라고 빈정대기까지 했습니다.

 

[링컨과 남북전쟁 그리고 노예해방선언]의 저자 김종선이 들려주는 [링컨 사사로운 이해관계보다 대의를 앞세운 정직한 에이브]입니다.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함께 대통령 선거에 나선 경쟁자들로 초대 내각을 구성했던 링컨의 포용력에 새삼 놀라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사사로운 이해관계보다 대의를 앞세운 정직한 에이브

 

1850년 당시 미국의 인구는 약 2천 3백만이었다. 이들은 미국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아 그 후 10년 동안 두 차례 있었던 대통령선거에서 전체 유권자의 4분의 3이 매번 투표에 참여하는 열정을 보였다. 이 중에서도 대의원들이 큰 관심을 보인 것은 곧 있게 될 대선에 나설 후보를 지명하는 일이었다.

 

경선에 나서는 후보들은 전당대회 전에 미리 공식적으로 등록하거나 선언할 필요 없이 당일 현장에서 대의원들의 추천으로 표결대상에 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몇 명이나 될지는 미리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천타천으로 대의원들 사이에 유력하게 떠오르는 경선후보는 뉴욕주 출신의 윌리엄 수어드(Willam Seward), 오하이오주 출신의 새먼 체이스(Salmon Chase), 미주리주 출신의 에드워드 베이츠(Edward Bates), 그리고 일리노이주 출신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n) 네 사람이었다.

 

윌리엄 수어드

 

이 중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수어드였다. 뉴욕 주지사를 두 차례나 하고, 그 후 연방상원으로 진출해 10년 이상 워싱턴에서 활동했던 그는 전국적인 지명도에서 앞서가는 베테랑 정치인이었다. 게다가 그의 정치적 기반인 뉴욕주는 대의원 수가 가장 많아서 그만큼 더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그를 바짝 뒤쫓는 체이스 역시 오하이오 주지사와 연방상원의원을 지냈을 뿐 아니라 공화당 창당에도 크게 기여해 주목받는 정치인이었다. 그의 정치적 연고지인 오하이오주 역시 대의원 수가 세번째로 많아서 오하이오 대의원들의 지지만 다 받아도 수어드에게 충분히 맞설 수 있었다.


한편 미주리주에서 온 베이츠는 지명도에서는 수어드나 체이스에 밀렸지만 주의회는 물론 연방하원에서도 활동했을 뿐 아니라 일찍이 미주리주의 헌법제정에도 참여했던 원로정치인이었다. 특히 미주리주는 남부와 북부의 접경지역에 있었던 만큼 이 지역 명망가인 베이츠는 당시 전쟁설로까지 이어지던 남북간 갈등을 완화시켜 줄 인물로 지지세를 넓혀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맞설 공화당 대선 경선후보 링컨은 경력이라곤 주의원 네 번에 연방하원의원 한 번, 연방상원의원선거에서 두 차례 낙선한 게 전부인 시골 변호사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는 벽촌 일리노이주 출신이었다. 일리노이주 대의원들의 힘만으로는 결코 경선을 통과할 수 없는 그는 어떻게든 다른 주 대의원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내야만 했지만, 그가 다른 주에서 온 대의원들의 표심을 사로잡기 위해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은 없는 듯했다.


새먼 체이스

 

각기 다른 지역을 대표하며 활동하고 있던 이 네 사람의 사는 모습은 많은 점에서 달랐다. 먼저 네 사람 중 가장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낸 수어드는 성년이 되어 정계로 입문하게 될 때까지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다. 뉴욕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수련을 받은 후 법률가의 길을 걷는다. 전형적인 변호사 입문과정을 거친 것이다.

 

체이스도 어린시절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지낸다. 하지만 9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사업 실패의 여파로 세상을 떠나면서 갑자기 부닥치게 되는 경제적 궁핍으로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15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다트머스대학에서 공부한 후 워싱턴으로 가서 가정교사 일을 하던 중에 만난 한 학부모에게서 영향을 받아 법률가의 길로 들어선다. 

 

버지니아주 유서깊은 가문에서 태어난 베이츠 역시 체이스처럼 어린시절은 원만하게 보내지만 참전을 금지하는 퀘이커교도였던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립전쟁에 참여하기를 고집했던 아버지로 인해 초년고생을 면치 못한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고향사람들로부터 사실상의 추방에 가까운 외면을 받으면서 경제적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에 미주리 준주 행정장관이었던 형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고 법률공부를 하게 되는 행운을 누린다.

 

에드워드 베이츠

 

이처럼 크고 작은 후원에 힘입어 법률가의 문턱으로 들어서면서 자신의 길을 열어갈 수 있었던 세 사람과 달리 링컨은 개천에서용이 되는 길을 혼자 외롭게 개척해야 했다. 켄터키주 한 외진 농장의 통나무집에서 2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링컨은 가난한데다 글이라곤 전혀 몰라 자기 이름 대신 어설픈 기호로 서명을 대신해야 했던 아버지를 따라 켄터키, 인디애나, 일리노이주로 이주해 오는 통에 제대로 된 학교라곤 구경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글을 알았던 어머니가 집에 있는 유일한 책인 성경책으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어머니마저 링컨이 9세가 되던 해인 1818년 가을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링컨은 늘 지식에 굶주려 했다. 제대로 된 학교라곤 없었던 변방 오지에서 그런 링컨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책밖에 없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책을 구해다 읽고 또 읽었다. 때로는 책을 들고 아침 일찍부터 나무 아래에 자리잡은 후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계속 옮겨앉으며 종일 책을 읽었다고도 한다. 훗날 링컨은 성경과 이솝우화는 당시 하도 여러 번 읽어서 저절로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에 대한 기록을 보면 수학은 물론 영문법조차 혼자 독학으로 익혔다고 나와 있는 만큼 그는 나중에 “내게 가장 반가운 친구는 내가 읽지 않은 책을 가져다주는 친구였다”라는 말을 남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독서에 대한 링컨의 그런 집착은 아버지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링컨의 아버지는 아들을 노동력 이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듯 집안에 따로 일거리가 없을 때는 이웃으로 품을 팔아 나가게 했다. 그 때문에 그는 나룻배를 타고 멀리 미시시피강을 따라 물건을 실어나르는 일을 비롯해서 그야말로 안 해본 일이 없을 만큼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실망한 링컨은 결국 법적으로 성년이 되는 22세가 되자 즉시 집을 떠나 도시로 나가 일자리를 구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빌려다 읽는 생활로 뛰어든다. 그리고 25세에 뒤늦게 법을 공부하기로 뜻을 굳힌다. 수어드와 체이스, 베이츠처럼 변호사 사무실에서 법전을 읽으며 수습하는 일반적인 입문과정을 밟을 형편이 못 되었던 그는 지인들에게서 법전을 빌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혼자 법을 공부한다. 

 

 

그 후 험난한 길을 걸어 마침내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링컨은 곧바로 초대 내각 인선 구상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명단에 들어 있던 사람은 모두 7명이었는데 놀랍게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자신과 경합을 벌였던 세 사람, 수어드, 체이스, 베이츠가 첫머리에 들어가 있었다. 개인적인 역량이나 경륜에서 자신보다 오히려 앞서 있을 뿐 아니라 적지 않은 지지세력까지 확보하고 있는 이들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세 사람 외에도 링컨은 당시 극도로 분열돼 있는 국론의 화합을 위해 구휘그당, 노예제 폐지론자, 심지어 노예제에 반대하는 구민주당 인사들까지 영입하려 했다. 이들이 각자 다른 목소리를 내며 자신들이 대표하는지역과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가감없이 국정에 반영되어 더 이상 국론이 분열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사사로운 이해관계보다 늘 대의를 앞세워 ‘정직한 에이브’로 알려진 링컨이었던 만큼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먼저 대선후보 경선에 함께 나섰던 수어드와 체이스, 베이츠를 첫번째 영입순위로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생각은 상대방의 수락 여부와는 상관 없이 장차 링컨 자신의 정치적 행로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이들이 거의 무명에 가까운 링컨이 자신들을 제치고 공화당 대선후보로, 또 나중에 대통령으로까지 선출된 사실에 완전히 승복하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그래서 4년 후에 있을 새로운 대통령선거에 나설 생각을 접지 않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장차 중요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링컨에게 협조하기보다는 자신들 각자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며 링컨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더욱 열중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링컨은 곧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취임 후 특유의 포용력과 친화력으로 정치적 개성이 강한 이들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며 비상한 국정난제들을 함께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이상, [링컨 사사로운 이해관계보다 대의를 앞세운 정직한 에이브]였습니다.